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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서율 Dec 28. 2021

파도 자국

그래서 우리

서율은 자신이 오래전 입원했던 이 병원에 다시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정말로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의지가 없는 석상처럼 오늘 이곳에, 역시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사람과, 함께 서있다. 나를 사랑한다 했지만 사랑한 적 없는 이 남자, 문지우. 지난 십오 년 넘는 세월을 돌아오면 그녀의 목에 차오르는 것은 그날의 아픔, 그것이었다. 사랑에 대한 목적어가 그녀에게는 없었다. 


서율은 줄곧 생각했다. 슬픔을 잊기 위해서 그녀가 해왔던 모든 것들에 대해서. 술과 담배와 음악과 몰입에 관해서. 사람들이 모두 음악에 심취한 공연장에 가서 몸을 흔들고, 적당히 술을 마시고, 적당히 어울려 공동의 관심사를 나누는 모임들 속에서, 그녀 자신의 진짜 아이덴티티를 감추었던 나나들을.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멀리 하며 또 다른 자신으로 거듭나려고 했음에 다름 아니었던, 그 나비의 날갯짓 같은 동작들을. 서율의 마음속에는 많은 열정들이 있었다. 빛바래고 찢겨나갔을지언정, 대학교 시절 가졌던 그녀의 꿈은 그 자리에 그냥 고스란히 있었다. 활짝 펼쳐볼 여력도 없이 꾸역꾸역 삶을 위해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순간들의 진혼곡이 마음속에서 낮고 스산하게 울려 퍼진다. 


나는 지금 슬픔의 바닷속이다. 내 인생은 부서진 사랑뿐이다. 내게 남아있는 감정은 화남과 슬픔이다. 서율은 여전히 심연의 바닷속에서 혼자 울고 있는 외눈박이 소녀였다. 그녀 인생에서 배운 모든 사랑은 부서졌고, 두 사람은 멀어졌고, 나는 슬퍼한다. 부서진 마음은 언제 다시 채워질까, 상처는 언제 사라질까. 이제는 지겹다. 내가 생각하는 관계가 세상에 존재하기는 할까. 내가 진짜 사랑받았다는 느낌이 없다. 내가 사랑했던 건 맞을까? 모든 걸 부정해야만 하는 지금이 싫다. 이별이 두려우면서 사랑을 꿈꾸는 자가당착도 싫다. 나는 모순덩어리다. 원하는 게 뭔지 모른다.


지우를 보면 떠오르는 이 모든 감정의 소용돌이는 서율이 굳건히 지켜온 인생을 송두리째 흔드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서율은 그녀 안에 지율에 대한 사랑이 없다는 것도, 자신의 아이라지만 그 아이를 챙길 수 있는 감정적 여력이 없다는 것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무조건 적인 사랑을 배운 적이 없다. 서율이 엄마에게 받은 방관에 가까운 양육 방식은 그녀를 더더욱 강하게 했고, 동시에 내면을 황폐한 황무지로 만들었다. 그저 많이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어 했던 서율에게 지우의 적당히 강압적이고 묘하게 안심되는 언행은 딱 적당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서율은 그가, 자신을 책임져 줄 만큼 사랑하기에, 자신에게 그 모든 행동을 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한참을 울고 나니 서율은 자신이 서있는 곳이 절벽 끝임을, 지난 십오 년 동안 그저 그 자리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버티고 기도했음을 깨닫는다. 309호의 문이 열렸고, 얼굴에 핏기 없는 아이가 보인다. 지율은 생각보다 키가 꽤 컸다. 지우를 닮아서인가. 코끝이 날카롭고 턱선도 여린 아이는 적당히 예민해 보이는 눈매를 가졌다. 


-지율아, 엄마 왔어.


지우가 말문을 열었다.


-… 엄마? 나 엄마 없어.

-지율아, 할머니가 엄마 늘 없다고 했지만 사실은 계셨어.


생모가 이미 죽어 세상에 없다는 이야기를 듣는 아이의 심정은 어떠할까?


서율은 그런 마음을 알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엄마라는 이름이 내리 꽂히는 순간 그녀 마음에 일어나는 파장 속에는 한없이 엄마를 그리워하고 기다렸던 어린 날의 그녀가 있었다. 화장을 곱게 하고 긴 파마 생머리를 날리며 힐을 신은 엄마의 고운 모습을 동경하던 소녀가 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너무 바빠 나를 돌보지 못했을 뿐이다. 내게 많은 것들을 스스로 하게 두었을 뿐이다. 하지만 세상에 없었던 건 아닌 것 하나만으로도 위안이 되었을 그 이름, 엄마.


그리고 서율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었다. 끅끅 쇳소리가 나오고 콧물이 줄줄 흐를 만큼 모든 걸 내려놓고 속죄하려는 듯 울었다. 누구에, 무엇에 관한 속죄 일지 몰랐다. 지율이나 지우는 내가 갈 수 없는 먼 섬과 같이 보였다. 세상의 괜한 일들에 상처 받지 말자고 다짐했지만 그날 그 자리에서 그녀 삶에 낙인찍힌 커다란 방점이, 이야기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그녀 스스로 찍은 낙인이, 얼마나 멀리 나를 휩쓸고 이 길을 돌아왔을까. 중증의 우울증과 섭식 장애 그리고 불면증으로 하얗게 달뜬 저 아이의 마음에 어떤 어둠이 드리워져 있을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서율이 정신을 차린 건 하얀 벽의 병실에서였다. 그렇게 울다 기절했나 보다. 지우는 깨어난 그녀를 보고 아무 말 없이 겉옷을 챙겨 나갔다. 그의 눈시울도 붉어져 있었다. 내 눈이 짓무른 탓일까. 알지 못하고 계속 잠만 잤다. 서율은 새벽녘에 겨우 손을 뻗어 휴대폰으로 김 과장에게 신청을 대신하는 문자를 보냈다. 매년 있는 휴가도 다 쓰지 못하는데, 체력이 방전되어야 겨우 이틀 정도 쉬는 수준의 십여 년을 보냈었다. 다행히 주말이 눈앞인 목요일의 밤.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했던 203호 할머니가 돌아가신 건 그 주 토요일이었다. 


**


준철은 봉사활동을 하던 병동의 간호사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기분이 마구 가라앉았다. 마침 주말이고, 또 할머니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이야기를 해왔던 터라, 자연스럽게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보통은 자신이 봉사 기간에 만난 모든 분들이 고인이 되신 곳에 가지는 않는다. 막상 가보면, 둘 사이에 어떤 다리처럼 놓였던 유대관계가 더는 존재하지 않고, 동시에 자신의 비밀이 더 이상은 세상에 나올 일이 없다는 안도감에, 이 양가감정 속에 있는 괴리감이 느껴지는 게 싫었다. 순수하게도 지금 돌아가셨다는 이 할머니는, 많은 인생의 회한을 가지고 계셨다. 손자와 아이 엄마를 멀리 떨어트려놓고 키웠다고 하셨다. 그게 아이에게 좋은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이가 아픈 걸 보니 역시 잘못한 거라고 그러셨다. 


장례식장에 도착했을 때, 상주인 남자와, 그 옆에 멍하니 앉아있는 아들 또래의 아이와, 문상을 온 듯 하지만 가족처럼 머리에 하얀 핀을 꽂은 파리한 차림의 여자를 보았다. 며칠 전 병원에서 본 수영 기업 박 차장. 박서율이었다. 순간 잠시 준철은 생각이란 걸 해 보았다. 저 두 사람이 모자이고, 세 사람이 가족이라면, 할머니는 저 여자에게 어떤 이유로든 모진 짓을 했겠구나라고. 저 남자가 은빈 선배의 추억 속의 사람이라면, 은빈 선배는 왜 유부남을 사랑했을까 의아했지만, 이내 납득이 되었다. 은빈 선배는 늘 멀리 있는, 나이가 많은 사람을 동경하는 듯한 사람이었다. 


이 가족의 비밀을 목도하는 것만 같아 별로였지만, 조용히 목례와 묵념을 하고 고인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그리고 잠시 다른 조문객들과 겸상을 하며, 토요일 밤의 장례식장에 앉아 소주를 한 잔 따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잠시, 은빈 선배를 생각했다.


**


은빈은 와인을 한 잔 마시고 있었다. 모든 것이 귀찮고, 혼자만의 공간에 멍하니 앉아 와인을 홀짝이면서 예의 그 황금 같은 주말을 보내고 있는 자신이 참 별로였다. 동경하던 사람을 놓지 못하고, 그 사람을 대신할 누군가를 끊임없이 찾아 헤매어 온 여자로서의 바보 같은 삶이, 너무 싫었다. 하릴없이 끄적대는 노트에는 어이없는 눈물이 하나 둘 떨어졌다. 


그냥 다 포기해 버리면 좋았을걸. 행복해지려는 일 따위, 평범하게 살려는 일 따위. 


- 선배, 뭐 해요?


준철의 문자였다. 군더더기가 없는 말. 썸을 타자는 사람의 말. 어딘지 쓸쓸한 말. 앞도 뒤도 없이 본론만 있는 말. 은빈은 그것이 마치 자신의 욕망 같다고 생각했다. 마음은 없이 욕망만 남은, 가슴은 없이 머리만 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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