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를 잡았더라면, 우린 지금 달라졌을까
20여 년 전 벚꽃이 흐드러지던 4월 초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세 번의 교환 학생 선발 시험 끝에 도쿄 근교의 한 대학교에서 한 학기 수학을 시작하게 되었다. 학교에서 마련해 준 원룸은 2차선 도로 바로 옆에 위치한, 주유소 겸 오토바이 정비소 3층에 딸려 있었다. 학교로 향하는 구불거리는 산비탈 길 바로 아래 자리 잡은 도로변 집이어서, 조금만 멀리 보면 초록색이 확 들어오는 풍경이었다. 그렇지만, 밤이 되면 오토바이 소리와 가끔 과속하는 자동차 굉음으로 백색 소음 또한 끊이지 않았다. 그래도 혼자 집을 떠나 몇 달씩 사는 것이 처음이었던 나는 그 소리를 벗 삼아, 첫 이 주일 정도는 무서워하지 않고 잠들 수 있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강의, 동아리, 요리 동호회 등에 가입하면서 나에게는 금세 다양한 친구들이 생겼다. 교환학생들은 자동으로 ‘스푸트니크 (러시아어로 Спутник, 동반자라는 뜻)’이라는 동아리에 소속되어 일본인 학생들로부터 언어/문화/생활 전반에 걸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동아리에서 친해진 일본 친구들은, 또 자신들의 과 친구들까지 끌어들여 각자 마음 맞는 모임을 늘려가고 있던 즈음. 나는 영화론이라는 수업을 청강하러 갔다가 ‘현미 군’을 만났다. 자신의 도시락 주식으로 매일 현미밥을 싸 와서 별명이 ‘현미 군’인 그 아이는 키가 크고 웃는 모습이 서글서글한 동아리 친구의 과 동기였다. 영화론 수업 제일 앞줄에서 튀는 보라색의 짧게 친 머리를 한 내게 다가온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너, 요리하는 거 좋아한다며? 뭐 잘 만들어?’
영화론 수업은 과제가 '영화 보고 감상문 쓰기'밖에 없었다. 누나가 셋이나 있어서 요리가 취미라는 현미 군이랑 나는 영화론 수업 과제를 빌미 삼아 자주 만났다. 우리들은 학교가 있는 도쿄 근교에서 한 시간 반씩 열차를 타고 시내에 있는 영화관, 서점 등을 다니며 친한 친구가 되었다. 대학교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던 시기에 만난 우리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어쩌면 그렇게도 많았을까? 각자의 취향, 소신, 좋아하는 책, 영화, 음악, 인생의 청사진에 대해서까지. 걷고 또 걷고, 입에서 단내가 나게 말해도 현미 군과 있으면 늘 시간이 부족했던 몇 달이었다. 가끔 난 그를 위해서 핫케이크 가루로 작은 사과파이 같은 걸 굽고, 김밥을 말기도 했다. 그러면 그는 자기 가족에게 소개해 주고 싶은 맛이라며 웃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라며 한국으로 치면 조용필 정도 되는 일본인 가수의 음반을 사서 와서 들어보라며 건네며 웃던 모습이 선하다. 그리고 몇 달 후에, 예정대로 그는 교환학생 신분으로 독일로 떠나며 우리는 헤어졌다. 그와 비슷한 시기 졸업을 위해 귀국해야 했던 나도, 한국에 돌아와 취업 활동이랑 아르바이트를 동시에 하면서 그를 보고 싶어 했던 내 마음을 이겨내려고 애썼다. 그렇게 미래를 위해 바쁘게 지내면 괜찮아질 줄 알았던 어느 아침에, 나는 일어나서 사설을 읽으려고 신문을 펼쳤는데 거기에 시가 한 편 실려 있었다. 황지우 시인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라는 시였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나는 눈물이 흘러넘쳐서 신문지 위로 뚝뚝 떨어지는 바람에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때까지 나는 한 번도 현미 군을 가슴 깊이 사랑한다고 인정한 적이 없었다. 그에게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내 보지도 않았다. 그냥 나는 떠날 사람, 그도 머무르지 않을 사람으로 단정 지으며 젊은 날의 인연을 너무 쉽게 놓아버린 것임을 그때는 안타깝게도 알지 못했다. 무궁무진한 인생의 길들이 있을 것임을, 왜 멀리 돌아오지 않고서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 그리고 다시 1년 뒤, 봄비가 내리던 어느 날 저녁에 나는 그의 이메일 한 통을 받았다. 거기엔 그가 평소 하던 표현보다 더 많이 그리워하는 어투로 ‘우리들의’ 시간이 묘사되어 있었다. 그 시절의 나는 여전히 내 주변과 나 자신의 문제들에 침잠되어 있었다. 그때라도 당장 그를 만나러 갈 것을 그랬다.
그리고 다시 또 1년이 넘게 지난 시점에 나는 도쿄에 볼일이 생겨, 스푸트니크 시절 친구도 만날 겸 예전 그 학교를 다시 찾아가게 되었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 친구도 현미 군과 나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는 깔깔 웃으며 교정을 걷고 있었는데, 멀리서 키가 큰 그가 우리도 함께 알고 지내던 동아리 친구와 함께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때 나는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헤어지고 몇 년 동안 쭉 마음속으로 보고 싶었던 사람인데, 막상 눈앞에 있으니 서먹했다. 떨어져 있는 동안 우리들은 어떤 세상을 만났던 걸까? 그 틈 속에서 우리들에게는 얼마나 많은 하지 못한 이야기가 생겨났던 걸까?
그날 그도 나도 의외의 장소에서 처음 마주친 사람들처럼 어색한 인사를 나누었다. 그렇게 돌아서 걷는 내 마음은 가시밭길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다 나는 동아리 친구에게 바뀐 현미 군의 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그렇게 그와 나는 며칠 뒤 다시 만나서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와 갔던 호수공원, 서점, 그가 아르바이트하던 백화점의 케이크 가게까지 기억 속에 아직 생생했는데. 벚꽃이 녹음으로 바뀌던 2004년의 여름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시절 인연’이라는 말을 몰랐던 그 시절의 나는 영영 내 감정 앞에서 솔직하지 못했다. 그저 서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는 내 말에 그는 ‘넌 하나도 변한 게 없다’며 미소 지었다. 그 후로 나는 현미 군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
지금도 나는 그 시간을 가끔 그리워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나라에 와서 살았던 원룸들은 그 도쿄의 집과 비슷한 구조를 하고 있다. 작은 발코니가 있는 것도, 도로변 옆, 24시간 운영하는 주유소 겸 편의점 주변인 것까지. 이 오랜 일본 가수의 노래를 들으면 신기하게도 헤어지기 전에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난 호숫가의 일이,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각난다. 나는 그와 내가 대학생이니까 서로에게 할 수 있었던 단순하고 정직한 말들이 제일 그립다.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 세상에 때가 묻은 어른이 아니라, 순수한 눈과 입으로 했던 말들이 가끔은 마음에 사무칠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