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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 Apr 20. 2021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 와 플라톤의 <국가>

무엇이 인간을 통치하는가 : 두려움에서 기인한 욕망의 통제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와 플라톤의 <국가>     



‘옛날 옛적 스페인, 어느 작은 마을에 딸 다섯을 둔 엄마의 이야기.’     

안달루시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 는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희곡,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이다. 


두 번째 남편 안토니오가 죽은 이후 집안 전체를 장악한 베르나르다와 그의 폭력에 신음하는 딸들, 굳세게 문을 걸어 잠근 베르나르다의 집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와 문을 박차고 나가는 욕망들.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 는 긴 원작을 빠른 템포로, 그러나 섬세하게 잘 압축한 극이다. 극의 오버츄어 격인 Prologue에서 이미 작품의 배경과 캐릭터들의 특성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넘버는 베르나르다의 시종이자, 30년 동안 그를 보필해온 하녀 폰시아가 부른다. 가사를 조금씩 차용해 캐릭터들을 설명해 보도록 하겠다.      


베르나르다 알바

 ‘두 번 결혼을 했네, 처음 남편과 딸 하나를 낳아’

 ‘둘째 남편 가난했지만, 얼굴값 꽤나 했어. 말과 마구간이 남편의 전부.’     


작중 베르나르다는 안달루시아 출신이 아니다. 폰시아가 정숙하지 못한 그 지역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 지역 출신이 아니다.’라고 언급하는 바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베르나르다의 약점이기도 하다. 

     

 멀리서 온 무어인 소녀
 올리브 따다 일을 당했지     


그 무어인 소녀가 베르나르다의 핏줄인지, 아니면 베르나르다의 과거인지 우리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알 수 있다. 베르나르다가 이상할 정도로 욕망을 통제하는 것은, 그 지역의 무섭도록 견고한 배척과 여성에 대한 억압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베르나르다의 다섯 딸들에게도 이 억압은 고스란히 유산처럼 물려진다. ‘여자의 운명은 어머니의 운명을 닮아 있다’는 대사처럼 말이다.      


앙구스티아스

 ‘처음 남편과 딸 하나를 낳아, 첫째 딸 이름은 앙구스티아스.’

‘어느 날 그 놈은 딴 여자 품을 찾아 들어갔어, 그의 의붓딸 앙구스티아스’

‘베르나르다는 눈을 감았지, 뭘 할 수 있었겠어. 남은 딸 단속을 단단히 했지.’     


앙구스티아스의 이름은 고통 속에서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아 저항하기를 포기한다는 뜻이다. 딸에게 그런 이름을 붙여준 이유는 무엇일까. 첫 남편이 죽은 베르나르다는 두 번째 남편 안토니오가 앙구스티아스를 겁탈하는 것을 묵인한다. 남은 딸들만 단속할 뿐이다. 앙구스티아스는 39살이 될 때까지 결혼하지 못하고 집에 매여 있다.     

 

막달레나 

 ‘온종일 낮잠만 자.’     


둘째 딸이자, 안토니오에게는 첫째 딸인 막달레나. 예수의 제자인 마리아 막달레나에서 그 이름을 따 왔다. 정확한 근원은‘막달레나처럼 울다.’라는 말이라고 제작자가 언급한 바 있다. 안토니오가 자신의 언니에게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을 아마도, 알지도 모른다. 막달레나는 30살이고, 앙구스티아스와는 9살 정도의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달레나가 앙구스티아스를 약하게 경멸하고, 아버지의 죽음 앞에 가장 슬프게 우는 이유는 그녀가 ‘온종일 낮잠만 자’기 때문이다. 진실 앞에서 눈을 감고, 잠자는 사람 앞에서는 모두가 마음을 숨기지 않고 말한다. 그렇기에 오히려 진실을 많이 알 수밖에 없지만, 자신은 잠을 잤으니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극중 태도다. 막달레나는 그래도 다른 동생들을 매우 아끼는 편이다. 거의 소외된 앙구스티아스와는 다르게 말이다.     


아멜리아

 ‘부끄러움만 많아.’     


극중에서 모든 배역들은 자신의 솔로곡을 가지고 있고, 아멜리아 역시 예외는 아니다. ‘꿀 같은 다정함’이라는 이름처럼, 아멜리아는 부끄러움이 많고, 상냥하고 사랑스럽다. 어떤 끔찍한 소문도 아멜리아의 곁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일까. 그러나 아멜리아 역시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다는 이 집 자매들의 욕망을 가지고 있다. 다정함으로 장애가 있는 자신의 여동생 마르티리오를 안아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래에 끓고 있는 욕망은 아멜리아 역시 동일하다는 뜻.   

   

마르띠리오

  ‘남자들이 다 싫어해.’     


발이 너무 크고, 코가 매부리코에, 허리가 굽었기 때문에 남자들의 모욕을 견뎌야만 하는 마르띠리오의 이름은 ‘순교자’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받고 싶어 한다. 이 집에서 가장 뚜렷하게 욕망이 드러나면서도 욕망을 가장 은밀하게 숨기고 있다. 곧 이어 설명할 막내 아델라와 대치되는 인물인데, 앙구스티아스와 결혼할 뻬뻬를 사랑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척, 남성들을 모두 경멸하는 척 한다.      


아델라

 ‘어리고, 제일 예뻤어. 제 아빨 빼박았다. 다들 그랬지.’     


가장 어린 나이에, 가장 아름다운 막내딸 아델라의 이름은 고귀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어머니 베르나르다와 완벽하게 대척점에 있으며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인물이기도 하다. 앙구스티아스의 약혼자 뻬뻬와 비밀스러운 연인 관계이기도 하면서, 이를 그 누구에게도 숨기지 않으려 한다. 그와 함께‘초록 드레스를 입고’바다로 떠나고픈 욕망은, 집안 식구들이 가지고 있는 욕망 중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     


마리아 호세파


‘베르나르다 엄마를 깜빡했네, 방에 가둬뒀어.’

‘노망나 풀어둘 수 없었지.’ 

    

폰시아와 두 명의 하녀, 그리고 베르나르다에 의해 완전히 감금된 노망난 그의 어머니. 검은 옷을 입고 있는 베르나르다의 집안과 다르게 유일한 흰 옷을 입고 결혼을 하겠다고 한다. 흰 옷은 추후 다른 캐릭터 하나도 입게 되는데, 바로 아델라다. 흰 옷은 검은 것의 반대, 어떤 소망을 품고 밖으로 나가고자 하는 인물의 옷이다.  

 극의 시작은 베르나르다의 두 번째 남편 안토니오가 죽고 8년상을 치르겠다고 하며 진행된다. 도중 뻬뻬가 앙구스티아스에게 청혼하고, 이 결혼에 불만을 품고 있지만 다들 속으로 삭이는 반면 아델라는 뻬뻬와의 만남을 지속하다 결국 관계를 들킨 이후 아델라는 초록 조명 속으로 나아가지만 – 그것은 결국 죽음을 뜻하며, 나머지 등장인물들은 모두 붉은 조명 아래, 베르나르다의 강한 발길질 아래 고개를 숙인다. 


 베르나르다가 집안의 열쇠를 소유하게 된 이후부터 감정적으로 딸들을 억압하는 것은 플라톤의 <국가>와 닮아 있다. 플라톤의 <국가> 에서는 강력한 전체주의를 주장하며, 감정과 육체적 욕망을 경시한다. 음악과 시는 단지 이데아의 모방을 또 다시 모방한 것이며, 교훈적인 내용은 전달하지 않을 경우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다. 베르나르다는 장례식이 끝나고 슬퍼하는 막달레나에게 울지 말라고 하고, 청소하며 노래를 부르는 어린 하녀의 노래도 틀어막는다. 이 집에서 어떤 예술적 행위 – 혹은 예술로서 씻겨나갈 수 있는 행위들은 죄다 억압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억압은 언제나 삐걱거리기 마련이다. 베르나르다 알바의 넘버 중 <암말과 숫말> 이 시작하기 전, “수컷은 풀어놓고, 암컷은 묶어놓고.” 라는 대사가 나오는데, 결국 암말들은 마구간을 탈출한다. 어쩌면 베르나르다의 다섯 딸들이 마구간에 묶여 있다 탈출한 것은 예정된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사실 억압은 늘 그렇게 바람직한 수단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그를 30년 내내 보필한 폰시아도 눈을 감은 베르나르다에게 빠르게 그 다섯 딸들을 결혼시키라고 한다. 이들에게 있어 결혼은 탈출한 유이한 수단이다. 나머지 다른 수단은 죽음, 그것 뿐. 


억압은 그리 좋은 수단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철학자의 비판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 플라톤의 이런 감성의 억압 행위를 비판하고 나서는데, 예술적 행위로 우리가 감탄고토에 이르러 감정을 정화할 수 있다는 것을 근거로 든다. 결혼이 그들에게 완벽한 해답이 되어줄 수는 없지만, 베르나르다의 비인간적일 정도로 억압적인 태도는 감성과 광기에 대한 두려움마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플라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플라톤은 극작가가 되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예체능에 두각을 드러냈던 그가 민주정을 부정하고 철인통치를 주장하며, 예술을 두려워했던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가 그것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민주정은 자신의 스승 소크라테스를 죽였으며, 예술은 사람을 감정적으로 만들어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을 플라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플라톤은 이성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이후 근대 서양 철학까지의 철학은 플라톤의 주석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대부분이 이성에 근거한 철학을 제시하였다. 


여자의 운명은 어머니를 닮아 있으며, 막달레나의 말대로 모든 여자는 저주받은 것처럼 보인다. 베르나르다 역시 8년상을 치르는 것은 자신이 겪었던 일이라고 언급한다. 베르나르다는 두려웠던 것이다. 엄격한 어머니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자신 역시도 8년상을 치르며 ‘무어인’여자처럼 되지 않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간순간 그의 가슴에서 튀어나오는 욕망과 사랑에 대한 갈망은 여전히 존재한다. 어린 하녀가 부르는 노래 중 ‘붉은 사과’라는 노래에서 이를 알 수 있다.     


내가 결혼하는 날
내 탐스런 두 볼
붉은 사과의 유혹
모두 날 원할 거야 


노래를 몇 번이나 그만두라고 하던 베르나르다는 하녀의 노래가 사그라들고, 혼자 남아 있을 때 이 노래를 흥얼거린다. 내가 결혼하는 날내 탐스런 두 볼붉은 사과의 유혹모두 날 원할… 그리고 다시 차가운 무표정으로 돌아온다. 스스로를 ‘창녀’라고 질책하며. 스스로의 감정까지 무시무시할 정도로 통제하는 베르나르다는 자신이 어머니 마리아처럼 정신을 잃고 남자를 만나고 싶어 할까 두려워하고, 자신의 딸들이 자신이나 마리아처럼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인간을 괴물로 만드는 것은 다름이 아닌 사회 구조에 의한 타인의 시선, 그리고 그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어떤 글이든, 철학이든 읽으면서 글쓴이가 무엇을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가를 알 수 있다. 플라톤의 경우 앞서 말했던 감성에 이성이 지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 같다. 또, 절대 다수의 인원들이 한 사람을 정치적으로 공격할 때 그 사람의 죽음을 막을 수 없다는 것도. 하지만 베르나르다는? 진실을 맛보기 위해 동굴로 나오지 못했고, 그저 눈을 감았던 베르나르다와 집안 식구 사람들은 진실을 바라보기 위해 나선 아델라가 죽음을 맞을 수 밖에 없도록 내버려 두었으며, 그 죽음은 함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나르다 알바는 완벽하게 불행한, 비극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단지 비극의 한 장면만을 담고 있을 뿐이다. 과연 이 집안의 사람들이 영원히 그렇게 갇혀 살까? 암말이 마구간의 문을 박차고 달려 나왔다. 이제 그 어떤 사람들도 암말을 다시 마구간으로 끌고 들어갈 수 없다. 언제나 플라톤의 <국가>가 이상 사회를 그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이상사회가 현실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감정을 죽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상은 이상일 뿐, 결국 현실은 이상을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베르나르다도 이상을 그렸을지 모르겠다. 모두가 자신의 말에 복종하고, 남성에게 굴종하고, 그러면서도 사랑받을 수 있는 삶 말이다. 그러나 그 다섯 딸들에게 어떤 똑같은 옷을 입히고 어떤 역할을 부여하더라도 그에게는 생각할 수 있는 머리가 있고 뛰는 심장이 있기 때문에, 결국 베르나르다는 자신의 통제 하에 다시 딸들을 거머쥘 수는 있어도 영원하지는 못할 것이다.


측은한 사람. 나는 베르나르다 알바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CGV에서 4월에 <베르나르다 알바>를 상영하고, 다른 캐스팅으로 네이버 후원을 통해 녹화 중계를 감상할 수 있으니 기회가 되면 꼭 감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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