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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 Mar 31. 2021

뮤지컬 <호프>와 카프카의 <심판>

일상의 주인, 그리고 그것을 위한 희생

뮤지컬 <호프>와 카프카의 <심판     


연극 마우스피스를 감상한 친구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나, 다시는 호프를 좋다고 할 수 없을 것 같아.”     

연극 마우스피스에 대한 이야기는 추후 논하게 될 주제이기도 하지만, 간단히 설명하자면 ‘한 인간의 개인적 비극을 예술 상품화 하는 것에 대한’윤리적 고찰을 하게 만드는 극이다. 2019년 초연 당시에는 여성 주연 뮤지컬로 상당한 기대를 받았고, 현재까지도 사랑받는 뮤지컬 <호프>. 친구가 그렇게 감상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카프카의 <심판>에 대해서 같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카프카의 미공개 원고에 얽힌 소송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뮤지컬 <호프> 는 분명 익숙하리라 짐작한다. 요제프 클라인의 미공개 원고를 둘러싼 이스라엘 국립 도서관과 에바 호프의 마지막 소송으로, 작가는 자신의 원고를 태워달라 청했지만 그의 친구 베르트가 원고를 소중히 간직하다가 연인 마리에게 원고를 맡겼지만 베르트는 마리를 떠나고, 마리를 원망하며 엄마에게서 벗어나고자 했었던, 그러나 원고지에 집착하게 되는 그런 이야기.      


실제로 뮤지컬 <호프> 는 카프카의 미공개 원고 반환 소송에 기반한 이야기다. 카프카가 불태워달라고 했던 미공개 원고를 받은 그의 친구 베르트는 ‘심판’, ‘성’ 등을 출판했고, 비서인 에스테르 호페에게 원고를 연구기관에 넘겨달라고 했다. 호페는 실제로 그의 원고를 베르트와 함께 정리할 정도로 친밀한 사이였지만 그의 요청을 실행하지 않고 본인 소유로 소장했으며, 일부는 판매하기도 했다. 죽기 전 두 딸에게 원고를 물려주었는데, 이 딸 중 한 명의 이름이 에바 호프다.     


호프와 그의 어머니의 삶을 우리는 감히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없다. 둘은 홀로코스트 생존자였으니까. 실제로 뮤지컬에서도 이 둘이 수용소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가를 보여준다. 많은 뮤지컬들이 실존 인물의 삶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겪어 왔던 삶의 고통을 재현하며, 죄책감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이야기를 보게 한다. 우리는 과연 이것을 ‘무의미하게만’볼 수 있을까? 창작 작품 속 한 인간의 고통과 절망은 종종 실존 인물의 삶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카프카의 <심판> 과 뮤지컬 <호프> 의 차이는 바로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카프카의 <심판> 은, 갑작스럽게 체포된 요제프 K를 다루고 있다. ‘어디엔가 있을 법 하지만, 진정 일어나지는 않은’꿈같은 일. 그래서 카프카를 눈을 뜨고 꿈꾸는 사람이라고 하지도 않던가. 그러나 뮤지컬 <호프> 는 다르다. 이 작품에는 실제로 그 바탕이 된 실존 인물의 삶이 있다. 어떤 교훈과 위로를 위해 실존 인물의 삶을 다루는 것이 과연 윤리적인지, ‘실제로 그러지 않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비극적인 부분만 극대화 시키며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연극 <아마데우스>나 뮤지컬 <사의 찬미>, 연극 <관부연락선> 등을 떠올리며 침잠하게 된다. 이런 지점에서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결국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이유가 무엇일까.       


호프는 희망이란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에바 호프는 이 희망과 아주 거리가 먼 사람처럼 보인다. 그는 씻지도 않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혐오하며, 홀로코스트에서 살아 돌아온 유대인이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에서 희망을 꺼내지 못한 사람 같다. 그가 삶에서 겪은 무수한 고통들을 보면 그럴 법도 하다. 하지만 판도라의 상자는 세상에 아주 많은 절망과 불행을 가지고 왔지만 단 한 가지, 희망이라는 존재를 남겨 둔다. 창문 밖으로 비치는 태양빛으로, 사람들은 희망을 얻기도 하지만 먼지와 흉터가 군데군데 묻은 창문의 흠결을 트집 잡기도 하니까. 빛이란 그런 존재다. 빛이 있기 때문에 절망이 있는 것처럼.   

   

사실 뮤지컬 호프는 단지 소송만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에서 위로를 얻었던 것 아닐까. 주인공 에바 호프는 베르트로부터 원고를 넘겨받은 어머니의 삶을 비난하지만 자신의 삶에 결국 원고밖에 남지 않은 순간이 오자 원고를 지키기 위핸 노력하고, 집착한다. “빛나잖아, 에바 호프. 네 이름은 희망이라는 뜻이네.” 라고 말해주었던 사랑하는 남자는 “아무도 믿지 마, 에바 호프.” 라고 말하며 경매에 팔아넘긴 원고의 값을 모두 가져가 버리고, 자신의 자리를 빼앗아 원고에게 넘겨준 어머니는 자신이 떠난 사이 추위에 얼어 죽어 버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의 온기를 갈구했지만 모든 사람이 호프의 곁을 떠났다.   

   

이런 부조리한 운명이 또 있을까. ‘왜 자신이 이런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는가.’신기한 점은, 호프도 원고지도 이런 운명에 크게 의문을 품지 않는다. 왜 나만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혹은 나는 왜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부조리에 순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간다.’여기서 ‘살아간다.’의 의미는 조금 다르다. 보통은 살아감의 의미는 긍정적으로 해석되지만 나는 키르케고르의 문장을 빌려 살아감은 사실 구원의 정반대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지상적 희망을 죽여 없애 버려야 한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희망에 의해 구원받을 것이다.”      
키르케고르


호프가 죽었어야 했다는 말이 아니다. 호프는 원고가 자기 손에 있으면 다 잘 될 것이라는 지상적 희망에 강박적인 집착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인생을 파괴하기 시작한다. 인생을 파괴하는 것은 별 것 없다. 우리의 어떤 무기력한 하루를 떠올려 보면 된다. 어느 날부터인가 세수를 하기 힘들어지고, 이도 닦기 싫고, 청소도 빨래도 미루게 되는 무기력한 하루.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그저 휴대폰만 무의미하게 만지작대는 그런 날 말이다. 그것은 결국 일상의 파괴임과 동시에 우리의 파괴이다. 카프카는 “우리에게 허락된 유일한 인생은 일상”이라고 말한 적 있다. 정말로 그렇다. 우리는 내일의 일을 알지 못하고, 어제 하루는 이미 흘러가 버렸다. 하루하루의 일상을 소중히 해야 한다. 동화책 <얀과 카와카마스>처럼, 그저 한 순간의 때일지언정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종종 일상을 포기한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즉, 호프는 일상을 포기하고 그저 살아 있기 때문에 살아지는 삶을 선택했다. 사실상 죽음이나 다름없는 그 길로 말이다.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다. 자신은 원고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 수용소에서 친구들을 고발했다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은 자신의 탓이라고. 사실 그 어떤 것도 호프의 문제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프가 선택한 일이다. 어떤 삶은 스스로 일으키기에 너무나 버겁고 무거울 때가 있다. 손에 쥔 여분의 삶을 어떻게 꾸려나가는가는, 언제나 그렇듯 우리의 몫이다.      

삶은 그 자체만으로, 누군가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빛나고 있다. 여태껏 호프는 원고지의 빛을 반사하는 정도였다고 스스로를 생각해 왔다. 어머니가 호프보다 원고지를 더 아꼈기 때문에, 원고지는 어머니의 죽음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지만 자신은 그러지 않았기 때문에, 어머니가 생을 포기하면서 지켜낸 것은 자신이 아니라 원고지였기 때문에. 그렇기에 빛날 수 없다고, 자신은 그러지 못한다고. 그래서 자신의 삶에서 빛나는 것은 원고지 하나뿐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렇지만 사실 호프가 걸어온 모든 굽이지고 진흙탕인 길속에서 호프는 빛나고 있었다. 삶에 대한 의지로, 살아야겠다는 굳은 믿음으로. 다만 그 스스로를 진흙탕 속에서 구원하지 않은 것 역시 호프 자신이다.      


인생은 경매 같은 것이 아니다. K의 원고는 경매에서 비싼 값을 받고 넘겨졌으며, 그 돈은 누군가의 인생을 바꿔 놓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의 인생은 남이 값어치를 매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카프카의 반쪽짜리 원고는 195만 달러에 낙찰되었지만 호프의 인생은 그럴 수 없다. 그의 인생을 살 사람이 누가 있겠냐고 비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의 인생은 감히 타인이 불행하다고 넘겨짚을 수 없다. invaluable은 값어치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값어치를 매길 수 없다는 뜻이다. 저울 위에 올라가기에 호프의 인생은, 우리의 인생은 모두 값지지 않은가. 호프는 재판에서 졌지만 그 재판은 호프가 인생을 던져 지켜온 원고지를 포기하면서 자신의 삶을 선택하게 만들어준, 그래서 오히려 생을 선택하게 만들어준 재판이었다.      


카뮈는 카프카의 작품을 비평한 글에서 이렇게 논고한다.    

  

“카프카에 대해 언급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연 그의 작품을 설명하면서 인간에게 아무런 구원도 허락하지 않는 절망의 외침이라고 규정지었다. 그러나 그 규정은 수정될 필요가 있다. 거기에는 희망이 있고, 또 희망이 있는 것이다.”     
알베르 카뮈, <작품 해설> 中


끝없는 절망,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절망을 기꺼이 견뎌내며 시지프스처럼 생을 굴려낸다. 그래, 사실 카뮈의 말대로 어쩌면 우리는 늘 부조리함을 목도하며 살아가는 지도 모르겠다. 살아지기 때문에 사는 삶에서 탈피하기 위해 부조리함으로 스스로를 끊임없이 굴려내는 것이 삶이고 인생이라면, 정면으로 삶에 맞서는 방법은 무엇일까. 작품에서는 앞서 언급한 카프카의 말을 빌려 이렇게 정의한다.    

  

일상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단 하나의 가치에 매몰되어 우리는 스스로를 너무 쉽게 포기하고 재단한다. 사람은 누구나 견디기 힘든 순간이 있다. 그 순간 우리는 손을 내밀어줄 사람이 간절히 필요하다. 하지만 사람을, 물건을, 삶의 구원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렇게 될 수도 없다. 내 자신의 구원자는 나뿐이고, 자비를 베풀어줄 사람도 나뿐이니까.     


“빛나잖아, 에바 호프. 빛? 나잖아! 에바 호프. 빛날거야, 에바 호프.”     


우리의 인생이 읽히지 않은 원고처럼, 그런 인생처럼 남겨지지 않게. 덮어두고 잊고 싶고 사라졌으면 하는 기억들을 기억해야 한다. 한 번도 읽히지 않은 인생. 그리고 앞으로 스스로 일궈나갈 인생. 이 극은, 우리가 스스로 읽지 않았던 인생의 페이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분명히 이 작품에서도 비판적인 부분이 있을 수 있다. 앞서 말했듯 실제 에바 호프의 삶은 뮤지컬에서 다루고 있는 <호프>의 인생과는 분명히 다른 점이 존재하고, 극작가는 작품의 의도를 위해 타인의 인생을 재편집했다는 비판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이 가지고 있는 의의를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일생을 다해서 지켜낸 무언가에 자신의 주체를 포기하지 말라는 것. 그 의도를 위해 에바 호프의 이야기를 차용한 것이 과연 윤리적으로 옳은 일인지에 대한 숙고는 관객과 제작자의 몫이다.   

   

이런 숙고는 윤리적 소비와도 연관되어 있다. 멕시코에서 갱들의 자금줄로 판매되는 아보카도를 구입해서 먹고, 아동들이 15시간씩 일하며 푼돈을 받고 만든 신발을 구매하고, 우리의 행복과 삶의 질을 위해 많은 탄소 발자국을 만들어낸다. 우리의 소비를 완벽하게 자급자족 할 수는 없을 테지만, 단지 나 하나의 일신을 위해 부정적인 상황을 만들어내는 제품을 소비하는 것에 대한 고찰을 하게 되듯이, 좋은 의도를 가진 작품에 실존 인물의 인생을 상품화 하게 된다는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게 된다면 어떨까? 작품 그 자체를 즐겨야 한다는 입장도 있을 것이고, 창작자와 창작 윤리 역시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야 하다는 입장도 있을 것이다. 판단은 여러분의 것이며, 이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과 동의하는 사람 역시 존재하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뮤지컬 <호프>를 한 번 즈음 감상하고 직접 생각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3/29 호프 후원 라이브와 곧 CGV에서 개봉될 뮤지컬 호프를 감상해 보길 바란다.      


사실 뮤지컬에서 노년 여성이 주연인 작품은 흔치 않다. 우리의 삶 역시 모순과 타협의 끝없는 갈등, 그 자체인 것처럼 이 작품 역시 그러하다. 공장식 축산으로 만들어진 고기를 먹으면서 쓰레기 분리수거를 철저히 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모든 작품이 완벽하게 윤리적으로 옳을 수는 없듯, 어떤 가치에 더 비중을 두는가, 그리고 2번째로 밀린 가치에도 끊임없이 고민을 하는 우리의 사고가 삶의 방향을 결정하지 않을까. 또, 그 비판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면서 작품을 소비한다면 그것 자체로도 의미 있을 것이라 여긴다.     


나는 이 작품이 어떤 부분에서 비판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의도 측면에서 많은 사람들이 위로받기를 바라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카뮈의 마지막 문구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 .... 모든 것을 보여주면서도 어느 것 하나 확정 짓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이 작품의 운명이며 어쩌면 위대함일 것이다. ”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中 작품 해설 각주에서.  

참고 문헌 

 : 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

 : <심판> (소송) , 프란츠 카프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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