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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 Jun 01. 2021

연극 <마우스피스> 와 창작자의 윤리

 

본 문서는 연극 <마우스피스>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뮤지컬 <호프>를 더 이상 즐겁게 보지 못했다는 지난 호 글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실존 인물을 대상으로 한 연극이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다 해도, 타인의 삶을 각색하고 그 과정에서 왜곡이 생긴다면 그것을 윤리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연극 <마우스피스>는 이런 의문을 제기하면서 동시에 그동안 보았던 많은 연극들이 산산이 부서지는 경험을 제공한다. 



우리는 늘 연극은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어떤 이야기는 곧 살아 있는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을 간과할 때가 있다. <마우스피스> 는 창작자의 윤리와 관람자의 윤리를 우리가 생각하도록 만들기 위한 치밀한 구성을 채택하고 있다. 46살의 리비는 ‘잘 풀리지 않는’ 극작가다. 권태로우면서도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하루를 보내고 있는 리비의 하루에 파문을 던진 것은 18살의 데클란이다. 데클란은 매일이 불안하다. 안정적인 가족의 애정도 받을 수 없고, 내일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불안감과 살아가면서 느끼는 고통, 가난, 분노를 리비에게 이야기하는데, 리비는 그의 삶을 극작품으로 만들게 된다. 처음에야 분명 ‘합의된’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리고 리비 역시 본인이 최선을 다 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말이다. 둘은 잠깐 육체적으로 끌리기도 하고, 이 과정에서 리비는 데클란을 잠시 밀어내었다가 데클란의 불안정한 상황에 다시 그를 위로해주기도 한다. 데클란과 리비 모두에게 필요했던 안정감, 데클란은 리비와 함께 있으면서 그것을 일부 느꼈으나 리비는 데클란의 폭력성, 너무나 어린 나이, 결정적으로 극을 끝내야 하는 마음으로 데클란을 만나지 않게 된다. 그것이 데클란에게 얼마나 불안정한 사고를 끼치는 지도 모르고 말이다. 결말부에서 둘의 의견이 갈리는 순간, 문제 상황은 고조된다. 



데클란이 죽는 결말을 쓴 리비는 그게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이라고 말하는 데클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극을 올리게 되고, 연극 <마우스피스>는 첫 공연부터 기립박수가 터져 나오는, 극찬 받는 작품이 된다. 



이 극은 처음부터 끝까지 메타적이다. 기존 ‘남성 작가와 여성 뮤즈’라는 체제를 전복한 점은 차치해 두더라도, 작품의 나레이션과 연출이 리비가 ‘쓰는’ 대로 움직이다. 타이포그래프, 리비가 언급하는 시나리오의 기본 구성 요소, 데클란의 언어와 행동, 생각. 이 모든 것들은 데클란의 이야기이며, 동시에 그 이야기를 극으로 쓴 리비의 ‘작품’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소유인 이야기와 누군가의 소유인 작품은 다르다. 이 이야기는 데클란의 이야기지만 데클란의 작품은 아니고, 리비의 작품이지만 리비의 이야기는 아니다. 리비가 붙인 이 연극의 제목 <마우스 피스>는 그림이 취미인 데클란이 그린 그림의 제목 ‘마우스 피스’에서 따온 것으로, 거대한 입이 쩍 벌어져서 모든 것을 삼키고 있는 이미지이다. 그 입은 매우 커서 세상의 모든 것들을, 심지어 데클란의 목소리마저도 삼킬 것만 같다. 그리고, 연극 <마우스피스>는 데클란의 목소리를 삼켜버린 ‘작품’ 이 되었다. 데클란이 기대한 것은 그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지만 사정은 달랐다.



 리비는 작품 발표회에서 마우스피스는 빈곤과 시련에 목소리가 없는 자들을 위한 작품이라고 말하지만, 데클란이 이 극장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돈은 15파운드, 한화로 약 2만 2천원이었다. 데클란이 갖고 있는 돈은 고작 7파운드에 불과한데 말이다. 이 작품을 감상했던 2020년 7월 경, 나는 내가 이 극을 보기 위해 지불한 돈 2만 4천원이 생각나면서 죄책감에 고개를 숙이기 시작해 아직까지도 고개를 숙인 채 살아가고 있다. 리비의 말에 따르면 극장이 모든 사람들이 함께 공유 할 수 있는 장소이며 사람들의 심장박동을 나누는 곳이라고 했지만, 가난한 자들은 들어올 수도 없는 곳이 극장이었다. 



리비의 이러한 태도를 시혜적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겠다. 리비는 자신이 이 작품을 집필함으로서 데클란과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람들이 주목할 것이고, 너는 목소리를 갖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리비의 사고관은 ‘작가적 사회참여’ 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1937년 이후부터 이어진 영국 작가 의식 중 하나인 작가적 사회 참여는, 당시 사회적 문제에 대한 작가의 의식을 작품 내에 담는 정신을 의미하며 그에 참여하지 않을 경우 비판을 감수해야 했던 분위기도 존재했다. 하지만 작가적 사회참여는 과연 그 대상들을 포함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식을 꾸준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1971년 이반은 하루 일곱 잔의 커피를 마시고 맥주를 마시는 지식인들이 감히 노동자의 삶에 분개할 자격이 있느냐 물은 바 있다. 그 지적대로 예술은 어쩔 수 없이 향유할 수 있는 계층이 나누어져 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술을 즐길 돈도, 시간도 없는 한편 누군가는 그들의 가난과 고통을 예술로 만들어 사회를 고발한다. 이 일이 절대 의미 없는 일이라 생각하지는 않으나, 이야기의 대상이 보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과연 그들을 생각하고 고려하는 예술이 될 수 있을까? 



아주 많은 작품들을 섭렵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2년간 공연예술을 관람하면서 그 긴 시간 동안 실존 인물을 대상으로 한 작품, 그리고 누군가의 고통을 담은 극들이 얼마나 많이 나왔는지를 안다. 그리고 그 작품들 모두가 과연 진정한 창작 윤리를 고려했는가에 대해 묻는다면, 솔직하게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정말로 ‘자극성’을 추구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상업성을 위해,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데클란을 결말에서 죽여 버린 리비처럼, 작가들이 누군가의 인생을, 소외된 사람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차별과 아픔을 소재로 훔쳐 자신의 성공을 이루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언제나 글을 쓰면서 자료를 찾아보는 것이 습관인데, 본 글에서 다루고 있는 창작 윤리에 대한 참고 논문은 많이 없었다. 그만큼 창작윤리에 대한 논의가 학계의 담론으로 떠오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연극 <마우스피스>를 보면서 더 많이 이런 논의를 해야 한다고 여겼다. 상업성과 자신의 성공을 위해 극을 쓰는 극작가들도, 극을 관람하는 관객들도. 그저 이야기의 주인공일지라도 결국 누군가의 ‘삶’이라는 것을 우리는 인지해야 하지 않을까. 일전에 관람했던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에서 이런 대사가 나온다. “이건 그냥 작품이 아닙니다. 이건 우리의 삶입니다.” 그러니 작가가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에 펜을 놓아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계속해서 고통스러운 사건을 반복해야만 하는 우리의 이야기를 끝을 내어 달라고 호소한다. 단지 인물의 괴로움만이 관람자에게 깨달음을 줄 수 있다는 창작자의 오판이 상상 속의 인물들을 괴롭게 만들었고, 결국 펜을 내려놓아도 작가가 써놓은 이야기 속에서 인물들은 끝나지 않는 영원한 고통을 반복한다는 이야기는 <마우스피스>를 보면서 내가 느꼈던 창작자가 겸비해야 하는 태도를 담고 있었다. 



창작자는 작품을 집필할 때 있어 언제나 신중해야 할 것.



기본 중의 기본인 이야기인데도, 상업적인 이윤과 작품성이라는 다른 목적을 위해 타인의 삶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작품이 보일 때마다 불편한 기색을 감출 수 없다. 누군가의 인생은 거대한 입이 그러하듯 마구 집어삼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 목소리를 ‘대신’하고자 하는 사명을 가진다면 작가는 최대한의 노력과 존중을 기울여야 한다. 소외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그의 목소리가 타인보다 작기 때문에, 스피커를 든 작가라면 그의 목소리를 최대한 적확하게 전달해야 한다. 왜곡된 이야기로 만든 동정과, 끊임없이 생산되는 약자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이 아니라, 진짜 이야기를 전해야 하는 것이 창작자의 윤리라고 생각한다.



결론이 나지 않는 윤리에 대한 담론처럼, 이 작품의 결말은 ‘암전.’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데클란이 리비의 작품대로 죽었는지, 아니면 살았는지 알 수 없다. 리비는 사람들이 빠져나간 무대에 서 있고, 데클란은 극본의 바깥으로 빠져나가니까. 나는 데클란도, 리비도 끝까지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는 데클란도, 리비도 너무 많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무섭고 두려웠다. 이 극을 보는 것 자체가 데클란을 살아가고 있는 누군가에 대한 가해가 아닌가 싶어서. 문화는 정말 모두에게 공평한 것일까? 가난조차 빼앗아 간다면 빈곤의 목소리는 언어도 잃고 그 힘도 상실한 채 어디를 떠올라야 한다는 말인가. 



그날의 관람은 정말 좋았다.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 극장 어딘가에 데클란이 있을 것만 같았고, 그가 무대 위로 뛰어 올라 이건 내 이야기라고 말할 것만 같았다. 박수를 쳐도 되는 것인지 두려울 정도로 소름끼치게 좋아서, 누군가에게 꼭 이 극을 권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권해도 되는지 양가감정이 들었다. 그동안 보았던 작품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곱씹어 보았다. 내가 무수히 지나왔던 극들이 누군가의 고통과 목소리를 빼앗고 그 위에 서서 세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중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야기라는 것은 언제나 ‘가상’ 만을 담고 있지만 동시에 실제로 그런 일을 겪고 있는 것을 타자화 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연극이라는 것 자체가 거대한 입, 모든 것을 삼키는 입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연극을 어떻게 소비해야 할까? 연극을 만드는 사람은 어떻게 이야기를 만들어야 할까? ‘완벽한’ 답은 언제나 찾기 어렵지만, 그런 의문을 일상에 가만히 건네는 극의 시의성은 소중하다. 9월에 다시 돌아올 연극 <마우스피스>를 시간이 된다면 꼭 관람하기를 권한다. 그리고 당신도 이 고뇌를 잠시나마 겪었으면 좋겠다. 어떤 고뇌는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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