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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 May 04. 2021

체험극 <플라이트> 와 불교의 무아

비행기를 탄다는 것의 의미

   

·본 글은 체험극 <플라이트> 에 대한 내용 언급이 일부 존재하며, 특정 종교에 대한 언급이 다수 포진해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종교도 옹호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단지 종교의 교리적, 철학적 측면에서 언급하는 것이므로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머시브’라는 말은 아마 생소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익숙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확한 의미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머시브의 뜻은 무엇일까? 설명에 앞서, 한국에서는 조금 생소할 법도 하지만 이전부터 이러한 극의 형태는 지속적으로 제작되어 왔고, 특히 2019년 12월에는 뉴스에 방영될 정도로 유명해진 극이 있다. 그래뱅 뮤지엄에서 야심차게 출범한 <이머시브 위대한 개츠비>라는 극이다. 갑작스럽게 발생한 코로나 19의 여파로 안타깝게 조기종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지만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고, 또 그럴 만한 장점을 가진 극이었다. 바로 ‘이머시브 극’의 특성을 매우 잘 살렸기 때문이다. 



이머시브 극이란 극장 전체가 작품 속 하나의 공간으로, 관객과 배우가 쌍방향으로 상호소통 할 수 있는 형식의 연극이다. 체험극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는 이머시브 극을 소개하는 이유는 지금부터 소개할 체험극 <플라이트>라는 극이 영국의 이머시브 극단인 다크필드 오디오 씨어터에서 제작한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2018년 영국에서 개막한 이 극은 우란문화재단에서 협업해 한국에서 공연하게 되었는데, 예매 당시의 열기가 매우 치열했던 기억이 난다. 어떤 극인지,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겨우 티켓 하나를 쥐고서도 갸웃거리며 공연장으로 향했지만, ‘새로운 자극’을 줄 것이라는 생각에 내심 기대가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현재도 오픈런 중인 다크필드 <더블>이라는 작품을 통해 어떤 유형의 체험극인지 어느 정도 감을 잡은 상태였다. 뭔가 크게 다를 것이 있을까, 싶지만 우리는 실제로 공연이라고 하면 배우가 있어야 하고, 무조건 우리가 실시간으로 눈을 뜨고 관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크필드 극단의 경우‘오디오 씨어터’라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제작하여 코로나 시대의 팬대믹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작품을 표방하고 있다. 즉 우리는 실제로 배우와 만나지 않고, 극장에 가지 않아도 된다. 오로지 침묵과 암흑 속에서 소리로만 상황을 느끼고 판별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니, 독특한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문제가 되는 부분은 많은 사람들이 어두움에 대한 공포감을 느낀다는 점이다. 그리고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가장 안전한 공간이라고 생각하는 집이나 공공장소 등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면 두려워질 수밖에 없다.



 '다크필드'의 설립자인 글렌 니스(Glen Neath)와 데이비드 로젠버그(David Rosenberg)는 "시각이 사라지면 다른 감각들은 모든 움직임과 소리에 예민하게 집중하게 된다." 그래서 다크필드의 공연은 오로지 소리와 조명만이 극의 전부다. 앞서 말했던 위험함을 차치하고서라도 매력적이지 않을 수가 없지만, 앞으로 어둠을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어둠에 익숙해지고, 두려워하지 않을 법한 작품 제작에 대한 의지를 밝힌 적도 있어 무작정 ‘무서운 분위기’를 연출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게다가 보통의 공연이라고 하면 최소 90분, 최대 3시간 정도의 러닝타임을 가지고 있는데, 다크필드의 공연은 기묘하다. 단 15분에서 20분. 체험극 <플라이트> 만이 30분 정도의 오프라인 공연 형식이었고, <더블> 같은 경우에는 각자의 집에서 이어폰을 낀 채로 감상할 수 있는 극이었다. <플라이트> 역시 비행기 내부 상황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상정하였고, 또 비행기에 설치된 모니터를 통해 승무원의 안내방송이 필요했기 때문에 오프라인 체험극으로 제작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앞 부분의 설명은 사실 전부 무시해도 좋다. 어떤 상황을 가정해 본다면, 우리는 이 작품이 어떤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체험극 <플라이트> 공연장에 들어서면, 정말 비행기에 타는 것처럼 여권과 출입국 신고서, 비행기 티켓의 형태를 한 입장권을 배부한다. 여러분은 비행기를 타 본 경험이 있는가. 약간 좁은 좌석, 고개를 들면 보이는 창문, 버스나 기차의 좌석과는 상이한 그 느낌. 실제 비행기 내부와 완벽하게 동일한 구성을 보고 처음에는 감탄했던 것 같다. 



그런데 우리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사실을 작품은 환기한다.  그 비행기가 착륙하거나, 혹은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우리가 완벽하게 안전하고 살아있는 존재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슈뢰딩거의 상자에 든 고양이처럼, 우리는 죽은 존재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안전한 좌석, 선택받은 시간’에 존재했기 때문에 우리는 여러 가능성 속에서 살아남았다. 그리고 공연이 끝났을 때, 우리는 ‘새로운 나’로서 존재한다. 



내용은 짤막하지만 임팩트 있었다. 공연 자체가 싫은 것도 아니었고. 한동안 멍한 상태로 주변 기물을 확인했다. 과연 ‘나’는 무엇일까. 여러 가능성들을 사이에 두고 수많은 내가 존재한다면 살아남은 것만이 나인지, 만약 그렇다면 거울 속 다른 가능성의 나는 내가 아닌지 혼란스러웠다. 만약 그렇다면, 다른 어딘가의 시간대에서는 내가 살았거나 죽은 상태이지 않나?



이런 논의를 내게 해결해준 것이 불교철학이었다. 불교에서는 완전한 ‘나’라는 것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나라는 것이 없다는 그 진실만이 존재할 뿐이다. 고정된 자아의 상태에 집착할 이유가 없는 것은 무엇이며, 또 어떤 특정한 사건에 우리가 목매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의 시간이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시간은 언제나 직선적이지 않고 원형으로 이어져 순환을 이룬다. 그리고 그 사건들 속에서 우리가 한 선택은 다른 사건으로 가게 만든다. 



예를 들어 보자. 내가 비행기를 탔고, 나는 죽었다. 어느 가능성에서 나는 살았다. 그럼 내가 두 명이 된 것일까? 불교에서는 이를 전면 부정한다. ‘나’라는 존재는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언제나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현실의 존재는 무상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들 사이에서 우리는 선택의 기로 앞에 늘 서 있다. 혹은 선택할 수도 없이 그렇게 결정되는 일들도 있다. 비행기에 탄다는 것은 그러한 의미다.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기장에게, 그날 기류에, 옆에 탄 승객에게 맡긴다. 그리고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는, 혹은 그럴 운명이 정해져 있는 좌석을 구매한 우리 자신에게 맡긴다. 무의식중에 우리가 일상적으로 해오는 선택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어느 섬으로 갈 지를 인도한다.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모종의 암묵적 계약을 통해, 꼭 비행기에 타는 행위가 아니더라도 어떤 사건 속에 자신을 내맡기는 편인 것 같다. 언제 우리는 죽을지 모르고, 또 언제 어떤 사건이 발생할지 모른다. 당연하게도 사건은 이미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 속으로 발걸음 하는 것은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섬과 섬 사이로 몸을 이동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모든 것은 무상한 것일까? 단지 그것은 이미 정해져 있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 숙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에서 부조리하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고, 혹은 이 안온한 운명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저 방 안에 틀어박힐 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결국 그것이 사람의 생과 같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전쟁이 일어나는 해 태어나지 않았으며, 편의점에서 물건을 고를 때 테러가 일어나지 않았을 뿐, 같은 공간과 시간을 두고도 다른 일이 벌어지는 이 우주 속에서 사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적다. 그리고 그것에 도전함으로서 우리는 끊임없이 고통스러워하고, 비애 한다. 일전에 말했던 부조리 철학에서 인간이 거스를 수 없는 운명에 저항하며 그 부조리함을 직면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면, 불교에서는 직면 후 그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유를 획득하라고 조언한다.



마음처럼 쉽지 않은 일이기는 하다. 당장 비행기에 탑승했는데 10분 뒤 난기류가 발생하고 곧 죽음이 눈앞에 닥쳤을 때 그 운명에 대해 쉬이 승복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리곤 한다. 결국, 인간 생에 있어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은 비우는 것, 비우는 것은 곧 채우는 것이라는 결론 말이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귀천



어떤 것들에 초탈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완전히 직면해야 한다는 것. 아무것도 보지 않으면 결국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비울 수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많이 간과하고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을 했다. 위에서 소개한 <귀천>이라는 시는, 아마 너무 유명해서 모두가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법하지만, 사실 그 초연한 자세를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하는가는 알지 못한다. 어부가 물고기를 잡는 장면을 이미지로만 접할 뿐 물고기를 잡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도 말이다.



우선 나는 당신이 이 하루를 아주 즐겁게 보내길 바란다.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 생기고 그 앞에서 무릎 꿇고 우는 날이 올 지라도. 충분히 울고 충분히 아파하고, 결국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날이 오길 바란다. 그것은 방법론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깨우쳐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던가. 



비우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겪어야 한다. 담아 본 적이 있는 그릇만이 비울 수 있다. ‘언어’로 보기에 이것은 어쩌면 아주 쉬워 보이거나 혹은 허황되어 보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 우리가 이 일을 겪어보지 않는 이상 언어의 본질은 스스로에게 획득될 수 없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언어에 집착하지 말라는 조언을 남긴다. 어떤 진리를 언어로서 깨우쳤다면, 그 언어에 대한 집착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맞다고 말이다. 이런 사다리의 비유는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에서도 등장한다. 무언가를 깨닫게 된다면 그 사다리는 이제 쓸모없으니 치워버리라고 말이다. 그가 불교 철학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에게 영향을 줄 수밖에 없고, 사람과 사회 역시 그러하고, 어떤 작품이, 혹은 글이 누군가에게 스쳐지나가기도 하고 가슴 깊이 박혀 남기도 한다는 것을 알면서. 



나의 글도 어느 날은 잘 읽히기도 할 것이고, 어느 날은 그저 횡설수설 후주하는 자의 지면 낭비로 읽히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쓰는 이유는 내가 조금이라도 전달하고 싶은, 그리고 공유하고 싶은 순간을 위함이다. 내가 겪은 경험을 타인에게 전달했을 때 타인인 당신과 내가 주고받을 수 있는 그 영향들의 긍정적인 힘을 나는 믿고 싶다. 



나는 초탈과 탈속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저 하루하루를 영수증에 찍힌 금액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럴 때 잠깐 멈추어 되뇌어 보곤 한다. 이 무의미해 보이는 일들이 어느 날 흰 나비가 잠시 쉬어갈 배추밭이 되어줄 수도 있을 것이고, 또 태풍을 만들어낼 날갯짓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은 내가 행동하지 않으면 생기지 않을 일이라는 것도. 모든 것은 무상하고,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되뇌다 보면, 지겨울 정도로 반복되는 일상에서 잠깐 다른 세상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경험이 끝난 이후, 일상을 반복하던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조금 달라진 것 같다고 느낀다. 



체험극 <플라이트> 는 이 비행이 끝나고 나면 우리는 새로운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한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말테의 수기>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과거의 나 자신에서 끊임없이 변하고 있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없다 말한 것처럼, 계속해서 새로운 생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그 생을 깨달을 수 있도록, 그 순간을 헛되이 흘리지 않도록 만들어주는 작품이라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p.s.

그러나 이 작품은 앞서 말한 듯 깜깜하고 무서운 어둠 속에서 일어난다. 

만약 당신이 소리에 예민하다면, 이 극단의 작품을 청취하기에는 좋지 않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둠이 무섭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난 감정임에 분명하다. 한 발짝 떨어져서 생각해 보는 것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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