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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 Mar 29. 2021

올드 위키드 송과 칸트의 취미 판단

환희, 그 눈물젖은 아름다움

올드 위키드 송 Old wicked song 과 칸트의 취미 판단     


환희歡喜는 큰 기쁨이라는 뜻이다. 당연하게도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 는 이 한자를 이용해 번역한 작품으로, 원제는 Ode an die Freude 이다. Freude – 영어식으로는 joy라고 번역된 이 곡은 아마 듣지 못한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유명한 작품이다. 올드 위키드 송이라는 제목은 조금 생소할 지도 모르겠다. ‘그 옛날의 약한 노래들’라는 이 작품은 하이네의 작품 <노래의 책> 중 Die alten, bösen Lieder에 슈만이 음을 붙여 만든 가곡이다. 


사람들이 얼마나 클래식에 가까이 접해 있는지 감을 잡기가 어렵다. 세상에 존재하는 가구의 수만큼 가정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반화할 수도 없는 영역이고. 적어도 우리 집은 ‘찾아 듣는’ 집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성악을 전공하셨기 때문에, 내가 어린 아이일 때 처음으로 듣고 불렀던 노래는 슈베르트의 <송어> 였다. 이런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뭘까? 음악을 포함한 모든 예술은 개인의 경험과 연관될 수밖에 없다는 나의 주관 때문이다. 이 에세이에서는 클래식에 대해서만 다루고 있지만,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음악과 관련된 어떤 사건이 있을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흘러나온 음악이라던가, 무료한 출근길 좋아하는 음악이 나왔을 때 사람의 마음에 부는 바람이 잠깐 멈추는 감각은 언제나 소중하다. 


2021년 3월까지, 오랜만에 그런 감각을 주는 음악극이 있었다. <올드 위키드 송>. 역시 동명의 곡에 이름을 붙여 만든 극으로, 괴짜 성악 교수 마쉬칸과 천재 피아니스트지만 슬럼프가 심하게 와 공연을 그만 둔 스티븐 호프만이 3개월 간 성악 수업을 하게 된다. 작품 자체는 정말로 ‘올드’ 하다고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또, 최근의 사람들이라면 ‘빻았다’라고 표현하던지. 늘 느끼는 것이지만 그런 언어의 납작함은 문화 자본을 누리는 데 있어 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런 시절이 있었고, 만약 그런 시기에 이 작품을 봤더라면 그런 감각을 느끼지 못했을 거라 생각한다. 작품을 해독하는 능력, 이 역시도 이 극에서 말하고 있다. 기계적 분석은 작품을 만든 사람이 어떤 감정을 표현하고자 하는지 느낄 수 없게 만든다. 단어의 완벽한 파악과 이해, 그리고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은 인간 생을 조금 더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마쉬칸과 스티븐 사이를 지나는 공통적인 결이 있다. 두 사람은 매우 다른 것처럼 보인다. 유럽식과 미국식. 낭만주의와 모더니즘, 감성과 이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람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음악과 그들이 함께 공유하는 시간이다. 어떤 음악을 듣고 그 음악에 완전히 몰두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클래식의 경우, 그 가사의 의미가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멜로디가 어째서 이런 식으로 구성되었는지, 가사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특히 외국어로 된 노래는 더더욱 그렇고. 물론 어떤 노래들은 가슴을 치고 들어오는 경우가 대다수지만, 그 작품에 대한 심도 깊은 해석과 공감이 존재해야만 후대의 연주자들은 악곡을 재해석할 수 있다. 그 두 가지가 결합해 자신만의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것. 스티븐에게는 바로 이 점이 결여되어 있었다. 스티븐은 본인이 스스로를 그저 연주하는 기계일 뿐이라고 말하며, 1년 동안 연주회를 그만 둔 이유를 고백한다. 오래된 노래들이 가지고 있는 강한 힘을 스티븐은 마음 깊이 받아들여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칸트는 그의 예와 미술 이론에 대해 붉은 장미의 예시를 들어 말한다. 장미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장미의 목적’ 때문이 아니라고 말이다. 즉, 장미의 색, 질감, 그 외의 많은 특질들이 그것을 ‘아름답다’라고 정신적으로 느끼게 하도록 한다. 이런 ‘감각의 자유로운 유희’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특징을 칸트는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라고 명명했다. 이 목적 없는 합목적성을 가진 예술작품을 만들어내는 사람을 칸트는 ‘천재’라고 칭한다. 이들은 무의식적으로, 배우지 않아도 새로운 규칙을 창조해 낸다. 이들의 작품을 감상하게 되면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인지한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갑자기 생뚱맞게 칸트?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요지는 스티븐이 작품을 ‘마음 깊이’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유는 칸트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작품을 볼 때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것을 칸트는 ‘취미 판단’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네 가지의 조건이 필요하다. 감상자가 특정 욕구, 예를 들자면 분석이나 성공에 대한 욕구에서 무관심한지, 보편적으로 만족하는지, 조화가 잘 되어 있으면서도 앞서 말한 ‘감각적인 만족에 대한 목적’이 존재하지 않는지, 즐거움을 주는지가 그 조건이다. 스티븐의 경우 음악에서 늘 한 걸음 떨어져 단지 그것을 흉내 내는 데 지나지 않았으므로 천재도 될 수 없었고, 작품을 그 자체로 인지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그는 창조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마쉬칸의 권유로 아무런 기대 없이 관람한 오페라 <팔리아치>를 감상하고, 그는 충격에 휩싸인다. 단 한 번도 음악에서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이 없다며 흥분 상태에 빠진 스티븐은 예술 작품에서 처음으로 숭고함을 느낀 것이다. 처음에는 자신이 피아니스트이지 성악가는 아니라면서 교습을 거부하던 스티븐이, 마쉬칸의 작품에 대한 분석과 그가 전달해 준 음악적 감동을 통해 ‘교육을 받는 천재’가 되어간다. 이는 극중 그가 부르는 ‘시인의 사랑’가곡들이 점점 더 감정적으로 풍성해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마쉬칸이 그에게 알려준 것은 단지 ‘좋은 예술가가 되는 법’뿐만은 아니었다. 또, 마쉬칸이 그저 스티븐을 일방적으로 가르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마쉬칸과 스티븐은 마치 ‘냉정과 열정’두 종류의 인간이 만난 것과 유사하다. 이성적이고 차분한 스티븐과 괴짜에 말이 많은 마쉬칸. 하지만 스티븐은 오히려 솔직하고 직설적인 편이며, 마쉬칸은 비밀이 많다. 두 사람은 전쟁을 겪은 유대인과 전쟁 후세대 유대인이라는 차이가 존재한다. 스티븐은 마쉬칸을 통해 감정의 표현을 알게 되고, 독일에 있는 다하우 강제 수용소에 들러 그 참극 앞에 충격 받고 만다. 그는 마쉬칸에게 앞으로 독일어로 노래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며, 마쉬칸이 유대인을 비난하는 발언을 한 것에 대해 분노를 표출한다. 다하우 강제수용소가 영어로 된 어떤 안내 문구도 없었으며, 그저 작은 독일어와 그림들, 그리고 아름다운 페인트칠로 그곳을 기념관처럼 꾸며두었기 때문이다. 이후 이어진 마쉬칸의 발언은 충격적이다. 그는 사실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에 대한 차별적 발언을 일삼은 것은 타인이 먼저 유대인을 비난하기 전 자신이 스스로 독약을 마시는 것과 같은 행위였다고 말한다. 스티븐은 이런 마쉬칸의 회피적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당연하게도, 스티븐은 그 시대에 살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올드 위키드 송>의 배경은 오스트리아다. 독일이 아니라 오스트리아? 놀랍게도, 오스트리아에는 이런 농담이 있을 정도로 나치가 많았다.   

   


한 소년이 제 조부에게 묻는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도 나치였나요?

조부는 답한다.

나는 몰라, 그런데 옆집 사람은 나치였다.      

옆집 사람의 손자가 조부에게 묻는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도 나치였나요?

조부는 답한다.

나는 몰라, 그런데 앞집 사람은 나치였다.  

    


오스트리아 역사책에는 독일이 무력으로 침략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1938년에는 오스트리아인 나치가 50만 명이나 되었으며, 그 수는 독일 내의 나치보다 훨씬 많은 수였다. 게다가 1981년까지 UN 사무총장을 역임하던 쿠르트 발트하임이 은퇴 후 오스트리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때, 대선 직전 그가 나치 전력을 숨겼다는 폭로가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54%의 지지율로 당선되었다. 결국 그는 페르소나 논 그라타(persona non grata)로 지정되어 미국과 서유럽 국가 입국 거부를 당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이런 삶의 수모에 스티븐은 하나하나 분노하며 ‘나는 원망하지 않으리Ich grolle night’를 부른다. 독일어가 아닌 영어로. 


그가 마쉬칸의 괴짜같은 성격이나, 유대인을 비난한 사실, 그리고 오스트리아인들의 거짓말들에 일일이 분노

하는 것과 달리, 마쉬칸은 기이할 정도로 침착하다. 마쉬칸은 자신의 고통을 ‘묻어두었다.’라고 표현한다. 둘은 양극단에 서 있다. 자신의 것이 아니지만, 자신을 이루고 있는 민족의 고통에 분노하는 사람. 그리고 자신의 고통을 그저 방치해 두고, 이전의 기억들에서 끊임없이 도망가려 애쓰며 자신을 학대하려는 마쉬칸. 스티븐은 마쉬칸에게 그가 어떤 고통들을 겪었는지에 대해 말해달라고 청하지만, 마쉬칸은 몇 번이고 거절하다 결국 습관적으로 자살을 기도한다. 이런 자살 기도는 회피적인 마쉬칸의 태도 그 자체다. 그 때 죽지 못했다는 죄책감, 기억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회피적 사고는… 굳이 칸트적으로 정의하지 않도록 한다. 그의 죽음에 대한 태도는, 인간이 인간에게 자행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사건들을 토대로 한 것이기에. 오히려 그에게 지금 이성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더 잔인하고 비윤리적일 지도 모른다. 


 무엇이든 당연히 그렇게 되는 것은 없다. 원인이 있기에 결과가 있고, 상황이 있기에 감정이 생긴다. 개인의 역사는 데이터에 들어가면서 하나의 일반적인 이야기가 된다. 마쉬칸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가 스스로를 수십 번 죽인 것일 테지. 결국 마쉬칸은 스티븐에게 자신의 고통을 말하게 되고, 스티븐은 그의 아픔에 눈물을 보인다. 이 눈물은 마쉬칸에게도, 스티븐에게도 어떤 위로가 될 수 있다. 슬픔이 기쁨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들릴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마쉬칸은 그동안 자신의 아픔에 공감해줄 사람이 없었으며, 스티븐은 분노에 찬 눈물이 아니라 그가 느낀 아픔 그 자체에 공감하고 울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닿고, 마음을 달래어 줄 수 있다는 것. 상처받은 짐승들이 서로를 핥아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스티븐과 마쉬칸은 그렇게 양 극단에서 벗어나 한 발자국씩 용기를 낼 수 있게 된다.


 환희患喜. 슬픔과 기쁨이 공존하는 단어의 울림. 하나의 사건에서 여러 양가 감정을 느끼듯, 우리 모두에게는 스티븐적인 사고방식과 마쉬칸적인 사고방식이 잔존하고 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성향이 더 극적으로 발휘되느냐, 그 차이 뿐이다. 분노와 절망에 휩싸여 자신만의 감정에 집중하는 것과, 자신의 절망을 그저 방치한 채로 다 지나갔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 그 모두가 인간적 존엄성을 상처 입히는 행위다.


 우리는 묻어둔다는 의미를 너무 가볍게만 사용하고 있다. 우리의 고통이 남기고 간 상처를 장례조차 치러주지 않고 우리의 삶 자체를 장례식으로만 만들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겪은 일과 감정을 꺼내어 보고, 닦아주고, 염해서 관에 넣는 것. 그것이 ‘묻어둔다.’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그 과정이 수반되지 않는 감정의 방치는 헤카툼이나 다름없다. 이 두 사람이 마지막 수업 시간에 부르는 노래, 그 옛날의 약한 노래들Die alten, bösen Lieder 의 가사는 그래서일까, 감정의 갈무리를 배운 두 서툰 사람들의 성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올드 위키드 송> 의 가사


마쉬칸의 동화 앞에서 오열할 줄 아는, 공감하고 깊이 빠져 드는 법을 배운 스티븐과 자신의 동화를 내면의 감정 장례식에서 읽으며 더 이상 아무도 읽지 않는 먼지 쌓인 역사책으로 방치하지 않는 법을 배운 마쉬칸은 서로의 관을 확인하고 달래줄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고통 앞에서 눈물 흘릴 줄 아는 사람은, 틀림없이 타인의 고통에도 기민하게 반응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래서 스티븐의 <올드 위키드 송>은, 그 누구나 눈물 흘릴 수밖에 없는 다정하고 성숙한 음악이 되었으리라 확신한다.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리고 쓰고 있는 여러분과 나의 음악은 어떨까. 당신은 감정의 관을 묻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지, 모든 것이 지나가리라는 실체 없는 확신 속에서 자신을 돌보지 않고 있지는 않았는지. 나는 당신이 아주 오래된 슬픔 앞에 하염없이 울기도 하고, 갑작스레 다가온 과거의 상처에 분노하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환하게 웃고, 어떤 슬픈 기억 속 떠오른 존재가 당신을 웃게 하기도 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슬픔이 그저 지나갈 것이라고만 생각하지 않고, 그 슬픔을 똑바로 마주하는 고통을 잠시나마 겪길 바란다. 그리고 그 고통의 순간을 잘 갈무리 해, 관에 넣고 묻어주었으면 좋겠다. 아니면 불에 태워 훨훨 날려 보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순간들이 당신 생의 예술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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