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친구라면 손을 잡아.
연극 알 앤 제이와 니체의 예술가
-위 글은 본인이 작성한 박정복 배우의 후기 아카이빙 북, <영원한 두 달의 도시>에서 일부 발췌한 부분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니체와 죽음을 많이 연관시키는 것 같다. 아마 ‘신은 죽었다.’ 라고 말한 유명한 문장 때문일까. 게다가 허무주의 철학자로 익히 알려져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허무와 공허, 죽음은 대부분 부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다. 어두움, 두려움, 음습함 등이 죽음의 일반적 속성이 된지가 오래다. 인간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신은 죽음을 무서운 것으로 만들어 왔다. 심지어 죽음을 언급하는 자들까지 우울하고 슬픈 존재가 되어버린다. 어떤 때에 죽음은 완전한 하나의 결말임과 동시에 비극적 성격을 갖게 되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햄릿’,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작품들. 고전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대개 연극적이고 즉흥적이며, 극적인 순간에 죽음을 맞으며 극을 끝내곤 한다.
허무와 죽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어디에서 도래했을까? 19세기 유럽에 갑자기 나타난 유령은 당연히 아닐 테다. 허무는 진리의 비진리성을 고발하며 나타난 존재들이다. 쉬운 말로 바꿔 보자면, 기존의 이성, 계몽주의 학파들을 비판하며 그것들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형태로 허무주의는 진보해 왔다. 해가 있으면 달이 있고,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듯이 역사는 늘 주류의 것을 고발한 비주류의 등장으로 이어져 나가는 것 같다. 정반대의 성질을 가진 것들이 줄다리기를 하며 평행을 이루고, 세상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살아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주류를 고발하던 자들은 주류를 진정으로 사랑했던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모든 반골 성질을 지닌 사람들은 ‘잘 살아보기 위해’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한다. 결국 세상은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에 의해 변화한다.
모든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사랑을 믿는 사람들이 가진 힘을 믿고 싶어 하는 편이다. 냉소는 사랑보다 쉽고, 사랑은 어렵다. 사랑이 모든 것을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우선 당장은 그렇다. 사랑은 담장을 넘을 수는 있지만 스무 자루의 칼을 막을 수는 없듯이 사랑은, 종종 유약할 때가 있다. 아니 어쩌면 대개의 사랑들이 다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영원함을 믿고 싶게 만드는 극이 있다. 연극 <알 앤 제이>이다.
나의 이런 해석은 – 당연히 매우 주관적이고, 조금 생뚱맞게 들릴 수도 있다. 주로 알 앤 제이의 해석은 극중극과 셰익스피어 희곡 내의 억압의 해소와 유사점을 찾고 비교 분석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니체를 논하기에 앞서 극을 소개하자면, 연극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학교의 규율과 통제 하에 억압당한 소년 네 명은, 금서로 지정된 셰익스피어의 책 로미오와 줄리엣을 읽으며 연극에 몰입한다. 일종의 극중극인 셈이다. 처음에는 장난처럼 읽어 내려가던 로미오와 줄리엣의 대사들은 학생들의 감정이 격해질수록 더 몰입되어 학생 자신과 배역을 구분하지 못하는 지경까지 이르기도 한다. 그리고 네 명의 학생 중, 세 명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한 명만은 현실과 일상에서 탈주한다.
작품의 배경은 20세기 초의 영국 기독교 기숙학교이며, 학생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그저 1,2,3,4의 숫자로만 남는다. 가장 혁명적이며 낭만적인 학생 1, 그 낭만으로 뛰어들고 싶었지만 현실이 발목을 잡은 학생 2, 여태 받아온 폭력을 답습해 무의식적으로 폭력적인 모습이 나타나는 학생 3, 가장 방관자적으로 서 있는 학생 4. 이 넷이 함께 하는 극의 첫 시작은 고해로 시작한다. 주에게 자신이 지은 죄를 고백하고, 피타고라스와 라틴어 동사변화와 물리 법칙을 암송한다. 그 수업들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욕망의 노예가 되지 마라.’ 이 말은 주기적으로 반복되어 학생들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주로 금기에 한 발짝 다가설 때마다 내면의 종이 울리면 이를 암송하는 형식이다. 그 금기는 주로 사랑, 그러니까 감정과 욕망에 충실해지려는 순간이다.
감정과 욕망에 충실해 질 때는 주로 학생들이 로미오와 줄리엣에 완벽하게 몰입해 있을 시기다. 극중극의 형태를 하고 거의 원전 그대로를 답습하듯 나타나는 로미오와 줄리엣은 이 연극에서 꿈, 즉 가상의 세계로 표출된다. 현실과 가상의 세계의 모호함은 맵 여왕 장면부터 이어진다. 아래 대사는 맵 여왕 장면 시작 바로 직전의 대사이다.
학생 3 “나도 꿈을 꿨는데.”
학생 1 “무슨 꿈?”
학생 3 “꿈꾸는 자들은 거짓말을 잘 한다는 꿈.”
학생 1 “자면서 꾸는 꿈이 진실일 때도 있어.”
로미오의 대사는, 결국 로미오와 학생 1이 결코 개별적으로 분리된,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밝힌다. 자면서 꾸는 꿈이 진실일 때도 있다는 로미오의 말은, 사실 그가 꾸고 있는 꿈이 진실이길 바라며,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학생 1의 희망을 담은 대사다. 그렇기에 결국 닥쳐온 아침이라는 현실을 거부한다. 그도 그럴 것이, 지속적으로 학생들은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구분 짓지 못한다. 욕망에 쉽게 휘둘릴 수 있을 법한, 사랑을 암시하는 결혼식 장면과 발코니 장면은 학생 3과 4의 방해로 인해 원치 않게 중단되으나, 결국 가상으로 편입되고자 하는 욕망이 그들을 지배한다. 학생 1과 2의 개입으로, 학생 3과 4의 협조로 그들이 완벽하게 가상으로 빠져들 수 있도록 돕는다. 완벽하게 작품 내에 동화되었기 때문에 학생 1은 고통으로 가득 찬 현실 세계로 돌아오기가 힘들다. 줄리엣의 침대, 초야 이후의 장면에서 줄리엣이 아침을 부정하는 것과 달리, 정말로 다가온 아침에서는 로미오 역을 맡은 학생 1이 지금을 ‘밤’ 이라고 설득한다. 결국 줄리엣 역을 맡았던 학생 2가 그를 꿈에서 깨워낸다.
극의 내용 중 학생들은 몇 번씩이나 꿈에 완벽하게 동화되는 시기가 있다. ‘맵 여왕’의 장면이나, ‘무도회’ 장면의 조명은 학생들이 학교에 있을 때 나오는 사각형의 부서진 노란 조명이 아닌, 꿈처럼 몽환적인 컬러의 조명을 사용한다. 학생들은 갑작스레 내리친 천둥번개에 빗물이 천장에서 떨어지자 책상과 의자를 이용해 쌓아 올린 높은 공간으로 올라가 그 빗물을 향유하기도 하고, 싸움하는 장면에서는 기묘할 정도로 눈이 광기에 젖었다.
니체는 이렇게 신체적, 정신적으로 순간을 ‘도취’ 라고 이야기 한다. 도취는 활력과 생명감에 의존하며, 미적 체험을 가능하게 한다. 미적 체험은 결국 ‘예술’을 만들어 내는데 일조하는 맵 여왕인 셈이다. 환상을 보여주기도 하고, 감정의 체계를 고조시키기도 하니 작품 내의 학생들은 머큐쇼의 맵 여왕 대사를 읊으며 환상 속으로 완벽하게 빠져든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이 예민하고 기민해진 감각으로 그들이 느낀 격정을 신체적으로 재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미적 체험이 예술의 시작이라는 것은, 다르게 말하자면 미적 체험을 경험하지 못한 자들은 예술을 해낼 수 없다는 것이다. 니체의 예술가는, 초기 철학에 따르면 크게 두 종류로 나뉘는데, 아폴론적 예술가와 디오니소스적 예술가이다. 아폴론적 예술가의 경우 형상과 형태를 제공하고자 하는 충동을 가지며, 무언가를 새롭게 규정하고 싶어 한다면 디오니소스적 예술가는 구별을 없애고 완전히 하나가 되고자 하는 충동을 가지게 된다. 이 둘은 서로 변증법적 관계를 가지며 보통의 예술가들은 두 충동을 모두 가지고 있다.
학생 1의 경우에도, 이 두 가지 경향을 모두 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천편일률적인 삶 속에서도 꾸준하게 사랑의 목적어를 찾고 있던 사람이라는 것을 그의 등장 후 첫 대사, “내, 사랑에게.” 로 알려주지 않던가. 그런 학생 1에게 있어서 꿈은 늘 거리를 두고 있는, 가상이었다. 그는 늘 고통의 세계인 현실에서 아름다운 환상을 꿈꾼다. 아폴론이 미적 베일을 통해 삶의 부정적인 측면에서 인간을 구출하는 것처럼 학생1이 이를 은폐하고자 하는 욕망은, 결국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함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읽기 전에는 학교에서 배운 모든 것이 옳다고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생물학 특강에서 배운 ‘여성과 남성의 특성’ 이 얼마나 실제와 차이가 나는지 깨닫기 시작하면서 그 전까지의 삶이 모두 거짓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거짓말 하지 마라?” 하고 역설적으로 되묻는 것은, 그들은 거짓말을 하며 자신들을 속였다는 것에 대한 배신감을 보여준다. 세계의 고통을 완벽히 직시한 – 데미안의 언어를 빌리자면, 알에서 깨어나기 위해 투쟁하는 새와도 같은 – 학생 1에게 결국 아폴론적 예술관은 베일이 걷히는 순간 현실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고통을 안겨주었다.
결국 그가 채택하는 것은 디오니소스적 도취의 세계다. 학교에서 배운 "자신을 속이지 마라” 는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은 그를 가두고 있는 말 중 하나인데, 이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마지막에 그것을 이루기 위해 몸을 던지는 것은 아이러니함과 동시에 그가 학교에서 배운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 무의식적으로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꿈으로 도피하는 것은 아폴론적 예술가의 형식과 유사하나, 꿈으로 도취하는 그 자체는 디오니소스적 도취의 형식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속이지 않기 위해서 걸음, 목숨, 학교에서의 미래, 많은 것들을 내던지는 학생 1에게는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지만 공통적인 것은 ‘그 자리에서 벗어남’ 상태로 나아간다는 점이다.
고통스러운 객체의 세계에서 도취의 세계라는 가상과 완벽하게 합일되는 꿈의 장면, 즉 아직 끝나지 않은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극 속으로 자신을 기꺼이 내던지는 학생 1은, 앞서 우리가 고심했던 ‘죽음’ 의 키워드와 맞닿아 있다. 하지만 이 극이 과연 그저 ‘죽음으로 끝나기만 하는 극’ 인지에 대해서는 고심해 볼 필요가 있다.
극중극의 시작은 학생 1의 제안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그가 만들고 싶었던 작품의 끝은 ‘아침’ 이라는 타의에 의해 완성되지 못한 채 마무리 된다.
“만약, 네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이렇게 생각해.
어떤 환상을 보는 동안, 잠들었던 거라고.
그럼 괜찮을 거야.
그리고 끝을 내지 않았다고 해서, 꿈처럼 헛된 일이라고 절망하지 마.”
原作 셰익스피어 한여름 밤의 꿈 中 퍽의 대사
극의 대사부터 한여름 밤의 꿈으로 시작해 막을 내리고, 학생들은 꿈을 꾸었다는 거대한 플롯을 제시한다. 더불어 자면서 꾸는 꿈이 때로는 진실일 때도 있다는 학생 1의 대사는 로미오의 대사이기도 하고 학생 1 내면의 언어이기도 하다.
“우리가 친구라면 손을 잡아.”
학생 1은 분명히 그저 사라지고 싶었던, 비극적 작품 속의 주인공은 아니라고 사료된다. 특히 그가 죽었다거나, 사라졌다는 이유만으로 해석되기에 알 앤 제이는 우리에게 ‘우울한 평화’를 안겨주는 극 아닌가. 그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극을 진행하며 함께 환희에 젖었던 순간들, 서로 상처를 주고 갈등도 생겼으나 결국 손을 잡고 “슬픔을 알아줄 자비의 신”을 찾았던 순간들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을 다시금 되짚어보고자 책을 들었던 것이리라. 완벽한 작품, 예술을 통한 자기 구원을 학생 1이 실현하는 방법은 친구들과 함께하는 극의 완성이었다.
그가 그토록 예술을 통한 구원에 필사적이었던 이유는, 삶에 그만큼 진심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삶에 진심어린 사랑을 보내는 사람들은 삶이 그를 속일 때 유달리 고통 받는 것 같다. 마음을 내어준다는 것은 그만큼 크고 힘든 일일 테다. 학생 1은 그 가상의 세계에 온전히 마음을 주었고, 현실에서 살아감에 있어 치열하게 목적을 찾아왔으므로, 그의 눈앞에 보인 그를 구원할 방법은, 완전히 끝난 가상의 세계를 다시 자신의 안으로 재현시키는 것뿐이었을 테다.
학생 1이 사실은 세상을 매우 사랑했기에 또 다른 세상으로 환희를 가지고 벗어난 것을 삶의 허무를 느끼고 탈출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 것처럼, 니체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세상을 허무한 것으로 사유한다고 우리는 자주 오해하지만 니체는 그 누구보다 디오니소스적으로 세상을 사랑했던 사람이다. 우리는 그것을 그의 초기 예술철학인 형이상학적 예술관과 후기 예술철학인 예술생리학에서 엿볼 수 있다. 놀랍게도, 오늘 학생 1에 대해 분석한 이 예술가-형이상학은 니체가 실패한 프로그램이라고 진단한다. 왜냐하면, 삶은 고통스러운 부분이 분명히 있지만 그 세계가 완전히 고통스럽고 극복해야 만하는 대상으로 삼는 것은 생을 능욕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결국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삶의 고통을 발견하더라도 환상이나, 위로를 필요로 하지 않은 채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를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지혜라고 부른다.
학생 1에게 니체의 디오니소스적 지혜를 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니체가 학생 1의 선택을 완전히 비난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니체는 삶 역시 예술로서 고찰되며, 삶과 예술은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학생 1의 삶이 과연 죽음으로 끝나 관에 그대로 묻혀버릴까? 그를 기억하고 있는 학생들이 있는 한 그의 삶은 그대로 끝나지 않는다. 영원히 살아남아 생명을 부여할 그들의 서약처럼, 학생 1의 삶은 전설처럼 이야기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말을 하고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는 한 끝까지 회자될 것이다.
물론 학생 1의 삶은 남은 학생들에게 위로나 환상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그들이 세계에 대한 통찰을 가능하게 한다. 어려운 말을 조금 더 쉽게 바꾸어 보자면, 눈을 가린 채 살아오던 학생들이 결국 진실을 맛보게 된 순간, 그 현실에서 눈을 돌리지 않도록 하는 계기를 학생 1이 제공한 것이다. 자칫 그저 ‘꿈’ 이었다고 치부할 수도 있을 법한 말을 학생 1의 선택이 그들에게 비극이자 동시에 새로운 통찰이 되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을 단초를 제공했다. 학생 1은 그들에게 어쩌면 초인일지도 모른다.
알랭 바디우는 그의 저서 <비미학>에서 아래와 같이 밝힌다.
: 연극은 순간 속에 있지만 영원 속에는 없는 것을 가지고 영원을 보완해야 하는 유일한 예술이다.
그리고 학생 1은 그 허무함이 못내 싫었던 학생이라고 생각한다. 삶 자체를 연극으로 만들고 싶었던, 삶을 영원한 하나의 희곡으로 만들고 싶었고, 그래서 그 안에서 영원히 살고 싶었을 테다. 그 부조리함이 역설적으로 학생 1의 삶을 죽었어도 죽지 않은 불멸의 것으로 만든 것이 아닐까.
영원이란 개념은 없고 모든 것이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삶의 방식 속에서 영원성을 보완하기 위한 방법을 나름대로 강구했던 그는, 그의 방식대로 극을 영원하도록 만들었고, 비록 완결 되지 못한 삶일지언정 모든 학생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그 학생들이 당장 무언가를 바꿀 수야 없겠지. 학생 1 역시도 삶을 그 누구보다 사랑했지만, 세상을 바꿀 수가 없어 객관적인 비극의 결말로 뛰어들지 않았나. 그러나 그것이 비극이라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특히, 학생 1 스스로는 그것을 비극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가 선택한 비극은 누구보다 잘 살고 싶었기에 선택한 결말이다. 남은 학생들은 그저 슬픔을 나누며 잡은 손의 온기를 기억할 것이다. “우리가 친구라면 손을 잡아.” “제 슬픔을 알아줄 자비의 신은 저 구름 속에도 없는 건가요?” 그 모든 온기에서 느껴진 사랑이, 결국 누군가에게 무자비했던 삶을 변화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나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한다. 아주 적은 수의 사람이라도 사랑하고, 사랑했고, 사랑할 것이고, 사랑의 모든 동사 변화 속에서 살아간다면 세상이 조금은 더 남들을 아프지 않게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노력하지 않겠나. 남은 학생들이 학생 1과 같은 선택을 하는 사람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도 그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냉소를 피하고, 우리의 삶에서 눈을 돌리지 않도록. 아름다움을 삶으로 창조해낼 수 있는 생의 예술을 살아보길 기원한다.
참고자료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 백승영 저, 책세상 출판
서양 미학사의 거장들, 하선규 저, 현암사 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