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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 Mar 30. 2021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와 카뮈의 부조리 철학

인간은 모두 부조리 속에서 살고 있다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와 카뮈의 부조리 철학

아래 글의 내용은 2021년 쓴 박정복 배우 필모그래피 아카이빙 북 <영원한 두 달의 도시>에 일부 수록되어 있습니다.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 는 1980년대 초, 영국의 셰필드라는 마을에서 옥스브릿지에 가기 위한 특별반 학생들의 이야기이다. 사실, 극 전체의 내용은 어찌 보면 불만스러울 수도, 혹은 불편할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극의 주인공 중 하나인 헥터 선생님은 학생을 대상으로 한 성추행을 저지른 데다, 교사 중 한 사람인 어윈은 미성년자인 제자에게 마음을 품게 된다는 점에 주목한다. 남학생들의 입에서 나오는 발언들은 여성혐오적이며, 영국엔 여자가 살지도 않는지 – 극에서 나오는 여성은 딱 한 명뿐이다. 이 기이하게 기울어진 연극은 매우 부조리하고, 차별적으로 보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이 극에 어떤 변을 달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극 중 어윈의 대사를 빌려, ‘다른 측면에서’ 보았을 때. 이 극이 다루고 있는 부조리 그 자체에 대해 우리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앞서서 나는 이 극이 <고도를 기다리며>와 같은 부조리극이라고 해석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밝히고 싶다. 사실 부조리를 다루기 위해서는 목적이 결여되어 있으며, 전위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 부조리극의 예시를 드는 쪽이 좀 더 좋을 지도 모르겠다. 대체 부조리는 무엇이기에 이 사람이 계속 부조리, 부조리 하고 이야기 하는 걸까?


간단하게 말하자면 카뮈는 세계의 두려움과 낯섦, 우리가 살면서 당연히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논리가 사실은 불변하지도 않을뿐더러 그것이 세상의 법칙도 아니라는 이질감에서 오는 두려운 감각이라고 정의한다. 쉽게 예를 들어보자. 계단을 내려가다가, 계단 하나가 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바로 바닥에 닿았을 때의 이질감. 언젠가 언급했던 ‘더 잘 살고 싶기 때문에 죽고 싶은’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공포. 이 아래로 내려가면 결국 부조리함이 있다. 아마 이 너무나 유명한 이 첫 문장은 누구나 한 번 즈음 들어봤을 것 같다.      

정말로 진지한 철학의 문제는 단 하나, 자살이다.

                    Il n'y a qu'un problème philosophique vraiment sérieux: c'est le suicide.     


그리고 그는 또 다시 이야기한다. 생각은 곧 정신적 침식이며, 이 침식으로 인해서 사람은 죽음을 갈망하지만, 결국 육체에 의해 지배당하기 때문에 죽고 싶어도 무서워하는 성질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그리고 그것 역시 부조리라고 말이다. 


여기, 그런 사람이 있다. 시, 노래, 잠언들을 모두 간직하고 있으면서 정신적인 피로감을 토로하는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지는 않지만 불행하지도 않다.”라고 말하는 사람. 이 극의 주인공, 데이비드 포스너다. 


적확하게 말하자면,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 는 포스너가 쓴 역사책 그 자체다. 미래의 포스너는 녹음기를 들고 어윈에게 찾아간다. 자신이 책을 썼다고, 그 책에 선생님의 이야기를 썼다고. 그는 어렵게 들어간 대학교를 자퇴하고 친구들의 소식지를 읽고 수집해 책을 출판할 예정이었다. 이 극 전체가 그 책의 내용이라는 것은 조금만 집중하면 알 수 있는데, 극 중 나오는 녹음기 소리와 종종‘어른’의 목소리로 말하는 학생들이 바로 그 증거다. 그래서 포스너는 과거의 인물들에게 그 때 있었던 일들에 대해 모든 것을 듣고 싶어 한다. Un-fingermarked. 손때 묻지 않은 과거의 그 시절에 대해 물으며, 진실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던 과거의 선생님에게 묻는다.


“선생님, 그 애 좋아하셨죠.”     


  맞다. 어윈의 가르침에 있어서 주 골자는 ‘시험에 있어서 진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였고, 포스너는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 어윈의 말대로 히스토리 보이즈가 저술되었다면, 그것은 아마 흔하디 흔한 입시 성공의 드라마, 어윈의 대단한 가르침을 전파하는 프로파간다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니 저술할 가치도 없다고 판단했을지 모른다. 물론 어윈의 가르침이 아주 쓸모없는 것은 아니었다. 셰필드 특별반 학생들은 모두 지망하는 대학교에 입학했고,  히스토리 보이즈는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즉 승자의 입맛대로 왜곡되고 단절되고 축소된 인과 관계적 역사가 아니라, 다양한 사건이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과거 그 자체다. 


이 과거를 ‘진실만’ 담는 것은 포스너가 어윈이 아닌 헥터의 말을 충실히 따름을 알 수 있다. 헥터는 토마스 하디가 쓴 ‘북치는 소년 핫지’를 언급하며, 최초로 군인들의 이름이 기억되기 시작한 전쟁인 ‘보어 전쟁’, 그리고 군인들 가운데서도 가장 한미했던 시골뜨기 소년을 기억하는 자세에서 위로를 얻는다. 포스너 역시 마찬가지다. 그 전까지만 해도 어윈에게서 느끼고 싶어 했던 동질감이나 위로의 측면을 문학과 나이 든, 흠결 있는 선생님에게서 느낄 때. 또, 포스너의 인종적 약점인 유대인이라는 점을 이용하라고 가르치는 어윈 앞에서 그가 느꼈을 부조리함과, 실제로 그렇게 했을 때 중립적 태도를 칭찬 받았던 그의 감정에게 살라고 채찍질 해주는 것은 아마 문학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어윈의 교육관과 헥터의 교육관은 완전히 상충하는 데가 있다. 그리고 이 부분은 ‘부조리’에서 지성과 이성이 부딪히는 양상과 동일하다. 어윈의 교육 방식은 존경받는 것들을 부수고 실체 너머의 존재를 사유하도록 만든다. 반면 헥터의 교육 방식은 언어의 힘에 기대고 있다. 플라톤은 시구의 울림은 시 자체가 만든 것이 아닌, 언어가 만든 영원이기 때문에 변질되기 쉽다고 말한다. 말라르메는 “시는 필연성의 이상적 체제에 속하며, 감각적 욕망을 이데아의 우연한 출현과 연관시킨다. 시는 사유의 의무다.”라고 논한 바 있다. 어려운 말 같지만, 결국 앞부분의 ‘생각은 곧 병이다.’라고 말한 카뮈의 발언과 놓고 보았을 때, 감각과 선의 세계를 연관시켜 생각하면 시를 쓰도록 만든다는 것으로 엮어 해석할 수 있다. 린톳 선생님 – 그러니까, 이 극의 유일안 여성 –은 이런 헥터의 가르침에 대해서 이중적인 평가를 내린다. “그분은 흔적을 남겨요. 그건 아무나 못 하는 일이죠.” 라는 말과 동시에, “가슴으로 배워라? 너무 무책임하지 않아요?” 그리고 이 말은 적확하게 맞아 떨어진다. 우리가 앞서 생각한 카뮈의 이야기와, 극중 오든의 시 인용구 중 “당신의 보호 아래 있는 모든 아이들에게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신경쇠약을 경험하게 하라.”를 생각해 보면, 헥터의 가르침은 학생들이 사유하게 만들고, 그것을 통해 부조리를 겪게 만든다. 어윈의 가르침은 일단 그 앞의 답을 주울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명확하다. 


하지만 부조리가 나쁜 걸까? 카뮈는 모든 것이 의미 없다고 해서 그것들이 허무로 연결되도록 놓아두지는 않는다. 오히려 한 걸음 더 전진해 무용함을 완성시키라고 제안한다. 부조리한 삶, 그것에 대한 깨달음은 결국 열광적인 삶으로 뛰어드는 지름길이라고 말이다. 운명은 그저 출구일 뿐, 가는 길은 어떻던 상관없고, 그저 여러 번의 재도약이 사고하는 인간이 가진 운명이라고 말이다. 

실제로 <히스토리 보이즈>에서 많은 학생들이 졸업 후 살아가는 방향을 보면 굉장히 담백하다. 교장이 된 학생도 있고, 판사가 된 학생들도 있다. 주택 건설업을 하는가 하면, 화려한 세금 변호사가 된 학생도 있다. 세금 변호사가 된 학생(이하 데이킨)을 제외하고선, 모두 헥터의 말을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다. 그들에게서 어윈의 가르침에 대한 언급은 일절 존재하지 않는다. 헥터가 저지른 잘못, 즉 성추행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면서도 그가 가르쳐 준 것들이 흔적처럼 남아 있다.


 데이킨은 어떨까. 이 극에서 데이킨과 포스너는 완전히 양극단의 인물이다. 포스너는 동성애자고, 데이킨을 좋아한다. 데이킨은 이성애자고, 교장 비서와 사귄다. 포스너는 헥터의 말을 가장 깊이 받아들여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면, 데이킨은 어윈이 등장한 처음부터 그가 하는 말에 흥미를 가지고 헥터의 수업은 듣는 둥 마는 둥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완전히 방향이 달라졌다. 데이킨은 어윈이 가르친 대로 진실보다 효과적인 거짓말을 사용하며 살아가고, 포스너는 헥터가 가르친 대로 시를 기억하며, 주기적인 신경쇠약을 앓는다. 어느 것이 카뮈에게 있어서 가장 인간다운 삶일까. 


<시지프 신화>는 이런 신화의 말을 빌려 시작한다.      


신들은 시지프에게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끊임없이 굴려 올리는 형벌을 내렸다. 이 바위는 그 자체의 무게로 산꼭대기에서 다시 굴러 떨어지곤 했다. 신들은 무용하고 희망 없는 노동보다 끔찍한 형벌은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카뮈는 이 무용하고 끔찍한 노동에서, 그가 기나긴 노력 끝에 잠깐 달성한 목표를 마주한 그 순간에 주목한다. 호흡처럼 되돌아오는 고통에 성공의 희망이 있다면 차라리 행복할 텐데, 언제까지고 이 상태를 반복해야 한다는 사실이 그를 절망하게 만든다. 미끄러져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향해 내려가며 그는 고뇌하고, 또 고뇌할 것이다. 이 고뇌는 고통과 동시에 그의 인간적 승리를 표방한다. 


여기서 나는 조금 더 고민의 시간을 가진 적이 있는데, 단지 인간이 부조리에 저항하며 그것을 완성하는 아이러니컬한 삶을 위해 살아가지는 않을 것 같다는 점이었다. 늘 느끼지만, 인간은 더 잘 살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 그 욕망을 부조리로 과연 성취할 수 있는가? 데이킨과 어윈의 삶을 들여다 본다. 부조리에 완전히 녹아들어 저항 없이 사는 삶을. 숙고되지 않은 삶을 사는 데이킨을 들여다 본다. 그것은, 이름이 쓰인 빈 관을 6피트 아래에 매장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어윈은 늘 현상계의 삶에서 충실한, 약점 잡히지 않는 법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불가한 일이다. 그의 가르침은 어떤 권태감이 찾아와 구토를 하고 싶을 때, 그를 보호해 줄 어떤 장치도 주지 않았다. 그 이후의 답, 저 너머의 것들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서는 분명히 시가의 언어, 즉 헥터의 언어가 필요하다. 부조리의 산과 목표를 위해 끊임없이 시지프의 바위를 굴리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시 구절, 그리고 바위를 굴리기 위해 필요한 어윈의 도구. 어떤 것에 중점을 두고 살아야 할 지는 아직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수레는 하나의 바퀴로 달릴 수 없다. 데이킨은 화려하기만 한 삶을 살 것이고, 포스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행하지는 않은’삶을 살게 될 것이다. 어윈은 자신이 가르친 대로 역사를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의 역사 앞에서 끊임없이 도망치며 부조리를 피해 다닌다.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한 인간이 사회로 나아가기 전 영향을 미친 두 사람이, 교육자로서 해서는 안 되는 짓을 저지른 사람이었다는 점은 늘 아이러니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군가의 최악의 순간이 될 수도 있고, 사람은 칼로 무 자르듯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으로 나눌 수 없다. 포스너에게 중립적 태도를 칭찬한 그 면접관이 몸이 불편한 부모를 극진히 모실 지도 모르는 일이다. 바로 그 사실이 우리가 한 인간을 무조건적으로 미워할 수 없게 만든다. 이 부조리함과 불편함, 헥터가 좋은 사람이라는 데 사견을 달수밖에 없는 최악의 범죄. 그렇다고 어윈이 좋은 사람이냐, 하면 객관적으로도 그건 아닌. 이 불편함들은 <히스토리 보이즈>가 만들어낸 부조리의 일종이다. 우리가 마주친 세계의 두터운 본질들은 언제나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극이 오래도록 사랑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아이러니하게도 그 불편함 때문일 것이다. 어떤 영화도 볼 때마다 그 감상이 달라지듯이, <히스토리 보이즈>는 나이를 먹을수록 그 감상이 달라지는 극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도 이 극을 처음 보았던 만 19세의 나이에는 그저 불유쾌하고 짜증만 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작년, 이 극을 다시 보았을 때는 선생님들의 입장에 공감이 가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온 몸으로 토해내는 부조리함에 대해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들 모두에게 동조하고, 위안을 얻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과거의 나였고, 현재의 나이며, 어떤 특정 상황에서의 나이기도 했다가, 미래의 나이기도 한’이야기 속에서, 역사가 얼마나 주관적인 시각에서 작성되는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극은 흔치 않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이 극을 무조건적으로 좋아하리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수수께끼 같은 이 글처럼, 극 역시 매우 친절한 편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의 마지막 온점을 찍을 떄까지, 그가 쓰는 미완성의 역사책을 구경하고 싶은 사람은 언젠가 이 연극의 6연이 올라올 때 한 번 즈음 관람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부조리함에서 살아가느라 우리는 늘 고생하고 있으니, 예상되는 불편함을 피해도 문제될 것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부조리함을 종종 맛보고 싶을 때. 나는 이 극을 종종 떠올린다. 


참고 도서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알랭 바디우, 비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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