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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 Jun 08. 2021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과 그에 대한 고찰>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과 그에 대한 고찰     

본 글은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박정복 배우의 필모그래피 북 <영원한 두 달의 도시> 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흐르는 강물처럼 사람들 지나가네 
내가 여기 있는 줄 모르고
아무도 모르겠지 이렇게 내가 즐거운지 
날 볼 수 없을 테니까
나는 홀로 거리에서 나를 위해 노래해
아쉽게도 내 생일은 일 년에 딱 한 번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 얼핏 보기에는 선생님에 대한 사랑을 담은 연극인 줄로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1970년대, 혼자서 생일을 맞이하고 있는 선생님에게 학생들이 찾아가는 내용이니까. 하지만 이 애들은 선생님을 존경하고 있지 않다. 그건 아주 역설적인 내용이다. 제목과 내용에서 대비되는 괴리감. 그것이 극이 표방하는 "존경" 의 의미다. 연극의 학생들은 선생님을 존경한다고 하면서 존경과는 거리가 먼 태도를 보인다. 그들이 선생님을 찾아온 이유는 선생님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함도 아니고, 그의 외로움을 달래주기 위함도 아니고 오로지 '수학 시험 답안지가 있는 열쇠'를 얻기 위함이다. 각 학생들에겐 모두 목표가 있다. 빠샤는 철학부 지망생으로, 수학에서 A 이상을 받아야 자신이 목표하는 대학을 갈 수 있다. 또 그가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함은 성공하기 위해서이다. 비쨔는 농업부에 가고 싶어 하는데, 수학 시험지에 아예 손도 대지 못했다. 만약 대학에 입학하지 못한다면 군대에 가야 하기 때문에 그에게 대학 입학은 매우 절실하다. 랼랴는 빠샤의 애인으로, 엘레나 선생님을 설득하기 위해 함께 참여한다. 발로쟈는 모든 일의 주동자로, 빠샤와 비쨔가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도록 일을 계획하고 지시한다. 그가 일에 참여한 이유는 단순히 '자신이 계획한 일이 성공하는 것'을 관조하기 위해서다.     


 지옥은 선의로 가득 차있거나 욕망으로 가득 차있다.
- 베르나르 드 클레르보     


주관적인 감상은 바로 이 한 줄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악으로 가는 길은 매우 쉽고, 평탄해보이며,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게끔 만든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욕망들, 그것이 비록 옳지 못하고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만하며 심지어는 법률마저도 어기게 만들지만, 인간은 '자신을 위한 일' 그리고 그것이 '모두를 위한 일' 이라고 자기합리화 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작중에서 빠샤와 발로쟈는 성경과 자유주의를 인용하여 말하곤 한다.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으로 인해 악한 행동을 자행한다. 그렇게 해석한 중세 철학자들은 신의 무능함을 철학으로서 입증한 것이라고 말이다.



학생들과 엘레나 선생님의 사상적 대립은 현시대와 구시대의 차이라고들 흔히 언급하는데, 인간 내면의 악과 선의 대립 역시 고려해 볼 만 하다. '인간답게 사는 것' 이 '부와 풍요, 명예'를 소유하였느냐 아니냐로 나뉜다고 생각하는 랼랴의 마음이 구세대에서도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가난하고 비참하게 살면서 그것이 인간답고 정신적으로 충족된 삶인지, 아니면 부를 누리면서 편안한 삶을 사는 것이 인간다운 삶인지에 대한 논의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학생들은 다각도로 선생님을 압박해온다. 위와 같은 삶에 대한 논쟁, 그리고 동정심에 대한 호소, 다분히 연극적인 사죄로서 말이다. 비쨔의 아버지는 화가였으나 그림과 그에 대한 숭고한 애정을 저버리고 채소가게 관리직을 맡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에 걸려 비쨔에게 대학은 하나의 탈출구다. 빠샤는 철학적 지식으로 가득 찬 두뇌를 가지고 있으나 이 둘 모두 수학 시험을 제대로 보지 못한 탓에, 원하는 대학에 가기는 커녕 재시험을 치기도 전에 군대에 가야 한다며 선생님에게 '열쇠'를 요구한다. 랼랴 역시 자신의 삶이 얼마나 괴로웠는지를 호소하며 그냥 저들에게 열쇠를 주면, 모든 일이 끝날 것이라며 선생님에게 열쇠를 주길 간곡하게 요청한다.



발로쟈는 이들과 완전히 상이하다. 그는 전형적인 인텔리다. 그가 뱉은 한 마디의 대사를 듣고 나는 발로쟈에 대한 편견 아닌 편견을 가지게 되었다. 악의 기원이 어디일 거라고 생각하냐는 빠샤의 말에 그는 대답한다.     

악은 즐거움이죠.     



발로쟈는 자신만만하고, 그 누구도 자신을 건드릴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계획을 과신한다. 엘레나 선생님은 '안티고네 컴플렉스' 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은 안티고네를 부술 수 있는 방법을 안다고 말한다. 인간은 나약하기 때문에 어떤 부분에서든 부서질 수 있고, 망가질 수 있다. 발로쟈는 그것을 잘 알고, 그 점을 찾아서 종을 울리면 된다고 말한다. 그의 연설은 매우 장황하고, 매력적이며, 현혹될 수 있지만 동시에 상당한 허정함과 허구성을 느낄 수 있다. 어리고 겉멋만 든, 실체적인 것은 하나도 없는. 자신이 현실을 제대로 지각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아보였다고 해야 할까.



자아도취에 빠진 전형적인 10대 남자애 -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전형적이라고 보기 힘들긴 하겠다만은- 느낌. 그의 오만은 자신보다 더 강한 권력 앞에서 충분히 깨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그는 강약약강의 모범적인 사례로 보인다. 결국 그는 약자만을 공격하니까 말이다. 이 극에서 발로쟈보다 더 강한 자는 나오지 않는다. 엘레나 선생님은 여성이고, 혼자 살며, 금전적으로 풍요롭지는 않다. 빠샤나 비쨔 역시 그의 집안보다 훨씬 뒤떨어진다. 랼랴는 가난한 집의 여성이다. 발로쟈는 결국 랼랴를 성폭행하려고 하고, 이 모습을 본 엘레나 선생님은 그에게 열쇠를 던진다. 신발장에 누운 랼랴는 이피게네이아처럼 희생당한다. 아가멤논이 전쟁을 위해 여성, 심지어 자신의 딸을 수단으로 삼았던 것처럼 랼랴 역시 자신을 구해달라는 비통에도 웃음으로 무마하며 고개를 돌리는 빠샤에게 배신당한다. 빠샤가 천천히 자신의 비열함을 보이며 랼랴의 믿음을 하나씩 부수고 결국 마지막에 랼랴를 완전히 배반한 것처럼, 발로쟈는 자신을 마지막까지 믿었던 선생님을 붕괴시킨다.



 언뜻 보기에는 선의가 악의에 진 것 같이 보인다. 우뚝 선 채 열쇠를 책상 위에 올려두고 학생들을 바라보는 엘레나 선생님에게서는 공허함과 무거움이 잔존하고 있었으나, 결국 그 눈빛에 학생들은 열쇠를 가지고 나가지 못한다. 누군가를 도덕적, 신념적으로 파괴시킨 자들이 빠져나갈 때, 선생님은 싸늘한 시선을 보낸다. 발로쟈와 달리 빠샤, 비쨔가 빠져나갈 때는 햇빛이 비추는 시퀀스가 나타난다. 해는 결국 동에서 터오르듯, 결국 선과 양심, 죄책감은 인간 감정 근원에 내재되어 있다. 모두들 하루를 살아갈 것이다. 인물 중 한 사람은 동이 트기 전 빠져나가 그 근원 자체가 이미 상실되어 있음을 상징한다면, 결국 도덕적으로 타락한 빠샤와 비쨔에게는 일말의 양심이 그들을 평생 고통스럽게 만들 것이다. 그것이 양심 최후의 보루라면 보루다. 한 개인이 짓밟혀도 양심은 살아있듯이 말이다. 랼랴는 울부짖으며 선생님, 아무도 안 들고 나갔어요! 열쇠 그대로 있어요! 하고 말하지만, 엘레나는 듣지 않는다. 듣지 못했던 것일까. 그 눈빛은, 결국 아무도 어떤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선이라는 것은 무엇이며, 악이라는 것은 또 무엇일까? 발로쟈만이 악의로 가득 찬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발로쟈는 그들의 악의를 자극했다. 빠샤와 비쨔의 내면에 있는 것도 악이고, 랼랴의 내면에 있는 것도 악이다. 



예를 들어 볼까. 비쨔는 선생님을 업신여기고 비웃으면서도 술에 취해서 선생님 사랑해요, 전 정말 선생님을 존경해요. 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이 진심이 아닐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선생님을 기만하고 비웃고, 계에 발을 들여놓는 그 시점부터 끝까지 비쨔는 피해자성과 가해자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선생님의 말대로 비쨔는 빠샤와 발로쟈에게 놀아나는 피해자지만, 오히려 랼랴를 그렇게 보고 동정하셨어야지 비쨔만을 관용적으로 대해서는 안되었을텐데. 그건 아마 선생님이 비쨔의 내면을 잘 모르기 때문 아니었을까. 그 애는 순수하고 상냥하기만 한 애가 아니니까.



엘레나 선생님에게도 일정 부분 악이 있겠다. 당시 시대상을 살펴보면 엘레나의 모든 행동들이 단지 도덕적으로만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전시 공산주의에 의해 경제가 피폐화 되면서 1923년 자유 입학 제도는 폐지되면서 스탈린의 사상이 우세해 졌고, 복합적인 방법을 거부하는 교수법을 도입하게 되었다. 이 때, 자유적이고 민주적인 교수법이 학교에서 사라지고 억압적인 교수법이 등장했다. 이데올로기를 주입받았고 그것이 옳다고 믿었던 시대였다. 하지만 이후 60년대에서 70년대, 사람들은 더 나은 것에 대한 갈망을 지속적으로 하게 되면서 교육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 시기는 결국 소련의 붕괴를 상징하게 된다.



 1960-70년대가 엘레나의 학생들이 교육을 받았을 나이고, 엘레나 선생님이 30-40년대 이전에 교육을 받았으리라 생각한다면 사회주의적 이상을 실현하려는 교육체계와 스탈린의 독재정치의 모순을 겪었던 선생님이 억압적인 교육 방식을 채택하고 그를 체화해 가르쳤음을 이해할 수 있다. 게다가 1935년에는 평가제가 채택되어 수 등급을 받은 학생은 무시험으로 고등교육기관에 진학할 수 있었기 때문에 ‘더 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은 오로지 교육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역사는 이반 뇌제와 표트르 대제를 민족적 영웅으로 변화시키면서 착취와 찬탈을 숭배하는 방향으로 흘러갔고, 학생들은 동원훈련과 군사, 애국적 가치를 지속적으로 주입받았다. 남학생들이 이런 맹목적인 주입에 반항했다면, 선생님에게 선생님, 전 도저히 이해가 안 가요. 저도 잘 살고 싶어요, 큰 빵에서 가장 맛있는 부분을 차지하려고 하는 게 요즘 시대 아닌가요? 라는 랼랴의 대사는, 그 가치를 숭배해 좋은 성적을 받으면 되는 남자들과 달리 딱 한 뼘만큼, 그 한 뼘만큼만 더 질 좋은 것을 누리려면 여자는 많은 것을 팔아야 하는 시대였다는 것을 반증하기도 한다. 지금과도 다를 것은 없다. 그런 랼랴에게 빠샤는 사다리같은 존재였다. 내가 어떻게 널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어? 넌 사랑에 빠졌고, 고분고분하고 고급 아파트에 사는데. 나 같은 여자는 널 사랑해야지. 빠샤는 발로쟈에 의해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했지만 그건 랼랴를 위해서였다며 자기합리화 하고 있었다. 이것을 악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결국 마지막 엔딩에서 그것이 잘못된 행동이었음을 알아차리고 도망치듯 빠져나오는 빠샤의 앞에 햇살이 비추면, 비쨔는 술에 취해 아아, 씨발 이 빌어먹을 햇빛. 하며 도망친다. 햇살은 눈부시고, 그들이 추구하던 것이 어둠 속에 있던 욕망임을 비춘다. 다들 엘레나 선생님의 눈빛에서 결국 정의가 승리함을, 부서진 양심이 그 존재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것을 우리에게 상기하는 지 깨달은 것이다. 발로쟈가 많은 사람들의 규탄과 비난을 받는 이유는 그가 인간 내면의 악을 신랄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매우 허황되고 화려한 자세로 말이다. 너도 이런 걸 원했잖아? 너도 성공과 출세를 원하잖아. 사람들은 다 똑같아. 인간은 모두 악인이야.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한 발로쟈에게는 인간에 대한 신뢰가 존재하지 않는다. 



특정 소리들 - 잔을 부딪히는 소리 등 - 에 반응하며 빛이 깨질 때의 연출은 그들이 한 걸음씩 악인에 다가가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준다. 극 중에서 종종 부서지는 초록빛은 질투, 욕망을 암시한다. 오셀로에서 그랬지. 장군이시여, 질투를 조심하십시오. 질투는 초록 눈을 가진 괴물입니다. 이처럼 선하게 보이는 사람의 내면에도 선과 악이 공존하고, 선을 지키기 위한 행위는 그 무엇보다 처절하고 고통스럽다. 다정하고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이 사회에서 너무나 어렵고 지난한 일로 보인다. 악으로 가는 길은 쉽다. 그것이 선의로 포장되어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주관적인 감상으로, 발로쟈가 한심하고 비열한 인간으로 보인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다. 개인의 불행은 개인이 극복하기엔 때로 너무 무겁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결국 언젠가는 '지나가는 일' 이다. 실패에서 인간은 해답을 찾아낼 수 있고, 또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다. 그 약점을 쥐고 흔들며 오로지 흥미와 쾌락, 재미만을 추구하는 것은 저열하고 비상식적인 인간상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행동이다. 전형적인 범죄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유형. 이들은 더 큰 권력과 억압에 쉽사리 굴복하니까. 



학생들의 욕망이 지친 이상과 부딪히는 소리, 욕망이 이성을 짓밟고 파괴하려는 순간들. 결국 아름답던 왈츠가 남성의 물리적인 힘으로 여성을 억압하고, 레코드가 고장나 지지직 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극은 막을 내린다. 선생님, 애들이 열쇠 안 가져 갔어요. 그 말이 너무나 슬프고 공허하게 들리는 것은, 결국 모든 것을 지휘한 주동자에게 이 사건은 그저 인간을 활용한 실험에 불과했기 때문일까. 사람은 대체 무엇으로 살아야 한단 말인가? 현대 한국 사회에서도 공공연하게 이런 일들은 일어나고 있어서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은 끊임없이 공연될 수밖에 없다. 작품을 관람하면서 N번방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는 나처럼 말이다. 그 범죄자들이 했던 말들은 발로쟈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유사하지만, 결국 그는 체포되었고 법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허세와 약자에 대한 악의, 위선으로 가득 찬 인물과 성공과 출세에 대한 야망으로 악의를 품게 된 인간, 그리고 그 인간들에게 다방면의 무차별적인 공격을 받으면서도 선의와 도덕에 대한 신념으로 우뚝 서 있던 인간을 기억한다. 작중에서 엘레나 선생님은, 인간 모두가 간악하고 사악하더라도 한 명의 선인이 있다면 세상은 좀 더 좋아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소돔의 일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착한 사마리아인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힘없는 선의와 양심은 권력에 짓밟힐 수 있으나,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악에 대응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아, 발로쟈 빼고. 발로쟈에게 있어서 이것은 정말 그냥 스포츠일 뿐. 그렇지만 발로쟈는 이 일에서 완전히 패배했다. 그는 어떤 논설로도 엘레나 선생님을 뒤흔들지 못했고, 오히려 그가 말한 대로 안티고네의 영웅적 심리와 인간의 도덕이 얼마나 빛나는가를 안티 테제적으로 부각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가 한 것은 강한 권력으로 엘레나를 밀어붙인 것이니까. 내게 발로쟈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그러나 자신이 잘 안다고 우쭐대는 사람이다. 자신을 표토르 대제와 나폴레옹에 비유하며 왕이 승리했다고 하지만 관객들은 모두 알 것이다. 그 증명은 입증 실패했다는 것을. 그리고 발로쟈의 모든 사상들은 비열한 수단임에 불과함을.



그러나 발로쟈를 조소하는 한편으로 나 역시도 비겁하지 않은 인간인가를 꾸준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한 인간으로서 나는 비열하지 않은 적 있었던가? 아주 사소한 것부터. 시험 범위와 내용, 족집게 포인트를 친구가 알려달라고 했을때 잠시라도 주저했던 고등학생 시절 내 모습이 생각났다. 그것은 비열하지 않다고 할 수 있나. 입시 제도는 사람을 괴물로 만든다. 그렇지 않았던 인간마저도 이해타산을 고려하게 만드는, 양심은 저버리고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게 만드는 사람으로 말이다. 발로쟈는 이 극에서 가장 우두머리와 선두에 서 있는 사람이다. 중세 기독교 철학자들이 그랬듯 그는 자의로 악을 선택했으며, 순수히 재미로만 그것을 택했다. 악으로 가는 길은 그 무엇보다 쉽고 간편하니까. 사람들이 바보라서 악을 택하지 않은 것일까? 그것은 내 머리 위에서 빛나는 별과 내 가슴에서 숨 쉬는 도덕법칙처럼 그것이 옳지 않기 때문에 택하지 않는 것이다. 어려운 길은 언제나 선뜻 발걸음을 놓기에 힘들지만 결국 인간은 도덕을 택한다. 인간답게 사는 것. 그건 뭘까. 타협점을 놓고, 악을 택하는 것? 그래서 더 잘 살 수 있도록 수단과 방식을 가리지 않는 것? 



세상은 너무 불공정하다. 고통은 지대하고 즐거움은 제거되어 있다. 그러나 그 이유는 악이 판치고 있어서다. 악이 즐거운 이유는 행하는 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이며, 결국 행하는 자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다. 악을 행하는 자들은 주로 권력자이기 때문이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서는, 거칠게 말하자면 악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옳다. 따라서 발로쟈의 악은 즐거움이라는 그 말은 순전히 그와 같은 권력자에게만 해당하는 발언이다. 발로쟈는 열쇠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그 열쇠를 발견하고 나서도 아는 척 하지 않았던 이유는 엘레나 선생님이 순순히 그 열쇠를 주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게 자신이 원하는 게임이자 그림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세상에는 돈을 주면 그 열쇠를 넘길 사람도 있지만 판도라의 상자에 마지막으로 남은 희망처럼 결국 그 열쇠를 넘기지 않는 선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발로쟈는 여전히 잘 살 것이다. 므기모에 들어갈 것이고 승승장구 하겠지. 발로쟈의 승리인 걸까. 연상되는 기억이 어떤 매개체로 하여금 공고해진다면, 이들은 열쇠와 생일을 떠올릴 때마다 엘레나 선생님을 생각하겠지.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것은 발로쟈 뿐일 테다. 그래서 결국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발로쟈를 인간답게 산다고 할 수 있을까? 랼랴가 갖고 싶어했던 그 풍족하고 안락한 삶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것이 무엇을 표방하고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저명한 일이다. 인간은 모두 ‘잘’ 살고 싶은 욕구가 있다. 그것을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잘 살기 위한 방식에는 언제나 도덕적 잣대가 필요하다. 그 이유를 묻는다면 당연하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선량함을 짓밟으면서까지 ‘잘’ 사는 것에 대체 무슨 의의가 있겠는가.



"선생님, 저희는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그런 괴물은 아니예요. 살인 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되짚어보면 발로쟈의 이 말은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열쇠를 훔치려고 했고, 랼랴를 강간하려 했으며, 인간의 한 도덕성과 심리를 파괴하고 붕괴시키며 도덕적 죽음을 불러일으킨 자이니 십계명의 세 구절을 하루가 안 되는 시간동안 어긴 자가 발로쟈다. 라스꼴리니꼬프처럼 도끼를 들고 살인하지 않았다고 해서 살인이 아닌가? 또, 발로쟈가 학생들을 흔들어 놓기는 했지만 '발로쟈를 비난하는 것' 만이 과연 작가가 의도한 목적일까? 학생들 모두를 비난하는 것이 작가의 목적일까? 우리는 이 지점을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모든 부분, 모든 순간에서 특정 인물에게 공감할 때가 있다. 심지어 우리는 어떤 순간에는 발로쟈에게도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이 생길 것이다. 엘레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랼랴에게 이입하고, 비쨔의 말을 동정하고, 빠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때가 분명히 존재할 것이란 말이다. 박정복 배우(발로쟈 역)는 이를 인간 본성, 본질에 대한 극이라고 평한 바 있다. 나 역시 그 의견에 적극 동의하는 바이다. 극한의 상황에 처했을 때 인간이 보이는 태도, 그 본성을 적나라하게 밝힌 이 극이 그저 빻았다고, 성폭력을 다루고 있다고, 폭력적이라고 비난 받기에는 이 극이 아직까지도 다양한 국가에서 공연되는 그 시의성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무엇이든 맥락이 중요하다. 극이 가지고 있는 폭력성이 과연 폭력성을 미화하거나 재미를 위해서 내포한 것인가, 아니면 그 폭력성 자체를 고발하고 비난하기 위해 표현된 것인가.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 은 1980년에 발표된 작품이지만 2020년 한국에서도 끊임없이 현실에 대한 고민, 맞닿아 있는 지점들을 생각하게 만드는 극이다. 언젠가 이 텍스트가 '낡아서' 공연되지 않을 무렵 즈음이 된다면, 그 때에는 아마 이런 현실 자체가 부정하다는 것을 모든 사회가 동의하고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까. 아직까지 우리는 N번방 사건의 가해자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않았고 위계질서를 통한 폭력과 부정을 저지르는 자들은 법망을 빠져나간다. 그건 지금 이 사회에서 너무나 만연하게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이 지점을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 은 충격이라기 보다는 현실의 재현, 그 자체였다. 현실의 미메시스라는 예술의 플라톤적 정의를 아주 잘 따르고 있는. 그래서 새롭지는 않았지만, 씁쓸했다. 이런 사건들이 어째서 충격적이지 않고, '일상적인 일' 아닌가 하며 마음을 달래야 하는지.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은 조만간 온라인 중계를 통해 또 한 번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성폭행이나 큰 소리 등에 트리거가 없는 사람들이라면, 꼭 한 번 관람해 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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