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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 Apr 27. 2021

뮤지컬 <미드나잇> 과 심리적 이기주의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누구나 악마라는 말에 당신은 동의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때론 인간이길 포기한 듯 보인다. 뮤지컬 <미드나잇> 은 인간의 탈을 쓴 8명의 존재들이 등장한다. 신기하게도 이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맨, 우먼, 비지터, 그리고 4명의 플레이어로만 나타날 뿐이다. 뮤지컬 <미드나잇> 은, 당신의 옆집. 혹은 어제. 어떤 미래에서 일어났을 법한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배경은 아제르바이잔. 1937년이다. 1937년 아제르바이잔은 어땠을까? 소비에트 연방이 아직 존재할 시기였고, 아제르바이잔은 1922년 소련에 가입했으니 37년 경에는 미하일 칼라닌이 국가 원수였고, 당의 총수가 스탈린이었을 것이다. 이 가입의 이유가 스탈린에 의한 강요였다는 이유를 들어 90년에 탈퇴할 때까지, 아제르바이잔이 당시 어떤 분위기였을지 우리는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1937년 12월 31일, 아내(이하 우먼)은 남편(이하 맨)을 기다리며 불안에 떤다. 대대적인 숙청이 있던 해. 그가 혹시 죽지 않았을까 걱정하지만, 맨은 그저 우먼을 위해 암시장에서 미국의 재즈 레코드를 사왔을 뿐이었다. 이들은 ‘프로텍션’, 맨이 부여받은 면죄부에 기뻐하며 샴페인을 따려는 순간, 누군가가 초대를 청한다. 문을 두드린 사람은 ‘비지터’. 방문자다. 



“엔카베데*다, 문 열어!”


강압적인 말에 결국 부부는 문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고, 불청객은 자연스레 그들의 가장 사적인 공간, 집으로 침투한다. 비지터는 마치 처음부터 알고 있고 듣고 있었던 사람인 것처럼 그들의 비밀을 밝히고, 그들에게서 두려움을 먹고 자라는 괴물처럼 점점 그 존재감이 커져 간다. 



사실 이 작품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는 늘 고민이 컸다. 어떤 작품이든 스포일러라는 것이 존재하는데다가, 이 작품은 내용을 자세하게 소개하기 시작하는 순간 작품의 매력을 상실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재 이 작품은 혜화 TOM에서 5월 30일까지 공연 예정이고, 지방에서도 공연을 할 예정이다. 따라서 이전 글처럼 모든 줄거리를 하나하나 샅샅이 이야기 했다가는 자칫 작품에 대한 기대감을 떨어뜨릴 수 있다. 또, 추가적으로 첨언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 본 글에서는 내용에 대한 상술을 최대한 배제한 상태이지만, 뮤지컬 <미드나잇>은 유혈에 대한 묘사(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잔인하고 폭력적인 장면들이 일부 있다. 이 장면들이 절대 ‘쓸데없다’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시각과 청각에 민감한 사람들은 관람을 권하지 않는다. 최대한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 선에서, 또 잔인하지 않게. 거리를 두고 글을 쓰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작품의 해석 측면에서 불가피한 정도로만 내용을 설명하며 이 작품을 어떻게 도덕적, 심리적 이기주의로 바라볼 수 있는지를 제언하도록 하겠다. 



작중 비지터는 ‘나는 어디에나 있었다.’ 라고 말한다. 이는 욥기 1장 7절과 유사한 점이 있다. 영화 <검은 사제들>에도 나와 아주 유명한 대사. 


“우리는 이곳에도 있었고 저곳에도 있었다. 우린 두루 돌아 여기저기를 다녀왔다.**” 


그렇기에 비지터는 악마로도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다. 악마는 초대를 받아야 들어올 수 있는 존재라는 측면에서 악마성, 혹은 인외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비지터의 인외성은 그 뿐만이 아니다. 비지터는 정말 어느 곳으로든 갈 수 있고, 보이지 않는 미지의 존재들 –그러나 분명 그 공간에 존재하고 있는 플레이어들을 조종한다. 꼭 자신의 수족인 것처럼 말이다. 이 역시 성경의 악마 중 하나인 레기온이라는 악마처럼, 개체 수가 다양한 것을 하나로 통칭하는 악마를 상기시킨다.*** 그 외에도 뮤지컬 <미드나잇> 의 가사는 애초부터 ‘회개할 시간에 선악과 두 개 먹어’같은 가사로 성경을 암시하는 구절이 종종 나온다. 정말로 비지터는 악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유도하는 것처럼 말이다. ****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비지터 = 악마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무신론자이기 때문일까. 우리가 악마라는 존재를 어떤 식으로 정의하느냐에 따라 비지터라는 존재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는 달라질 것 같다.



조금 거창한 질문을 하나 해본다. 악마는 어디에서 왔을까? 만약 신이 만든 것이라면 신은 악을 만들어낸 것이며, 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면 신은 전지전능한 것이 아닐 테다. 무신론자인 나에게 악마는 자유의지가 만들어낸 죄책감이다. 그래서였을까. 비지터가 인간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죄책감의 형상처럼 느껴졌다. 죄와 타락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라고 하면 ‘죄책감’일 테니까. 죄책감은 영원하고 사람을 죽게 만들 수 있을 정도로 폭력적인 방향으로 발현되기도 한다. 죄책감은 먼지처럼, 바닥에 낀 곰팡이처럼. 우리 마음 속 어디에나 존재하고, 그것들이 한 데 뭉쳐진 것이 비지터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그것을 외면하는 자에게도 그는 찾아온다. 사람들은 그 죄책감에서 도망가고 싶어 한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에게 최선이 된다고 생각하는 행위를 한다는 이론,‘심리적 이기주의’가 등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심리적 이기주의란 근본적으로 우리의 행위는 이기적인 동기가 부여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것이 도덕적이든 부도덕적이든 간에 말이다. 모든 것은 사실 ‘나’를 위한 행위라는 것. 작중 –정확히 말하자면, 비지터가 밝히는 그들의 비밀이니 외부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우먼과 맨이 저질렀던 모든 일들은, 상대방을 위해서라는 말로 포장된 자신을 위함이다. 심지어 스스로를 속여 가면서까지 말이다. 



이들을 비난한 사람이 있을까. 공포 정치 사회에서 인간답게 사는 것이 가능할까? 정말 단 한 번도 자신을 속여본 적 없는 사람이 있을까? 리처드 도킨슨의 <이기적 유전자> 에서도 가장 이타적인 행동이 가장 이기적인 행동이라고 한 적 있지 않던가. 이런 이기주의를 비판하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위의 동기로 삼는 많은 감정들은 사실 본질적으로 이기심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이기심에 기반해 행동한 행위 중 결과적으로 타인에게 피해를 끼쳐 죄책감이 생겼을 경우, ‘자신의 이익과 쾌락, 복리를 추구’하는 사전적 정의*****에 따를 것인지, 혹은 ‘타인의 선까지 우리 행복의 일부로 포함’할 것인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 



지옥 속에서 살면서 인간답게 살기란 정말 힘든 일이다.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기주의적 사고관에서는 타인의 선까지 우리의 행복의 일부로 받아들이기를 권한다. 그러나 맨과 우먼의 행동은 결코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나?’혹은, ‘하지만 나라고 그러지 않을 가능성은 어디에 있지?’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작품이 바로 뮤지컬 <미드나잇>이다. 



어떤 경제학적 관점******에서는 우리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사회의 전반적인 상황을 최상으로 이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지극히 자본주의적이며, <미드나잇>의 배경인 소련의 사상과는 완전히 대비된다. 이 극은 완전히 모순적인, 그러나 그 모순과 부조리에서 생겨나는 의구심으로 하여금 인간에 대한 철학을 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는 입고 있는 옷이 그 인간을 명명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특히 무대 예술에서는 의상이 인물의 캐릭터성을 대변하는 경향을 생각해 볼 때, <미드나잇>에서 작중 인물들이 입고 있는 옷과 이기심을 연관시킬 수도 있다고 보았다. 처음부터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다. 그저 온통 무채색의 옷을 입고 있는 다른 주연들과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우먼만이 온통 빨간 색의 옷을 입고 있어 묘하게 신경쓰였던 것 뿐이다. 그러다 결말을 본 이후, 그제서야 빨간 구두 동화가 생각났다.  빨간 구두를 신고 싶다는 욕망, 그리고 죄책감이 영원히 카렌이 춤을 추게 했고 결국 다리를 잘라야 그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우먼 역시 개중 가장 원색 톤의 옷을 입는다. 자신의 잘못을 계속해서 회피하거나, 혹은 부정하려고 한다. 자신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면서. 



 나는 모든 인간을 좋아한다고 하기엔 속이 좁은 인간이라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종종 많은 사람들이 사람을 굉장히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하는데, 그럴 때마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내가 객관적으로 그리 ‘좋은 사람’은 아님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닥을 보여주지 않는 것뿐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누군가를 싫다고 소리 내어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선하고자 노력한다. 이것은 내가 ‘좋은 사람’이고 싶어 하는 이기심일 수도 있고, 내 마음이 그러고 싶어 하는 이기심일 수도 있고, 나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고 싶다는 욕망일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나를 이끄는 것은 하나다. 



모든 일반적 욕구에도 불구하고 선한 행동을 하고자 하는 의지.     



난폭하고 어이없는 상황 속에서 인간으로 살아가기가 힘든 것 같다. 당장 나에게 위협이 되는 상황들이 뉴스에 떠들썩한데, 어떤 명확한 해결 방법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폭력 집단에 타협하며 순종하기를 선택하거나, 혹은 그저 인간을 비난하며 살거나. 목소리를 내기에 소시민인 자에게는 선택지가 많지 않은 것 같다. 맨과 우먼도 처음에는 그랬을 것이다. ‘나는 이럴 수 밖에 없었어.’라는 말. 그러나 아돌프 아이히만도 명령에 굴종하는 것이 그의 의무였기 때문에 의무에 충실했던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우리 모두는 죄인이지만 동시에 죄인 아니기 위해 노력하는 것 아닌가?



나는 때로 자신에 대한 깊은 회의감을 느끼기도 하고, 상황에 그저 고개 숙이는 것이 익숙한 내가 싫기도 하다. 사람들이 모두 이 상황에 어떤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종종, 어떤 용기 있는 사람을 믿고 싶어진다. 참 희한하게도 <미드나잇>의 결말은 이와 완전히 상이한 – 혹은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끝을 보면 나는 이런 부조리한 인간상 속에서도 결국, 어떤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선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나오게 된다.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은 쉽다. 그리고 나 역시도 그런 사람들을 비난하기에는 타협하는 일이 잦다. 그러나 그 모든 순간에도 불구하고 타협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누군가가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미드나잇>의 결말은, 타협한 자들이 어떻게 되는 가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뮤지컬 <미드나잇>은 혜화 TOM 극장 1관에서 5월 30일까지 공연하고, 지방 거주자 역시 포항에서 관람할 수 있다고 하니, 부족한 글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도덕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작품을 권한다.



* NKVD(이하 엔카베데)는 실제로 그 당시 소련의 내무인민위원회, 즉 대숙청을 상징하는 정치경찰 그 자체다. 우먼이 두려워하는 이유도 옆집 변호사 부부가 엔카베데에 끌려가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 욥기 1장 7절 : 주님께서 사탄에게 물으셨다. "너는 어디에서 오는 길이냐?" 사탄이 주님께 "땅을 여기저기 두루 돌아다니다가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주님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셨다.

***마르코 복음서 5장 9절 :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가 "제 이름은 군대입니다. 저희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를 모티프로 하고 있다. 이브에게 선악과를 먹도록 유혹한 뱀의 이미지. 

*****웹스터 사전 : selfish의 단어 정의 

*******애덤 스미스의 말, 도덕에 대한 이기주의적 접근을 옹호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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