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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 May 11. 2021

뮤지컬 <스모크> 와 라캉의 거울 이론

나는 무엇일까 ?


+ 위 글은 뮤지컬 <스모크> 에 대한 스포일러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뮤지컬 <스모크>를 처음 관람한 것은 아마 올해 초, 날씨가 차갑던 시기였던 것 같다. 나를 많이 도와준 지인이 한 번 보라며 쥐어준 표였다. 최근 많은 작품들이 시놉시스를 읽고도 잘 이해를 하지 못할 정도로 의뭉스러운 점이 많은 편인데, 사실 <스모크> 역시 마찬가지다. 죽고 싶어 하는 시인 초와 바다를 보고 싶어 하는, 그림을 그리는 해, 이 둘이 그 티켓을 구하기 위해 미츠코시 백화점의 딸인 홍을 납치하게 되고, 이 셋이 심리적 격전을 벌이며 일어나는 사건의 진상…. 이라고 하면 스릴러극이라고 느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뮤지컬 <스모크> 는 추리나 스릴러와는 거리가 멀다. 초반부에야 그렇게 느낄 수 있을 법한 요소가 충만하다. 왜냐하면 극의 내용 자체가 갑작스러운 범죄에서 시작되고, 그 범죄를 일으키게 된 이유와 초와 해의 관계, 홍과 초의 관계에 집중하며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반전들, 대화를 통해 밝혀지는 진실들과 마지막 결말에 비추어 보면, 이 작품 내의 모든 대사들과 이야기들은 시인 이상의 거울 속 자아와 유사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각자의 이야기를 확인해 보면 그들의 삶은, 이상의 삶을 어느 정도 양분하고 있는 듯하다.


해海

 어린 시절, 친부와 친모를 떠나 백부의 집으로 입양을 왔다는 점. 그림 그리기 좋아한다는 점은 이상의 어린 시절을 닮아 있다. 이상 역시 백부의 집으로 입양을 왔으며, 애정 어린 보살핌을 기대할 수 없는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이상의 본명은 김해경(金海卿)인데, 여기에서 해海의 이름을 따오지 않았나 싶다. 


초超

 꾸준하게 이 세상과 삶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으며, 기회가 된다면 당장이라도 죽어버리겠다고 말한다. 이상의 작품은 죽음에 대한 불안감, 삶에 대한 허무의식이 남아 있다. 존재론적, 인식론적 고민을 하면서도 꾸준히 ‘죽음’을 바라, 동료 작가에게 동반자살을 권하기도 하지 않았나. 이상의 사고방식, 치열하게 살아보려고 했지만 자주 좌절당하고 패배했던 지난한 시간들이 그의 작품에 녹아 있다. 그리고 초라는 인물은 그 삶 앞에 홀연히 내던져져 패배 속에 짓눌리는 인물이다. 죽음을 강렬하게 갈망하는 김해경의 어느 자아라고 한다면 이해가 쉬울까. 그의 이름인 초월하다 초超는 미쓰비시 백화점에서 날개를 펴고 날아가고파 하는 한 남자와 유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홍紅

 초가 좌절과 패배,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죽고 싶다고 말하는 자아라면 홍은 끝없이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분투하는 자아다. “싸워야지 한 번도 그런 적 없잖아.” 하고 초를 매섭게 다그치는가 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기 위해 해와 초를 간절히 다독이는 존재이기도 하다.  



자아가 이렇게 분리될 수 있을까? 뮤지컬 <스모크>를 보면 다중인격 아닌가 싶을 수준으로 해, 초, 홍이 원하는 바가 다르다. 그러나 이 셋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을 추구한다는 것이 내 감상이었다. 이상의 작품 창작 의식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위트, 패러독스, 아이러니’라고 생각하겠지만, 그 이전에 그가 처음 썼던 ‘12월 12’라는 초년작을 읽으면 이런 의식은 찾기가 어렵다. 내면 의식이 도드라지게 드러나는 이 작품에서 이상이 근본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했던 창작 방식은 바로 ‘대칭점 찾기’이다. 



대칭은 한 점, 직선, 평면을 사이에 두고 같은 거리에 마주 놓여 있는 경우를 의미하며,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평행을 유지하고 마주하는 것이 대칭이다. 이상은 “대칭점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인간의 모습은 영점에 가까운 인간이다”라고 말한 적도 있다. 이상이 아무리 죽음을 두려워하고 불안해한다 해도 죽음을 강렬하게 바라면서, 또 삶을 강하게 바라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작품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이상의 역설적인 사고가 뮤지컬 <스모크> 에 영향을 준 것이라면, 그의 내면의 자아가 거울의 표상으로 드러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앞서 말했듯 뮤지컬 <스모크>의 주인공들은 이상의 ‘거울 속 자아’처럼 느껴진다고 언급했는데, 그만큼 작품 내에서 거울이 깨지는 이미지나 거울 속의 거울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라캉의 ‘거울 단계 이론’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다. 



라캉은 “주체가 스스로를 발견하고 제일 먼저 느끼는 곳은 타자 속에서다.” 라고 말한 바 있다. 자아는 외부의 세계에서 가장 먼저 형성되고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거울 단계와 이어진다. 라캉은 거울 단계를 “어린아이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신체 이미지를 매개로 해서 정체성을 형성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외적 세계를 구성하는 단계”라고 설명한다. 실제 연구 기록에 따르면 생후 6∼18개월의 영유아는 처음에 거울에 비친 모습을 외부 대상과 구별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이는 거울 속 자신을 인식할 수 있게 되고, 그것을 붙잡으려 하며 떠날 줄을 모른다.



이런 영유아 시기의 거울 단계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심지어 사람이 죽을 때까지도 자아 형성에 있어 기본적인 근간이 된다고 평가했다. 거울 단계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우리에게 사실 하나의 고정된, 절대적인 자아는 없다는 것이다. 스스로의 이미지, 곧 자아는 끊임없이 우리의 뇌 속에서 재생산되면서 고착화되는데, 재생산 과정에서 ‘거울 속의 나’라는 이미지에 맞추어 스스로의 이미지를 재단하게 된다. 



왜 스스로의 이미지를 거울에 비춰보면서 재단할까? 그리고 그건 나의 것이 아닌가? 물론 ‘내 특성’이 가지고 있는 외적 모습과 표정, 감정 외부로 가시화된 이미지는 내 것이기도 하지만,  거울 속의 내 모습은 “주체의 나르시시즘*이 투사된 타자적 대상”이다. 아주 사소한 예를 들어보자.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실제 우리보다 7배 더 아름다워 보인다는 이야기와, 어떤 카메라로 찍어야 실제 나의 모습에 더 가까운가에 대한 갑론을박은 현재까지도 인터넷에 넘쳐난다. 즉, 우리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완벽한 나로 인정하고, 다른 매체를 통해 바라본 나의 모습에는 부정적 평가를 내리게 된다. 그러면서 진짜 나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통해 처음에는 행복감을 느꼈다면, 그 고취를 통해 이루어진 허구적 구축은 결국 나를 불행하게 만든다. 또 타인의 시선과 나의 엄정한 판단 아래에 자아를 구성하기 때문에 매우 자기 소외적인 자아 형성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우리가 자신을 확인할 수 있는 모든 대상은 우리가 아닌 다른 존재, 타인을 통해서다. 거울을 바라보는 나와 거울 속의 나, 그리고 거울 바깥에 있는 다른 존재들을 통해 ‘나’의 존재를 인정받고, 인간은 그때부터 주체로서 존재할 수 있다. 심지어는 나 그 자체도 타자가 될 수 있어서 우리는 종종 외롭다. 라캉이 전하고자 했던 말은 제법 쓸쓸하게 들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더 나은 단계로 나갈 수 있지 않을까? 늘 그렇게 스스로를 잣대 위에 얹어 두고 거울을 보며 우리의 모습을 확인해야 한다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다행스럽게도 뮤지컬 <스모크> 에서는 그 해답을 제시한다. 홍이 하는 이야기 덕분이다. 작품 내에서 그는 ‘보따리’에 대한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해'에게 전달한다. 그것은 어린 이상, 아니 김해경이라는 소년이 버리고자 했던 고통과 슬픔의 번민이다. 그 소년은 쥐고 있던 보따리를 어떻게 할까, 하다가 결국 그것을 어디 두고 왔다는 이야기. 우리는 그 보따리가 없으면 살 수 없음을 이미 알고 있다. 해는 보따리를 잃어버린 김해경의 자아 그 자체다. 이상은 끊임없이 자신의 자아를 거울에 투영하며 ‘진정한 자신이 무엇인지’,그리고 죽음과 생 사이에서 끊임없이 투쟁하며 살아왔다. 죽고자 했던 것은 초, 살고자 했던 것은 홍이라는 점이 거울 속 분열된 이상의 자아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그러나 죽고자 하는 마음은 강렬한 삶의 의지에서 비롯되지 않는가. 그렇기에 홍은 강할 수밖에 없다. 판도라의 상자 그 가장 마지막에 남아 있는 희망은 연약하기 때문에 마지막이 아니라, 그 무거운 생의 고통을 견뎌내고 있는 뚫리지 않는 바닥이었기 때문이다. 죽고 싶어 하는 것도, 살고 싶어 하는 것도 모두 김해경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보이는 죽음과 생,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소년이었던 초, 홍, 해의 분리된 이미지에서 벗어나 ‘김해경’이라는 하나의 완결된 존재가 된다는 것. 그 방법은 바로 더 이상 스스로를 판단하지 않고, 스스로를 타인의 시선에 맡기지 않고, 그저 어떻게든 살아나가는 것. 나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투쟁 끝에 결국 분열된 거울을 깨버리고 자기 자신에게로 나아가는 김해경의 모습을 보면, 우리도 내면의 거울을 깨부수고 스스로에게 날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같다. 물론 그렇게 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 역시 사는 매 순간이 늘 투쟁이지 않은가. 사는 것이 싸움이고 싸우면서 살아간다. 그 거울을 깨지 못해도 계속 거울을 두드리다 보면, 언젠가는 그 어떤 집착과 갈애도 사라지지 않을까, 그렇게 추측해 본다.     



뮤지컬 <스모크> 는 더블케이필름앤 씨어터에서 후원 라이브로 다시 만날 수 있다. 

https://blog.naver.com/doublekfnt16/222322466347                              

 


 김석, <프로이트&라캉 - 무의식에로의 초대>

 김민수, <이상 평전> 

 강용운. (2003). 이상문학 생성의 기원. 한국학연구, 18(), 171-194.

 김윤식. (2010). 내가 살아온 이상 문학. 한국현대문학회 학술발표회자료집, (),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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