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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 May 18. 2021

뮤지컬 <브라더스 까라마조프>와 신 앞에 선 단독자

앞서 밝혀두는 글.

 뮤지컬 <브라더스 까라마조프> 는 아직까지도 작가 김경주의 대필 논란에 대해 명확히 해명한 적이 없으며, 저는 문단 내 위계에 의한 폭력에 반대합니다. 이런 2차적 소비가 윤리적으로 옳은 것인지에 대해 꾸준히 갈등하고 있습니다. 우선 적어둔 원고를 업로드 합니다. 판단은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의 손에 맡기겠습니다. 질타는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제작사는 작가 김경주의 대필 논란에 명시적으로 해명할 것을 촉구하며 이 글을 시작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들어본 사람은 많아도, 읽은 사람은 많이 없다. 그야 매우 당연하게도 고전은 읽히지 않기 때문에 고전이기 때문이다.  세 권이나 되는 분량의 압박과, 러시아 문학의 생소함은 분명 이 작품의 진입장벽일 테다. 뮤지컬 <브라더스 까라마조프>는 원작과 다른 점이 있기는 해도, 다른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을 인용하며 새로운 고전의 재창작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신’에 대한 이야기가 대학로 많은 곳에서 다루어지는 만큼 신을 작품 내에서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지는 언제나 내게 중요한 사안이다. 신을 사랑한다면 그 이유가 신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이해될 수 있을 만큼 보편타당해야 할 것이고 신을 믿지 않겠다면 그 이유 역시 수긍할 수 있을 정도로 논리정연해야 할 것이다. 지금부터 나는 <브라더스 까라마조프> 내에서 신이 다루어지는 방식에 대해 키르케고르의 신 앞에 선 단독자 개념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원작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나오지만, 뮤지컬에서는 까라마조프 가 사람들만 나온다. 나머지 사람들은 죽거나, 혹은 이름으로만 언급될 뿐이다. 원작에서는 몇백 페이지를 할애하는데도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원작에서는 표도르가 얼마나 추악한 인물인지 1권을 전부 할애하여 묘사하고, 그에 대비되는 조시마 장로라는 인물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지만 뮤지컬이라는 특성 상 제한된 시간이 있기 때문에 ‘표도르의 죽음’바로 그 이후를 다루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누가 아버지를 죽였는가.’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 



아버지를 죽이고 싶어 하는 아들이라는 개념은 제우스와 크로노스, 오이디푸스 신화를 거쳐 고전에서 꾸준하게 등장하는 개념이다. 심지어 같은 러시아 문학가인 트루게네프의 <첫사랑>에서도 아버지에게 사랑을 빼앗겨 고뇌하는 아들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던가. 심지어 철학마저도 아버지 살해의 역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선대의 철학을 계속해서 비판하며 성장하기 때문이다. 그 철학을 완전히 부정하는 일까지 없잖아 있다. 그 이전까지의 철학이 플라톤에 대한 주석이었다면, 주정주의 철학의 계보를 잇는 자들은 플라톤을 거부하는 것과 같다. 프로이트는 원시적으로 아버지의 자리를 탐하려는 욕구를 아들들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아버지가 막상 죽은 이후에는 싸움에 대한 두려움으로 아버지의 자리를 비워둔다고 했다.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게도 아버지를 죽여야 하는 이유는 분명히 존재하며, 아버지의 죽음 이후의 또 다른 싸움들은 인간답게 살고 싶어 하는 선의지와 방탕한 삶의 태도, 아버지를 죽이고 싶어 하는 존속 살해에 대한 욕구가 행동력을 가진 실체의 대립으로 이어진다. 즉, 욕구와 선의지의 칸트적 대립이라고 볼 수 있겠다. 결국 그 대립은 ‘인간답게 살고 싶다’라는 갈애에서 비롯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싶어 하는 욕구는 어디에서 비롯할까. 그것 역시 인간에 대한 갈망이다. 인간의 탈을 쓴 개라고 스스로를 자조하는 첫째 아들 드미트리는 표도르의 첫 번째 부인이자 자신의 어머니에게 물려받아야 할 유산이 있었으나, 표도르가 이를 소유하고 있는데다가 자신이 사랑하는 그루첸카 역시 표도르가 유혹하고 있어 꾸준히 마찰하고 있는 관계다. 드미트리의 약혼녀는 그루첸카가 아닌 카체리나인데도 말이다. 이반은 ‘인간이길 바라면서 짐승처럼 사는’아버지를 혐오하고 경멸하지만 경제적 이유로 아버지와 얽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그는 ‘대심문관’ 이라는 글을 써 신이 없다고 모두를 설득하려 한다. 인간에게 신이 자유의지를 주었기 때문에 악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이는 중세 프로테스탄티즘에서 이미 존재하는 논리이다. 악은 선의 결여 상태로, 어떠한 실체가 없고 인간의 자유 의지가 과하여 생긴 상태라고 정의한 것 말이다. 이반은 한 차원 더 나아가, 만약 자유의지를 통해 인간이 신을 믿지 않으면 지옥으로 떨어지고 소수의 사람만이 신을 믿어 천국으로 가게 된다면 신은 인간에게 왜 자유 의지를 준 것이냐고 묻는다. 그저 선택받은 사람만을 구원하는 것이 과연 종교인가. 결국 중요한 것은 의지이고, 모든 것은 따라서 이해될 수 있다고 하는 이반의 사상에 강하게 물든 것이 스메르쟈코프다. 스메르쟈코프에 대한 원작의 서술은 다음과 같다.   


   

“화가 크람스코이의 그림 중에 명상하는 사람이라는 뛰어난 그림이 있다. 그것은 겨울 숲을 묘사한 것으로, 그 숲 속에 길 잃은 작은 몸집의 농부가 다 떨어진 외투를 입고 짚신을 신은 모습으로 홀로 고독 속에 서 있다. 그는 그렇게 서서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무런 구체적인 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저 멍하니 ‘명상’에 잠겨 있는 것이다. (중략) 그렇지만 그가 명상 중에 받은 인상은 그의 가슴 속 깊은 곳에 간직될 것이다. 이런 인상들은 그에게 소중한 것으로, 그는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것들을 마음속에 쌓아 올리게 될 것이다. 물론, 왜 그러는지 무엇을 위해 그러는 지 알지 못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여러 해 동안 그런 인상들을 쌓아 올리다가, 결국에는 모든 것을 내던지고 영혼의 구원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날 지도 모르고, 혹은 갑자기 동네에 불을 지를 지도 모르며, 어쩌면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저지를 지도 모른다.”   

   

스메르쟈코프가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나거나 동네에 불을 지르도록 어떤 인상을 쌓게 도와준 것은 이반의 사상이었다. 스메르쟈코프는 조금씩 이반의 안경을 끼고 그의 시각으로 세상을 흡수했다. 알료샤와는 다르게 말이다. 알료샤와 이반은 같은 배에서 태어났고, 둘 다 신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것은 같아도 그 발현이 아버지에게서 도망가 수도원에서 신을 찾는 것과 신과 연락이 끊긴 지 오래 되었다며 스스로 수화기 들기를 거부하는 것으로 나뉜다. 이 둘 모두 신을 간절하게 믿고 싶었을 것이다. 알료샤가 아버지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새로운 아버지를 찾았던 것처럼. 이반은 알료샤에게 “만약 신이 있다면, 한 장군이 아이가 사냥개에게 돌을 던졌다는 이유로 아이의 어머니 앞에서 아이를 벗겨 사냥개들에게 쫓기게 해 죽였을 때 그 장군을 구원해 줄 것이냐” 고 묻는다. 참회가 과연 죄의 무게를 완전히 지울 수 있냐는 질문이자, 동시에 의지가 행동력에게 죄를 저지르게 했을 때 그것은 죄인가 아닌가에 대한 질문이다. 법적으로는 이런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 죄인 것은 맞으나 이반의 이런 질문은 사실‘무신론자’라면 하지 않을 질문이다. 오히려 끔찍하게 신을 사랑하고 믿고 싶었던 사람이 할 법한 말이라면 모를까. 알료샤는 끝없이 묻는 이반에게 “믿음에는 증거가 필요하지 않다.”라고 말한다. 성스러운 인물 조시마 장로의 시체는 썩어가고, 평생을 짐승처럼 살아온 아버지의 시체는 썩지 않는 것을 보며 아버지가 했던 말을 떠올렸을 테지만 말이다. 


“만약 내가 지옥에 가게 된다면 지옥에 있는 갈고리는 누가 만든 것이지? 지옥에도 대장장이가 있나? 지옥은 깊은 지하인데 그럼 갈고리는 어디에 매달지? 하늘에? 그럼 난 천국에 가는 것이냐?”



모든 아들들은 아버지를 어느 정도 양분하고 있다. 이반의 사고 방식이 완전히 표도르의 것에서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알료샤가 아버지에게 완벽하게 벗어났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료샤는 자기 몸 안에서 흐르는 까라마조프의 피를 부인하며 신에게 다가려고 애쓴다. 키르케고르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무언가에 대해 무언가를 아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사실 키르케고르를 인용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키르케고르 그 자신이 단호한 명제로서 실존을 설명하지 말고, 직접적인 의사소통 대신 이중 성찰적 의사소통, 즉 어느 정도 자유로운 텍스트의 이해를 통해 스스로 해석하고 독자가 그것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어쩌면 자유의지와 연관되어 있지 않나 싶다. 어떤 책을 읽고 그 나름대로 스스로 이해하는 것 말이다. 키르케고르는 우선적으로 우리의 삶에 대한 태도가 세 가지로 나뉘는데 각각 심미적, 윤리적, 종교적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심미적 단계는 삶에 관여하지 않고, 아름답고 숭고함을 추구할 뿐이며 특권적인 동시에 절망적이다. 반면 윤리적 인간들은 통제할 수 없는 모든 상황들에 대해서도 모든 것에 책임을 지기로 선택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어떤 숭고한 목적이나 환상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기 의지로 삶을 수용하겠다는 의미에서 그러한 삶의 태도를 고수하는 것이다. 언뜻 칸트와 유사하지만 어떤 ‘도덕원칙’에 의해 인간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정말 ‘나 스스로의 선택’이라는 점이 다르다. 그리고 종교적 인간은 이들의 모든 태도에서 벗어나, 미지의 세계로 뛰어든다. 심미와 윤리, 윤리와 종교 사이에는 상하고저의 질적 차이가 발생하는데 실제적인 윤리적 태도에서 벗어나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도약하는 장소도 알 수 없는 종교적 도약은 고유한 개별자적 삶에서 벗어나 진리 속에 존재하는 이와 관계를 맺기 위해 살아간다. 



이반은 키르케고르를 광신이라고 모독할 수 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맹목적 광신이 아니다. 키르케고르는 이반에게 분명 이렇게 조언할 것이다. “젊은이, 세계와 우리의 관계는 주관적 진리지 객관적 진리가 아니라네.” 라고 말이다. 신은 어떤 객관적 진리인 대상이 아니라, 주관적 진리인 살아있는 존재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늦게서야 과학과 현실, 실제에 대한 추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이런 과학이나 객관으로서의 진리보다 주관적 진리의 중요성을 논설한다. 기독교 신에 대한 독실한 기독교도의 태도와 우상에 대해 독실한 이교도의 태도가 다른 것인가? 아니면 기독교도가 기독교 신에 행하는 실존적으로 거짓된 기도가 독실한 기독교도의 태도와 같은 것인가? 인간의 삶은 기본적으로 모순이다. 신앙은 언제나 인간에게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이런 인간이 극복할 수 없는 모순을 종교적 삶에로 도약하게 하는 것은 열정적 신앙이며, 그것은 역설인 동시에 도약이다. 모순 그 자체를 계속해서 풀어보려 하며 진리에 다다르려고 했던 이반 역시 결국 신을 강하게 믿고 싶었던 열망에 의해 그저 신 앞에 나약한 자였다는 것을 키르케고르는 위로할 것이다. 이반은 키르케고르의 논설에 근거가 없다는 것을 들지라도 말이다. 



신이란 대체 무엇일까. 만약 신이 있다면 우리를 보고 있기는 한 것일까? 신을 믿었던 내 친구들이 모두 신을 믿고 싶어도 현재의 상황을 보며 우리의 신이 우리를 보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신을 믿지 않는 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나아질 거란 희망을 가지는 것이 과연 신앙의 문제인지. 



믿는 신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어떤- 알 수 없는 커다란 주관적 진리 앞에 선 단독자다. 그 거대한 모순적 진리 앞에서 관계 맺기를 거부할 것인지, 수용하고 뛰어들 것인지는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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