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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렁이에게
고마워하는가?

50 넘어 고작 그림일기 씁니다

by 고작









봄비가 많이 내리던 며칠 전 어느 날,

고1 언니는 학교에서 여의도로 현장학습을 갔다

밤 8시가 넘었는데도 연락이 없어 전화를 했더니

청명역에 내려서 걸어오고 있다고 했다

비는 더 많이 내리고, 전화를 끊은 지 1시간이 지났는데

고1 언니는 도착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나? 불안한 느낌이 확 밀려오는 그때,

고1 언니에게서 전화가 다시 왔다

"아빠~ 아빠 무서워~ 엉엉엉 꺅!"

찢어지는 비명소리와 울고 있는 딸의 목소리가

전화기를 통해서 들리는 순간,

나는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돌고, 등줄기가 마비되고,

순간 나의 혈압은 터질 것 같이 치솟았다

교통사고? 폭행? 납치?...

나는 분명 무슨 큰 사고가 났음을 직감했다



나는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그래 ~ 왜? 무슨 일이야? 천천히 말해봐 괜찮아~"

"아빠~ 엉 엉 엉 너무 무서워"

"그래 괜찮아 무슨 일인데~ 울지 말고 말해봐"

"아빠~ 엉엉엉 여기, 여기에 엉엉엉"

"지렁이가 너무 많아"

"엉엉엉 지렁이가 지렁이가 너무 많아서 갈 수가 없어"

"뭐 지렁이?"

나는 지렁이라는 말에 짜증이 확 밀려와 소리쳤다

"야! 야! 그럼 뒤로 돌아서 오면 되잖아!!"

"아빠~ 뒤에도 있어 너무 많아 엉엉엉~"

"지렁이 때문에 집에 못 오는 거야?"

"아빠 나 좀 데려가 줘 아악~ 이리 기어와~"

"아우씨~ 어딘데?"

"버스정류장에서 내려가는 아파트 계단~ 빨리 와 무서워~"



고1 언니는 계단에 서서 울고 있었다

계단 밑까지 가서 야! 소리를 치니 나를 보고

더 크게 울었다

"아빠 아빠 지렁이가 너무 많아~ 엉엉엉"

"아유 진짜~ 손잡아!, 지렁이가 뭐가 무섭다고, 눈 감아!"

내 손을 꽉 잡은 고1 언니의 손은 울어서 땀이 났고,

통통한 손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넌 초딩도 아닌데 지렁이가 그렇게 무섭냐?"

"응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

"물지도 않고 땅 파고 착한 일 하는데 뭐가 무서워?"

"지난번에 밟았는데 엄청 징그럽게 꼬불꼬불 막 움직였어"

"이제 눈떠 지렁이 없어"

어느새 눈물은 그쳤고, 한심해도 너무 한심한데, 좀 귀엽기도...

"집에 들어가면 따뜻한 물에 샤워해" "응~"

샤워하고 나온 고1 언니는 언제 울었냐는 듯이

서울 여의도 갔다 와서 좋았다고 이야기를 했다

나도 오랜만에 고1 언니의 손을 꼬옥 잡을 수 있어 좋았다,

우리는 지렁이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우리는 지렁이에게 고마워하는가?>






<우리는 지렁이에게 고마워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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