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있던 그곳에서, 너의 몸을 닮은
움푹 팬 구덩이를 본다
너의 무게가 누르고 간 자리
너의 향기조차 남아있지 않은 그곳에
밤의 기억들이 깨어있기를 기대하며
나는 그곳으로 내려간다.
너는 하늘을 올려보며 과거를 쌓아갔다
그 과거들은 너를 짓눌렀고 그런 너를 보며
나는 밤 끝으로의 여행을, 무한한 자유를 느꼈다.
네가 떠난 이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
향기마저 주섬주섬 챙겨 가던 너는
기어코 모든 흔적에 칠흑 같은 밤을 덧칠했고
그 징벌 속에서 나는 손을 더듬으며
주위를 맴돌 뿐이었다.
모든 것이 밤으로 덮인 이 숲길 위에는
아무 것도 적히지 않은 백지 한 장만이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은 채로
그저 던져져 있을 뿐이고
나는 그 백지 한 장을 쥐고
너를 닮은 그 무덤 안으로 들어간다.
그 안에서 만큼은
존재하던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하지 않는 것이 살아있고
시간은 압축되지 않으며
순간은 사라지고
영원하게 팽창하여 걷잡을 수 없게 커져만 간다
나는 그곳에 쭈그려 앉아 다음 징벌을 기다리며
깨어있음을, 고독을 느낀다.
아침의 노을이 찾아오면 나는 이 무덤을
원래의 주인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대지를 갉아먹으며 살아가는 존재들에게
이 자리를 돌려주어야 한다.
붉은 점 하나가 내 얼굴을 찌르고
그 부끄러움에 눈을 뜨지 못한 채로
내 짐들을 챙긴다
그리고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기어간다
그곳에서 차가운 도로 위를 핥아대며
짓눌리는 것에 쾌감을 느끼는 바퀴벌레처럼
나는 세계의 어긋남을 바라보지만, 어째선지
알제의 그 청년처럼 저항을 떠올릴 수 없다.
지금, 이 정오의 순간에
오직 내가 떠올리는 것은
네가 떠난 그 자리 위에 남겨진
검은 백지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