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의 밤 (1)

by 곡도




모퉁이를 돌아 그녀는 발걸음을 서두른다. 그녀의 어깨가 조금씩 들썩인다. 뒤에서 보면 꼭 어깨춤이라도 추는 것 같다. 좀 경박해 보이지만 실은 그건 굽 높이가 10cm가 넘는 구두 탓이다. 광택이 나는 짙은 청록색의, 발목이 날씬해 보이는 메리제인풍의 새 구두는 그녀의 마음에 쏙 든다. 그녀는 다시 어깨를 들썩인다. 오랜만에 멋을 내고 나왔으니 조금은 뻐겨 보아도 좋을 것이다. 밤거리의 불빛들도 이토록 화려하지 않나. 마치 이 도시라는 무대의 주인공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는 보란 듯이 검고 긴 머리카락을 뒤로 쳐올린다.

도시의 밤, 밤의 도시, 정확히 어느 쪽이 맞는 표현인지는 모른다. 어쨌거나 밤과 도시는 하나의 짝처럼 잘 어울린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도시가 빠진 밤은, 그리고 밤이 빠진 도시는 더 이상 밤도 아니고 도시도 아닌 것 같다. 밤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새까만 고층 빌딩들, 값비싼 귀중품처럼 빛나고 있는 간판들, 길거리 음식에서 풍기는 설탕 타는 냄새, 발작적으로 울리는 자동차 경적소리, 바닥을 굴러다니는 색색가지 쓰레기들, 서늘해 보이는 쇼윈도의 조명들, 이리저리 기묘하게 휘감기는 음악들, 이 모든 것들이 뒤섞여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면 드디어 도시의 밤이 시작된다. 아, 그리고 자신의 절박함을 축축하고 나른한 눈빛으로 감추고 몰려드는 사람들의 행렬.

그녀는 자신이 - 말하자면 일종의 - 밤의 시민권자라고 생각한다. 낮은 어쩐지 부끄럽다. 무언가 부족하고, 어색하고, 아무튼 적절하지가 않다. 예전에는 낮이 산자들의 세상이고 밤이 죽은 자들의 세상이었지만, 이제는 낮이 죽은 자들의 세상이고 밤이 산자들의 세상이다. 해가 지고 나서야 그녀는 비로소 자신이 숨을 쉬기 시작한다고 느낀다. 하루 중 처음으로 눈을 뜬 것처럼 눈꺼풀을 깜빡이며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낮 동안의 일들은 어느새 몇 년 전처럼 희미하다. 그것은 이미 죽은 세상이다. 그녀는 키스를 받고 막 긴 잠에서 깨어난 공주처럼 할로겐 불빛 아래서 얼굴을 붉히며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해 낸다. 그리고 가장 좋은 옷을 차려입고 밤거리로 뛰어나오는 것이다.

그녀는 오늘 그녀의 피부색에 가까운 옅은 연분홍색 플리츠 원피스를 입었다. 목둘레 칼라가 앞쪽으로 리본이 되어 늘어지는 꽤나 여성스러운 스타일이다. 쉬폰 소재인데다가 이중으로 겹쳐있는 치맛단은 움직일 때마다 위아래로 크게 물결친다. 이런 옷을 입기에는 3월의 날씨가 아직 쌀쌀하지만 그녀는 상관하지 않는다. 한겨울 내내 코트로 몸을 싸매고 있다가 오랜만에 기분을 낸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기 때문이다. 택시에서 내리던 한 남자가 그녀를 향해 미소 짓는다. 그녀는 가늘게 눈웃음친다. 그녀도 자신이 예쁘다는 걸 알고 있다. 밤에는 훨씬 더 예뻐진다는 것도 안다. 그것이 너무나 기쁘고 자랑스럽다.

성큼성큼 구두를 내디디며 그녀는 골목 안으로 들어선다. 골목길을 따라 양쪽으로 크고 작은 술집들과 카페, 음식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어디선가 달콤한 코코아 냄새와 고추장불고기 냄새가 뒤섞여 풍긴다. 익숙한 길인지 그녀는 곧바로 한 주점을 향해 걸어간다. 보라색 간판에 하얀색 글씨가 흘림체로 꼬불꼬불 쓰여 있다. 버지니아. 그녀는 간판을 흘긋 쳐다보며 가볍게 콧방귀를 뀐다. 이름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직접적으로는 버지니아 울프를 나타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자들만의 공간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지만 처녀를 연상시키는 이름이라니, 어쩐지 누군가의 놀림거리가 될 것 같아 귓불이 따끔거린다. 그러나 막상 누군가 그에 대해 농담이라도 한다면 그녀는 기세가 등등해져서 도리어 상대방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말 것이다.

주점은 좁은 입구로 통해있는 지하에 위치해 있다. 그녀는 주점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나무 계단을 따라 내려간다. 전등이 환하게 밝혀져 있지만 높은 구두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다리를 벌벌 떠는 와중에도 노랗게 회칠한 벽을 따라 들려오는 어스름한 음악 소리에 그녀는 미소를 짓는다. 층계를 다 내려온 그녀는 출입문 옆에 걸려있는 커다란 원형 거울에 이리 저리 자신을 비춰본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마스카라와 입가의 립스틱을 꼼꼼히 정리한다. 급할 건 없다. 자신이 들어가야 비로소 쇼가 시작된다는 듯이 그녀는 여유 있게 머릿결을 가다듬는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그녀는 청동빛 페인트가 칠해져있는 출입문으로 다가간다. 출입문 정면에는 보라색과 흰색의 모조 꽃으로 장식된 낡은 화환과 [남성 입장금지]라고 적힌 검은색 현판이 걸려있다. 그녀는 힘을 주어 문을 열어 재낀다. 문이 열리자마자 튀어나온 빠른 템포의 음악이 그녀의 뺨을 얼얼하게 한다. 핑크의 ‘Raise Your Glass’는 오랜만에 외출한 그녀에게 딱 맞는 선곡이다. 그녀는 어깨를 살짝 떨면서 크게 숨을 들이쉰다. 마치 그 음악을 공기처럼 폐 속 깊이 들이마시려는 듯하다. 그녀는 음악의 박자에 맞추어 깊숙이 걸음을 옮긴다. 사방에서 재빨리 자신을 훑어보는 시선들이 느껴진다. 그녀는 일부러 쉬폰 치맛자락을 살짝 잡아 올렸다 놓는다. 치맛단이 파도 같은 잔주름을 그리며 그녀의 늘씬한 다리를 휘감는다. ‘난 오늘 좀 즐길 생각이야. 그러니까 접근해도 좋아.’라는 그녀만의 표시이다. 물론 사람들이 그 뜻을 알아차릴 리 없지만 그녀는 상관하지 않는다. 그저 이런 행동이 즐거울 뿐이다.

기민한 시선들 속으로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기면서 그녀는 친구들을 찾는다. 약속 시간이 40분이나 지났으니 그들은 이미 한잔 걸치고 있을 것이다. 조명이 까무룩한 주점 안쪽에서 마주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는 두 사람이 보인다. 한 사람은 머리를 상투처럼 틀어 올리고 회색 체크무늬가 흐릿한 울 니트에 빛이 바랜 청바지, 목에는 색색가지의 굵은 플라스틱 구슬 목걸이를 하고 있다. 또 한 사람은 비대칭으로 자른 단발머리에 초록색 자켓을 입고 연한 갈색 치마 정장 차림이다. 그녀는 일부러 구두소리를 명쾌하게 내며 그쪽으로 걸어간다.

“지영아, 현정아. 잘 있었어?”

“수미야, 왜 이렇게 늦었어?”

단발머리의 지영이 정색을 하며 새침하게 쏘아붙인다. 그러나 수미가 늦는 건 늘상 있는 일이기 때문에 비난이기 보다는 그저 인사에 가깝다. 현정이 새 잔에 술을 따라주며 수미에게 안부를 묻는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바빠서 정신없었지, 뭐. 무슨 감사가 연달아 나온다잖아. 이것들이 뻑하면 보험회사만 잡는다니까. 2주 동안 꼬박 철야작업 하느라 빠져나올 수가 없었어.”

“그동안 쌓인 게 많긴 많았나 보네. 이렇게 멋을 내고 나온 걸 보니.”

지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수미의 옷감을 만져본다.

“나도 스트레스 좀 풀어야지. 어제 새로 산 옷이야. 어때? 어울려?”

수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치맛단을 양쪽으로 넓게 펼쳐 보인다. 그 모습이 지극히 과시적이라 마치 주점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려는 것 같다. 실제로 주변에 앉아 있던 몇몇 사람들이 그녀를 재빨리 훑어본다. 수미는 매력적이고 그 매력을 숨길 생각이 없다.

“얼마에 샀어?”

“아아, 가격은 물어보지 마. 속 쓰리니까. 그냥 큰 맘 먹고 질렀어. 어때, 괜찮지? 이제 봄인데 너희도 멋 좀 내는 게 어때? 거울 좀 봐. 완전 칙칙하잖아. 특히 지영이 너 말이야. 그 구리구리한 겨울용 재킷은 언제까지 입고 있을래?”

“이게 어때서? 그리고 너도 이 옷이 괜찮다고 했잖아?”

“내가?”

“야, 현정아. 너도 들었었지? 이 재킷이 예쁘다고 저 기집애가 말했던 거.”

“똑똑히 들었는데.”

“정말? 왜 그랬는지 모르겠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걸 겨울 내내 입니?”

“내내 입지 않았어. 너희 만나러 나올 때 좀 자주 입었을 뿐이지.”

“다음에는 나하고 같이 가서 옷 좀 사자, 응? 그리고, 현정아, 너도 좀 꾸미고 다녀. 보육원 교사라고 만날 그렇게 어린애처럼 입고 다닐래?”

“아아, 알았어.”

현정은 히죽히죽 웃으며 대꾸한다. 하지만 불쾌해진 지영은 안주로 나온 마른 과자를 씹으며 짐짓 딴 곳을 쳐다본다. 늘 이런 식이다. 수미는 아름답고 고집 센 여왕이다. 그리고 모두들 그녀에게 오냐 오냐다. 마치 그녀의 외모만큼이나 그녀의 내면도 귀하고 섬세하다는 듯이. 화를 삼키느라 지영의 목이 붉게 달아오른다. 하지만 지영도 수미에게 꼼짝할 수가 없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름다운 외모에는 일종의 권위가 있다. 누구라도 아름다운 얼굴에게 미움 받는 건 견디기 힘든 법이다.

그 때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가 느릿한 곡조로 흘러나온다. 공명하는 따듯한 중저음의 음성이 잠시 그들의 말문을 막는다.

“여기 노래 선곡은 종잡을 수가 없다니까. 락에서 재즈로, 재즈에서 힙합으로, 힙합에서 발라드로, 그러다가 댄스로……. 제멋대로야. 그나저나 여기는 정말 여가수 노래만 나오는구나.”

첫잔을 들이킨 수미가 입술을 핥으며 말한다.

“그게 여기 원칙이잖아. 여자들만의 장소에는 여자들만의 노래만 울려 퍼져야 된다는 거지. 뭐 괜찮잖아? 마치 온 세상에 여자들만 있는 것처럼 말이야. 그게 바로 천국 아니겠어?”

현정이 한쪽 어깨를 으쓱한다.

“여자들만의 천국?”

수미가 눈을 찡긋거리더니 피- 하며 비웃는다.

“그건 우리에게나 천국이지. 다른 여자들에겐 지옥일 걸?”

“아냐, 문제없을 거야. 여자들끼리만 있으면 결국 모두 레즈비언이 될 테니까.”

현정은 말해 놓고 와락 웃음을 터트린다. 하지만 지영은 미심쩍게 고개를 흔든다.

“글쎄. 정말 그럴까? 반대로 생각해 봐. 만약 레즈비언이 남자와 단둘이 무인도에 떨어지면 그 여자는 이성애자가 돼버릴까?”

“당연하지.” 현정이 딱 잘라 대꾸한다.

“당연하다고? 그럼 레즈비언과 게이가 단 둘이 무인도에서 살게 되면?”

지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현정에게 따진다.

“그래도 결국 그들은 사랑에 빠지고 말 걸.”

현정의 표정은 자신만만하다.

“아니, 사랑에 빠지긴 하겠지만, 그 사랑이 진짜 사랑은 아니겠지.”

수미가 중간에서 온건한 답을 내놓는다. 그러나 지영은 수미의 대답이야 말로 가장 난해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에 대한 이런 끝도 없는 말장난들. 사랑, 진짜 사랑과 진짜 사랑이 아닌 사랑, 가짜 사랑과 가짜 사랑이 아닌 사랑,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사랑, 사랑이 아니라고 착각하는 사랑, 의식적인 사랑과 무의식적인 사랑, 공식적인 사랑과 비공식적인 사랑, 그래도 역시 사랑……. 사랑이 이토록 궤변에 가깝다면 우린 대체 무얼 사랑이라고 불러야 하나? 아니, 사랑은 그렇다 치더라도 성정체성은? 사랑조차 궤변일진데 특정 성에 대한 사랑의 고착된 조건에는 어떤 믿을만한 근거가 있는 걸까? 그것 역시 궤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빙글빙글 돌며 분쇄돼 버리는 게 아닐까? 만약 제 3의 성이, 제 4의 성이 나타난다면, 자신을 이성애자 혹은 동성애자라고 주장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이전의 성정체성을 격렬하게 부정하며 자신을 제3성애자, 제4성애자라고 선포할지도 모른다. 결국 모두 선택의 문제일까? 단지 선택 할 수 있기 때문에 선택하게 되는 걸까?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는 이상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에?

“아담과 이브를 생각해 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아담과 이브의 사랑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어. 어쩌면 둘 중 하나가, 혹은 둘 다 동성애자였을지도 모르잖아? 알게 뭐야? 선택할 수 있는 걸 선택하고는 있는 힘껏 만족하게 되는 것, 그게 모든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법이잖아?”

마치 지영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현정이 딱 부러지게 못을 박는다. 분명 아담은 게이였을 거야. 성경을 읽어보면 딱 티가 난다니까. 수미가 맞장구를 치며 까르르 웃어재낀다. 최초의 인간이 게이라니, 일리가 있어. 그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 본 사람은 ‘아버지’였으니까. 현정도 입술을 비틀며 미소 짓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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