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의 밤 (5) - 완결

by 곡도




“솔직히 말해 봐. 너 진짜 레즈야?”

“네?”

“아니지?”

“아니, 저는…….”

“넌 그냥 숫처녀라는 게 쪽팔려서 빨리 해치워버리고 싶은 거지? 상대가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는 거지? 그런데 남자한테는 영 자신이 없으니까 여자를 붙잡고 늘어지는 거 아냐? 왜, 레즈비언들은 좀 더 만만한 것 같아? 좀 더 널 이해해 줄 것 같아? 더 따듯하게 널 바라봐줄 것 같아? 헛짓거리 하지 마. 우리는 이해심이 넓지도 연민이 넘치지도 않고, 자비로운 건 더더욱 아냐. 현실은 뭔지 알아? 남자들보다 더 까다롭게 여자를 고르는 게 레즈비언들이라는 거야. 수십 가지 조건을 들먹이며 뻔뻔하고 가차 없이 점수를 매기지. 오히려 남자를 꼬시는 게 더 쉬울 걸? 첫경험이라고 하면 장애자건 뭐건 안 가리는 놈들이 수두룩할 테니까.”

나오는 데로 싸늘하게 떠들면서 현정은 주희가 울어버릴 거라고 생각한다. 그럼 차라리 잘 되었다 하고 그대로 나가버려야지, 하는 계산속도 있다. 안됐긴 하지만 사람들은 누구나 상처 받아 마땅하다. 그리고 이 이상 남을 동정하는 건 현정에게도 괴로운 일이다. 그러나 의외로 주희는 울지 않는다. 번들거리는 눈을 피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현정에게 바짝 다가선다.

“모르겠어요. 난 정말 모르겠어요. 아무도 내게 제대로 얘기해 주지를 않아요. 모든 게 각자의 선택이라고 하면서 내게 좀 더 긍지를 가지래요. 우리는 자유롭고, 또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자유롭다고 하면서요. 하지만, 대체 그게 무슨 말이죠? 그 모든 선택의 조건에는 이미 우리가 결코 선택한 적이 없었던 결핍이 있는데요. 그건 단지 나만의 사정인건가요? 그럴지도 모르죠. 언니 말대로 난 레즈비언이 아닌지도 몰라요. 그저 죽기 전에 섹스 한 번 해보고 싶은 불쌍한 장애인인지도 모르죠. 그렇지만 언니, 언니는 알 수 있죠? 제가 정말 레즈비언인지 아닌지 말이에요. 언니 말이라면 믿을게요. 남자를 만나라면 만날게요. 하라는 대로 다 할게요. 그러니까 뭐든지 말해 주세요.”

현정은 그대로 얼어붙는다. 뒤로 물러서려 하지만 주희에게 손목을 잡힌다. 그녀의 손이 너무 차가워서 현정은 소름이 돋는다.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자신이 어떤 판결을 내릴 수 있을까. 무슨 레즈비언 전문가라도 되는 것처럼 거들먹거렸지만 실은 자신도 주희와 다를 바가 없다. 모든 게 의심스럽고 영문을 모른다. 늘 쩔쩔매며 눈치를 본다. 현정은 오늘 밤 자신이 함부로 지껄였던 얘기들을 곱씹으며 박장대소 하고 싶어진다. 그 수많은 헛소리들이 대체 어디에서 나왔는지 아찔하기만 하다.

“나도 몰라. 이제까지 진짜 레즈비언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까.”

“뭐라구요?”

“아니, 어쩌면 한 명 정도는 만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알아볼 수가 없었어.”

현정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주희는 그녀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얘기하면 할수록 모호해진다. 현정이 일부러 겉멋을 부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 때 현정이 불쑥 일어나 주희의 어깨를 내리 누른다. 그리고 주희가 미처 손을 쓰기도 전에 억지로 바지를 끌어 내린다. 곧게 뻗은 왼쪽 다리와 함께 두께가 반만 한 오른쪽 다리가 바지 밖으로 튀어 나온다. 근육이 쪼그라들고 피부가 뼈에 말라붙어서 마치 말린 북어처럼 뻣뻣하고 쭈글쭈글한 모양이다. 색깔은 옅은 회갈색인데 중간 중간 검은색 반점이 거미줄처럼 퍼져있다. 한쪽 다리에만 힘을 주고 걸어서인지 골반 모양도 마름모꼴로 뒤틀려 있다.

“징그럽죠?”

주희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묻는다. 현정은 대답하지 않는다. 징그러운 건 사실이다. 그러나 예상 외로 질겁하지는 않았다. 전등불이 어두운 덕분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주희의 브래지어와 팬티를 마저 벗겨낸다. 그리고 자신도 가운을 벗는다. 현정의 단단한 알몸이 드러나자 주희가 부르르 떤다. 두 사람의 살내음이 코끝에서 뒤섞인다. 현정은 주희의 다리 사이로 기어가 그녀의 허리를 부둥켜안는다. 이왕 해주는 거 제대로 해줄 생각이다. 자신이 레즈비언이라고 믿고 싶을 만큼, 평생 레즈비언이라고 착각하며 살 수 있을 만큼. 현정은 주희의 오른쪽 다리가 자신의 무게 때문에 부러지진 않을까 하는 두려운 공상에 사로잡힌다. 그것이 현정을 짜릿하게 만든다.

잠깐 졸았던 현정이 가물가물 눈을 뜬다. 고개를 들다가 침대 벽에 기대앉은 주희와 눈이 마주치자 정신이 번쩍 든다. 주희가 슬쩍 고개를 돌린다.

“내가 얼마나 잔거야?”

“얼마 안됐어요. 한 30분 정도?”

시계를 보니 자정이 가까워지고 있다.

“이제 그만 일어나자.”

현정은 침대 밖으로 나와 옷을 챙긴다. 주희는 가슴까지 이불을 끌어 올릴 뿐 움직이지 않는다.

“어땠어?”

“네?”

“생각했던 거랑 비슷했어?”

“모르겠어요.”

“좋았어?”

주희는 희미하게 웃는다.

“그래서 어때? 자신이 레즈비언인 것 같아?”

이번에도 대답 없이 빙그레 웃기만 한다.

“내가 그랬잖아. 별로 달라질 거 없다고.”

현정은 의례 버릇처럼 히득이더니 짓궂게 말을 잇는다.

“처녀막이 터진 건 아니니까, 엄밀히 말해서 첫 경험이라고 할 순 없지.”

단순히 농담만은 아니다. 여전히 선택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 주희는 잠깐 얼떨떨해 하다가 안색을 편다.

“그래도, 난 이걸 첫경험으로 기억할 거예요.”

주희의 말에 이번에는 현정이 말없이 웃는다.

“뭐해? 옷 안 입고. 그만 나가자.”

“아니에요. 저는 좀 더 있다가 갈게요.”

“여기서? 혼자?”

“네.”

현정은 왜냐고 물으려다가 그만 둔다. 더 이상 골치 아픈 일에 말려들고 싶지 않다. 같이 남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없다.

“오늘 감사했어요. 정말이에요.”

“그래, 그럼. 조심해서 돌아가.”

혹시 연락처라도 물어올까 싶어 서둘러 방을 나서던 현정은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선다.

“저기 혹시…….”

“네?”

“모텔비 말이야. 네가 냈잖아. 아무래도 내가 반은 줘야 할 것 같은데.”

“아, 아니에요. 처음부터 제가 계산한다고 했잖아요.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래, 그럼.”

하지만 현정은 그대로 발걸음을 돌리지 못하고 미적거리다가 갑자기 가방 속을 뒤지더니 무언가를 주희에게 건넨다.

“저기, 그럼 대신에 내가 이거 줄게.”

그것은 모서리가 구릿빛으로 닳은 검은색 MP3다.

“네? 아니에요. 괜찮아요.”

“어차피 예전 여자 친구가 준거라 버리려던 참이었으니까 상관없어. 그래도 좋은 노래가 많이 들었으니까 한 번 들어 봐.”

“그게, 전 음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래?”

“어차피 자기들 기분에 취해있을 뿐이잖아요. 시끄럽게 자신들에 대해 떠들고 있을 뿐이에요.”

현정은 기가 막힌다. 대체 이 세상에 무엇을 기대하냐고 따끔하게 말하고 싶지만 그만 둔다. 오늘은 이미 충분히 고단하다.

“그냥, 이 음악들이 너를 위한 배경 음악이라고 생각해 봐. 마치 영화처럼 온 세상이 지금 이 순간 너를 지켜보고 있다고 상상하는 거야.”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지.”

주희는 입술을 꼭 다물고 물끄러미 MP3를 바라본다. 현정은 그녀에게 억지로 한 번 웃어주고는 방을 나선다.

모텔을 빠져 나오니 불야성 같은 거리는 수많은 남녀들로 가득 차있다. 속을 알 수 없는 미소와 술기운으로 그들은 네온사인처럼 빛난다. 파티는 이제부터 시작이고 세상은 제 흥에 겨워 어깨춤이라도 추는 듯하다. 현정은 크게 입을 벌려 먼지 가득한 매연을 들이킨다. 맑은 공기를 마신 것처럼 속이 탁 트인다. 그녀는 도시의 밤이, 밤의 도시가 좋다. 검게 번들거리며 지나가는 자동차 유리들, 향수와 담배 냄새가 뒤섞인 악취, 짧은 치마들, 번쩍이는 귀걸이, 오토바이를 둘러싸고 있는 소년들, 꽈배기빵을 튀기는 노점상인, 밤새도록 꺼지지 않는 쇼윈도 불빛들, 색색가지 폐지를 모으는 구부정한 노인들, 사방으로 넘실거리는 추파들, 함부로 부둥켜안는 손길들, 층계 밑에서 졸고 있는 취객들, 카드기에서 돈 뽑는 소리들, 그 소리에 웃음 짓는 걸인들, 멜로디 없는 음악의 비트……. 사람들은 필요 이상으로 많은 걸 알고 있고, 욕망 이상으로 방종하며, 미처 치우기도 전에 쓰레기를 만들어 낸다. 그런데 그게 무슨 대수인가?

현정은 술 한 잔을 더 하기 위해 인파 속을 걸어간다. 주희는 모텔 침대에 누워 현정이 주고 간 MP3 음악을 듣는다. 경혜는 덩치 큰 애인과 주점 부엌에서 말다툼을 벌인다. 지영은 택시 뒷좌석에 혼자 앉아 눈물을 터트린다. 수미는 전철역 화장실에서 갈색 머리 여자와 키스를 나눈다.

그렇게 도시의 밤은 깊어가고, 영원히 반복되는 하루가 또 지나간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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