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어? 기섭은 분명 발끈해서 대답할 것이다. 왜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지? 그 누가 장담할 수 있느냔 말이야. 1억 8000만년이나 지구에서 번성했던 공룡도 남김없이 멸종해 버렸는데 그런 일이 또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나? 종말이 곧 일어날 거라는 증거가 있느냐고? 그런 것은 없어. 하지만 징조라면 넘쳐날 만큼 많지. 그리고는 그는 인터넷과 신문, 잡지 등에서 하나하나 스크랩해 두었던 기사들을 잔뜩 꺼내놓을 것이다. 동물들의 떼죽음, 잦아진 지진 피해, 쓰나미, 온난화, 녹아내리는 빙하, 이상기후, 석유의 고갈, 태풍, 조류독감, 광우병, 신종 바이러스, 지구의 모든 생명을 70번 이상 죽일 수 있는 양의 핵무기 등등등……. 게다가 최근 들어 텔레비전이며 인터넷에서도 온통 모두 종말에 대해 떠들고 있지 않은가? 그게 단순히 유행이나 우연이라고 생각한다면 정말 구제할 길 없는 멍청이지. 곧 가라앉을 배에서 쥐가 위험을 감지하는 것처럼 인간에게도 미미하게나마 그런 예지력이 있다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란 말이야. 하던 일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명료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면 누구나 이 근원적인 부침을 감지할 수 있다고 기섭은 주장한다. 우리 모두 느끼고 있듯이 이미 세계는 노쇠하고, 역사는 지루하고, 인류는 피로하다. 더 이상 목적도 믿음도 의지도 없이, 한 마디로 말해 모든 게 갈 때까지 갔다는 것이다. 이 세계가 끝장났다는 건 모두들 예감하고 있으면서, 왜 그게 당장 내일일 수도 있다는 건 믿지 않는 걸까. 귀머거리들, 게으름뱅이들, 겁쟁이들, 낙관주의자들, 불멸론자들, 몽상가들 같으니.
그는 평생을 이렇게 살아왔다. 귀머거리들, 게으름뱅이들, 겁쟁이들, 낙관주의자들, 불멸론자들, 몽상가들에게 대항하면서. 그렇게 56세가 된 지금 그의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가족도, 친구도, 여자도 없고 이웃과 왕래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섭은 아쉬울 게 없다. 별다른 회한도 없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이렇게 든든한 벙커가 있으니 말이다. 그는 스무 살을 넘어서자마자 구체적으로 벙커를 계획했고 서른 살 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제작에 들어갔다. 버는 돈을 모두 쏟아 부었지만 늘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만큼 완성하는 데는 장장 20년이 걸렸다. 이 벙커가 그의 인생 자체라고 해도 결코 과언은 아닐 것이다. 혹시나 그 사이에 세계가 멸망하면 어쩌나 그가 얼마나 조바심을 쳤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 벙커를 완성하고도 몇 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종말은 오지 않고 있다.
기섭은 모든 비품들을 빈틈없이 확인한 후, 가장 앞쪽에 놓인 상자에서 비상식량 팩과 닭고기통조림, 물 한 병을 꺼낸다. 식사를 하기 위해서다. 유통기한이 가까워진 것부터 먹어치우고 새 걸로 다시 채워 넣어야 한다. 그는 이 벙커가 완공되기 훨씬 전부터, 그러니까 20대 중반부터 비상식량을 준비해 왔고 30년 넘게 이런 식으로 식사를 해결해 왔다. 그 30년 동안, 그가 집에서 제대로 된 요리로 밥상을 차려놓고 먹었던 적은 매우 드물었다.
그는 가스등과 음식을 들고 구석에 있는 작은 방으로 들어간다. 그 방에는 침대와 옷장, 화장실, 라디오, 책상, 소파, 테이블 등의 생활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변변한 가구 하나 없이 고물만 굴러다니는 그의 오막살이집에 비하면 이곳은 고급 저택에 버금가는 셈이다. 그는 아직까지 비닐을 벗기지 않은 인조가죽 소파에 가만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비상식량 팩에 달린 끈을 잡아당긴다. 용기가 발열되면서 자동으로 밥이 덥혀지는 특수 식량이다. 제법 가격이 나가지만 그는 이걸 200개쯤 비축해 놓았고, 추가로 100개를 더 주문할 예정이다.
식사가 준비되는 동안 그는 라디오를 튼다. 라디오 수신기를 설치해 놓아서 지하인 이곳에서도 라디오를 들을 수 있다. 라디오가 이곳과 지상의 유일한 접점인 셈이다. 라디오에서는 지나간 옛 유행가가 느릿느릿 흘러나온다.
우리가 함께했던 기억이
침묵 속으로 흩어져
넌 미소를 띠운 채
가볍게 돌아서려 해
여기까지인 것은
그저 여기까지일 뿐이라고
다시 문을 열어줘
날 일으켜 안아줘
내가 바라는 모든 걸 줘
이제 나는 당신이 미워져
무심한 어둠 속으로 무심하게 퍼져나가는 부드럽지만 건조한 남자의 목소리에 그는 잠시 눈을 끔뻑이며 귀를 기울인다. 통속적인 가사와 음울한 음조가 커다란 해파리처럼 그의 머리 위에서 무겁게 울렁인다. 내가 바라는 모든 걸 줘. 기섭은 자신도 모르게 남자를 따라 흥얼거리다가 무안해져 입을 다문다. 그는 더 이상 바라는 게 없다. 그는 이제 안전하다. 그런데 가스 등 아래 흔들리는 그림자 사이로 문득 정순과 딸 미영이 떠오른다.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정순과 만난 건 그가 28살 되던 해였다. 군대를 다녀온 뒤 몇 년 동안 일자리를 정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던 처지였다. 한 달 혹은 두세 달 씩 임시직으로 공장이나 공사판에서 일하곤 했는데, 그 때 공사장 근처 함바집에서 일하던 정순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주근깨투성이에 마르고 입술이 도톰한 24살의 아가씨였다. 그들은 그럭저럭 7개월가량을 만나다가 정순이 임신을 하게 되면서 결혼을 했다. 하지만 뱃속의 아이는 5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유산되었고 그 이듬해에 다시 임신이 되어 태어난 아이가 딸 미영이었다. 어쨌거나 그 때까지만 해도 그들에게 딱히 큰 문제는 없었다. 그 당시에도 기섭은 입만 열면 종말이니 멸망이니 떠들어댔지만 정순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저 대학물 좀 먹었다고 잘난 체하는 것이라 여겼고 도박이나 술에 손대는 것 보다야 훨씬 낫다고 치부해 버렸다. 하지만 기섭이 본격적으로 지하 벙커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가정에는 분란이 끊이지 않았다.
[제발 그만 두지 못해? 집에 쌀도 계란도 다 떨어졌어. 미영이가 감기에 걸렸는데 병원 갈 돈도 없어. 그런데 이번 달 월급을 또 통째로 저 구덩이 속에 처넣겠다고?]
[아직도 못 알아듣겠어? 벙커를 하루 빨리 완성해야 한단 말이야. 당장 내일이라도 무슨 일이 나면 어떡할래? 이건 우리 목숨이 달린 일이야.]
[헛소리 좀 작작해. 그렇게 캄캄한 구덩이 속에서 우리끼리 살아남아서 뭐하게? 차라리 다른 사람들하고 같이 콱 뒤져버리는 게 낫지.]
기섭은 그 때 처음으로 정순에게 손찌검을 했다. 그는 곧 사과했지만 더욱 정순을 업신여기게 되었다. 그 후 지하 벙커에는 더 많은 돈이 들어갔고 손찌검도 더 자주 일어났다. 그의 가정은 엉망진창이었다. 그의 어린 딸마저 그를 두려워하고 멸시했다. 그 지경이 되자 모든 사람들이 그를 탓했다. 모두들 기섭이 제 정신이 아니라며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이미 손쓸 수 없이 미쳤으니 정신병원에 처넣어야 한다고 윽박지르기도 했다. 실제로 정순의 오빠에 의해 산 속 요양소로 끌려갈 뻔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거만해졌다. 막상 종말이 일어나면 기어와서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할 것들이. 그는 미소를 지으며 이를 갈았다.
결국 어느 봄날에 정순은 미영을 데리고 집을 나가버렸다. 미영이 12살 되던 해였다. 그 후 정순은 지금껏 단 한 번도 그에게 연락을 해오지 않았다. 돌대가리 년. 그는 지금도 정순을 생각하면 울분이 터진다. 그걸 좀 참지 못하고 지 죽을 길을 찾아 가버리다니. 그것도 불쌍한 미영이까지 데리고. 이제 그는 옛이야기에 나오는 신들의 고뇌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 살길을 똑바로 알려주는 대도 죽을 길로 달려가는 인간들을 전능한 신인들 어찌할 수 있겠는가?
다시 문을 열어줘
날 일으켜 안아줘
내가 바라는 모든 걸 줘
이제 나는 당신이 미워져
기섭은 라디오를 꺼버린다. 그는 저 가수에 대해 알고 있다. 한 때 꽤 잘 나가던 가수였는데 어느 날 불연 듯 자살해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유서조차 남기지 않아 아무도 그 죽음의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는 아니꼬워져서 입술을 질겅거린다. 배부른 족속 같으니. 분명 인생이 어쩌고, 의미가 어쩌고, 예술이 어쩌고, 사랑이 어쩌고 하며 알량한 자기 감상에 빠져 목숨을 버렸겠지. 정작 죽음이 뭔지 알지도 못하면서 지 멋에 취해서 말이야. 니들은 계속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라, 난 이까짓 거 이제 질렸으니까, 옛다 하고 손을 털고 일어나면서 그놈은 제법 어깨가 으쓱했을까? 하지만 만약 자살하기 전에 종말이 왔다면, 설사 그것이 자살하기 하루 전, 아니 단 1시간 전이었다 해도, 저 가수는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살아남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 했을 거라고 기섭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방금 전까지 미련 없이 버리려 했던 목숨을 온몸으로 악착같이 껴안으면서.
그는 자신이 먹은 자리를 깨끗이 정리한 후 쓰레기와 음식 찌꺼기를 챙겨들고 벙커를 빠져 나온다. 바깥쪽 문을 열자마자 들이닥치는 습하고 신선한 공기에 한 대 맞은 것처럼 콧잔등이 얼얼하다. 그는 헛기침과 함께 폐 속에 남아있던 어둠을 마저 토해내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금방이라도 내려앉을 것처럼 묵직한 잿빛 구름의 생생한 물질성이 그를 압도한다. 그는 새삼스럽게 눈을 부릅뜨고 주변을 둘러본다. 원래 하늘은 이토록 짙은 색이었나. 공기는 이토록 두터웠던가. 벽돌은 이리도 거칠고, 나뭇가지는 쉴 새 없이 흔들리고, 바람은 서로 날카롭게 부딪히고, 빗방울은 이렇게 또렷하고 서늘했나. 세상 만물이 거대한 압력에 의해 부대끼고 뭉개지면서 점점 단단해져서 어디론가 서서히 가라앉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는 현기증을 느끼며 넓적하고 까칠한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른다. 보통 어둠이 무겁다고들 표현하지만 어둠과 이 세상을 뒤섞어 놓으면 어둠은 오히려 기름방울처럼 세상 위를 둥둥 떠다닐 것이다.
아직 줄기차게 비가 내리고 있지만 바람도 약해지고 더 이상 번개도 치지 않는다. 태풍은 어느새 멀리 물러간 모양이다. 고작 이정도의 태풍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어떤 이들은 밤새 두려움에 떨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도 앞으로 다가올 종말을 어렴풋이 예감했을까? 그는 벙커 문을 닫고 열쇠를 단단히 채워놓고는 손에 들고 있던 쓰레기를 마당 한 구석에 아무렇게나 던져버린다. 비옷을 걸치며 낡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니 새벽 3시. 그는 이제 출근해야 한다. 마당에 있는 수돗가에서 대충 얼굴과 입안을 헹궈내고 그대로 집을 나선다.
비에 젖어 더 군색해 보이는 허름한 담벼락과 철사 울타리가 이어지는 골목은 여기저기서 흘러넘친 토사와 쓰레기들로 엉망이다. 그는 구정물이 작은 냇물처럼 흐르는 길을 첨벙거리며 내려간다. 이른 시간이라 동네는 아직 어둠과 정적 속에 잠겨있다. 사람이라고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요란했던 태풍이 물러간 후 사람들은 이제야 깊은 단잠에 빠졌을 것이다. 기섭은 코를 실룩거리며 혀를 찬다. 그저 하루하루가 만사태평인 인간들. 가난하고 불행하고 실망뿐인 그들도 실상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자신들이 불멸이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저 낡은 방구석 안에서도 세상모르고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도대체 ‘안심’이란 어디서 유래된 미신일까. 종말의 순간이 와야만 그들은 진짜 자기 모습을 제대로 보게 될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