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번호 2011라합53248 (1)

by 곡도



“재판이 시작됩니다. 방청객들은 모두 입장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색 양복을 말끔히 차려입은 서기의 외침에 대기실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서둘러 재판정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 보았자 모두 해서 열 댓 명 남짓이었다. 그들은 예상보다 넓은 재판정 크기에 놀라 쭈뼛거리다가 방청석 앞자리 여기저기에 흩어져 앉았다. 그리고 온통 회색과 갈색의 엄격한 분위기에 기죽지 않으려고 쉴 새 없이 주변을 흘끔거렸다. 무슨 꿍꿍이라도 있는 것처럼 일행과 머리를 맞대고 숙덕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잠시 후 원고 측과 피고 측 사람들이 차례로 재판정에 입장했다. 그런데 이것이 참 희귀한 광경이었다. 원고 측에는 푸른 죄수복 차림에 두 손에 수갑까지 얽어진 남자가 홀로 앉았고, 피고 측에는 번듯하게 정장을 차려 입은 두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 그리고 그들의 변호사가 자리를 잡았다. 사건의 내용을 모르고 왔다면 분명 원고와 피고의 자리가 바뀌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자신의 자리에 제대로 앉아 있었다. 죄수복 차림의 남자는 마른 체형에 키가 훤칠한 장신이었다. 까칠하고 누런 얼굴은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었지만 눈빛에는 윤기가 흘렀다. 야무진 입 꼬리가 다부져 보이고 짙고 평평한 눈썹 덕에 전체적으로 성실한 인상이었다. 그는 방청석을 둘러보며 사람들을 관찰할 만큼 여유만만이었다. 그의 왼쪽 가슴팍에 박혀있는 [803481]의 하얀 번호판이 어둠 속에서 미소 지을 때 드러나는 새하얀 이빨처럼 선명하게 빛났다.

“재판장님이 들어오십니다.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 주십시오.”

서기의 외침에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은색 법관복을 차려입은 재판장과 두 명의 판사가 줄을 맞추어 입장했다. 재판장은 머리 양쪽이 희끗희끗한 쉰쯤의 남자였다. 코 양 옆으로 팔자주름이 깊고 입술이 두터워서 조금 험상궂은 인상이었다. 재판장 양쪽에 앉은 판사들은 그 보다는 젊은 사람들이었다. 그 중 한명은 앞머리가 조금 벗겨진 남자였고 다른 한명은 머리를 남자처럼 짧게 깎은 여자였는데 둘 다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이 사건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처럼 원고와 피고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두툼한 서류를 펼쳐 들었다.

“모두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사람들은 다시 주섬주섬 자리에 앉았다. 구둣발 소리와 의자 끄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번잡하더니 금세 빡빡한 정적이 흘렀다. 그제서야 재판장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좌중을 바라보았다. 그 무표정한 얼굴이 오만한 것인지 아니면 엄숙한 것인지 방청객들은 구별할 수가 없었다. 그는 가볍게 콧바람을 뿜어내더니 생각보다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사건번호 2011라합53248 개정합니다.”

의사봉을 힘차게 세 번 내리친 뒤 그는 말을 이었다.

“오늘 이 재판은 피고 측의 요청에 따라 비공개로 진행됩니다. 고로 여기 방청석에 계신 분들은 피고 측과 원고 측의 가족 및 지인들이란 점을 알려드립니다. 다만 원고 측에서는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이 재판이 정숙한 분위기에서 공명정대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방청하시는 분들의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재판을 시작하기 전에 한 번 더 짚고 넘어갈 것이 있는데……. 원고 박치수씨.”

“네에, 네.”

죄수복의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다가 수갑에 묶인 두 손 때문에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변호사 없이 직접 소송을 진행하겠다고 하셨지요. 맞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신중하게 고려해보시죠. 법에 대한 훈련 없이 법정에 선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에 따른 불이익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소송 결과에도 불리한 영향을 미칠 수 있구요. 그건 전적으로 박치수씨 책임이 됩니다. 그 점을 알고 계신가요?”

“네, 잘 알고 있습니다. 변호사는 필요 없습니다. 저는 법은 잘 모르지만 제가 옳다는 건 분명히 알고 있으니까요. 상식선에서 충분히 증명할 수 있어요. 법이 상식적이라면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하지만 재판 중에 수갑을 풀어달라는 요청은 수용하지 않겠습니다. 원고가 현재 수감자 신분인대다가 의중을 신뢰하기 힘들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까? 저는 좀 격식 없이 대화를 나눠보자는 뜻이었는데, 정 그러시다면 할 수 없는 것이지요.”

박치수는 입 꼬리를 비틀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럼 본격적으로 재판을 시작합니다. 피고들은 일어나 주세요.”

피고 측 탁자에 앉아있던 세 사람이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일어났다.

“한 분씩 대답하세요. 최한규씨.”

“네.”

회색 양복에 짙은 보라색 민무늬 넥타이를 맨 남자가 짧게 대답했다. 그는 덩치가 크고 둥글둥글한 얼굴에 유난히 작은 눈과 작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긴장이 되는지 양복 옆 자락을 손으로 꾸겨 쥐었다.

“1974년 3월 17일생. 직업은 대한메트로 신문 기자.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다음은, 오윤숙씨.”

“네.”

검은 원피스에 푸른 보석이 달린 목걸이를 하고 단발머리를 딱 붙게 오른쪽으로 가르마를 탄 키 작은 여자가 대답했다.

“1963년 9월 4일생, 직업은 소설가. 맞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다음으로는, 이태훈씨.”

“네.”

은은한 줄무늬가 있는 남색 고급 양복을 입고, 어깨까지 올법한 긴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묶은 갈색 얼굴의 남자가 큰 소리로 대답하자 방청석에서 몇몇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그 소리를 잠재우려는 듯 재판장이 더 큰소리로 외쳤다.

“1967년 1월 29일생, 직업은 영화감독.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피고들은 모두 자리에 앉아주십시오. 원고 측은 진술을 시작하시죠.”

“네, 감사합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박치수는 ‘존경하는’에 힘을 주어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경멸과 증오의 눈빛으로 자신을 치켜보고 있는 피고들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호쾌한 미소를 그리며 진술을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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