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흔하더라
죽음은 더 흔해 빠졌더라
그러나 내 친구는
그 어디에도 없다
다만 들쩍한 진흙탕에
경련하듯 자맥질 치며
가라앉지도 떠오르지도 못하는
이름 하나
움켜쥐기도 전에
고드름처럼 매달린 한마디
나는 끝내 너에게
입 맞추지 못했다
대신 넓적한 이마에
새파란 우편도장을 찍어
배웅도 인사도 없이
부랴부랴 치워버리고
혼자 돌아앉아
마치 뒤에 앉은 것처럼
상규야ㅡ 하고
넌지시 불러보지만
어쩌랴
이곳은 부활이 없는 땅
뿌연 먼지가 되어 쌓이는
뻔한 이름들의 진흙탕
미처 말하지 못한 말들이
떠도는 유령이 되어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
산자들의 군번줄을 뒤지는 곳
그래 쉬어라
아니 잊어라
그래 죽어라
아니
그래
후회는 산자들의 몫이다
후회는 산자들의 몫이다. 입속으로 중얼거리던 우석은 허겁지겁 품속을 뒤진다. 볼펜은 찾았지만 수첩이 보이지 않는다. 어젯밤 사물함에 두고 온 모양이다. 그는 온통 주머니를 뒤집다가 창준이 여자 주소를 적어주었던 쪽지를 발견하고 그 뒤에 허겁지겁 시를 받아 적는다. 볼펜을 움켜쥔 그의 손끝이 떨린다. 정말 여기에 있다. 이 곳 전쟁터에. 시가. 이것은 그가 찾아낸 첫 번째 시의 조각이다. 아직은 시시하고 미미하지만 앞으로 점점 더 많은 조각들을 캐낼 것이다. 적군을 죽일 때마다 한 조각, 동료가 죽을 때마다 한 조각, 포탄이 터질 때마다 한 조각, 교차로에 잠복할 때마다 한 조각, 죽을 고비를 넘길 때마다 한 조각, 전투에서 이길 때마다 한 조각, 전투에서 질 때마다 한 조각……. 그럼 어느 날 진짜 시가 완성되지 않겠는가. 그럼 자신도 진짜 시인이 되지 않겠는가. 그는 승리의 예감에 심장이 마구 뛴다. 그건 바로 시의 승리다. 사람들이 죽고 죽이고 끝없이 엎치락뒤치락 하는 동안, 시는 여전히 모든 전쟁터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다. 우석은 그 승리에 기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이곳에 와야만 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시가 적힌 종이를 총 대 위에 높이 걸고 가장 선봉에 서서 큰 소리로 외치고 싶다. 시여 만세. 죽은 자여 만세. 전쟁이여 만세.
그 때 하늘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에 그는 그만 질겁하고 앞으로 주저앉는다. 총을 높이 쳐들고 납작하게 엎드려 차가운 진흙에 광대뼈를 처박는다. 잠시 후 그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본다. 방금까지 자신이 있었던 바위 너머 초소 쪽에서 새까만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다시 총성이 울리고 곧이어 기관총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우석은 시를 적은 종잇조각을 가슴팍에 깊숙이 쑤셔 넣은 뒤 초소를 향해 뛰기 시작한다. 평평한 길인데도 내리막길인 것처럼 다리가 휘청거린다. 온 세상이 초소를 향해 가파르게 미끄러져 내려간다.
숨을 헐떡이며 오솔길 끝에 솟아있는 바위를 돌아섰을 때 우석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선다. 초소 앞 철조망까지 적군들이 새까맣게 매달려있다. 창준은 반쯤 무너진 초소의 시멘트벽에 붙어 그들을 향해 기관총을 갈겨대고 있다. 막 창준이 쏜 총이 철조망을 넘던 적군의 머리를 꿰뚫는다. 그리고 또 한 명이 가슴에서 엄청난 피를 뿌리며 토끼풀 더미 위로 쓰러진다. 우석은 꼼짝 못한 채 망연히 그 모습을 바라본다. 쉽게 죽는다더니, 정말이구나. 저렇게 정면에서 달려들면 안 되는데. 또 한 사람의 머리가 산산조각난다. 상쾌하고 축축한 아침, 화창한 하늘 밑에서의 전투 장면은 생각만큼 박진감 넘치지는 않는다. 짐짓 심각한 척, 느릿느릿, 건성건성, 노란 금빛으로 빛나는 들판을 배경으로 식전에 싱거운 장난이라도 치는 것 같다.
그 때 초소 왼편에서 바주카포를 실어 나르는 적군의 모습이 보인다. 우석은 서둘러 자세를 고치고 총을 겨눈다. 그러나 이 역시도 장난인 것 같아 웃고 싶어진다. 저 놈을 없애고 나면 소리 내어 웃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적군이 바주카포를 쳐들자마자 우석의 총이 불을 뿜는다. 한 발. 또 한 발. 그리고 또 한 발. 모두 빗나간다. 우석의 총소리에 창준이 흘끗 뒤를 돌아본다. 아주 잠깐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다. 창준의 입술이 달싹거린다. 하-. 그 때 굉음과 함께 초소가 산산이 부서진다. 쏟아져 내리는 먼지 구름을 뚫고 적군들이 우우- 소리를 내며 철조망을 흔든다. 삼중의 철조망을 넘기가 쉽지 않아서 그들은 마치 끈끈이에 붙은 벌레들처럼 허공에서 버둥거린다. 그 사이에 연기가 걷히고 창준의 모습이 보인다. 초소 바깥으로 튀어 나온 상체와 초소 벽에 거꾸로 매달려있는 두 다리, 그리고 그 중간쯤에 어깨에서부터 떨어져 나간 팔이 하나. 붉은 피가 초소 밖으로 냇물처럼 쏟아져 내린다. 우석은 중사님- 하고 부른다. 대답이 없다. 먼지를 뒤집어 쓴 창준의 회색 눈동자가 막 떠오르는 태양을 응시하고 있다. 얼떨떨한 표정이다.
우석은 한 번 더 창준을 부르려다가 갑자기 사지를 와들와들 떨더니 그대로 총을 집어 던지고 돌아서서 뛰기 시작한다. 세상이 하늘만큼 커졌다 손톱만큼 작아졌다 하며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돈다. 매몰차게 넘어져 자갈밭에 이마를 처박았지만 곧바로 일어나 다시 뛴다. 자꾸만 등 뒤로 끌어내리는 중력을 그는 사력을 다해 떨쳐낸다. 막 바위를 돌아 겨우 오솔길로 접어들었을 때 별안간 어젯밤에 들었던 날갯짓 소리가 그의 등 뒤에서 들려온다. 처음에는 한 두 마리인 것 같던 그 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마치 수 만 마리의 새떼가 그의 뒤를 바짝 쫒아오는 것 같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대체 이 많은 새들은 밤새도록 어디에 숨어있었던 걸까? 저 들판 고랑 사이에? 두터운 진흙 뻘 밑에? 별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푸르른 잿빛 안개 뒤에? 땅 밑에 겹겹이 쌓여 있는 시체들의 사타구니 틈새에? 그 때 작고 새까만 새들이 한 목소리로 합창한다.
시여 만세. 죽은 자여 만세. 전쟁이여 만세.
만세. 만세. 만세. 파드득 날갯짓 소리가 귓가를 때리는 순간 우석은 비척거리며 멈춰 선다. 그리고 ‘어이쿠’ 한마디를 내뱉더니 가슴에서 피를 쏟으며 그대로 쓰러진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