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필요하게 될지도
모르는 유언장 (1)

by 곡도




M 선생님께.

선생님.

확실히 말해 두건데, 저는 자살할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자살할 때를 대비해서 미리 유서를 써놓기로 했어요.

저는 이미 작년부터 유서를 써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망설이기만 하다가 매번 꽁무니를 뺐지요. 어쩐지 유서가 죽음에게서 양심의 가책을 덜어주는 일인 것 같아 찜찜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나는 죽음을 의인화하는 짓거리는 하지 않겠습니다. 유서를 쓰지 못한 건 내 자신에게서 양심의 가책을 덜어주는 일인 것 같아 찜찜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살이 죄라고 믿는 건 아닙니다. 저는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요즘 사람이에요. 요즘 같은 시대에는 무엇보다 자유가 우선이지요. 모든 면에서 말입니다. 원한다면 자살도 할 수 있고, 사람도 죽일 수 있고, 세상을 파괴할 수도 있어요. 판단과 능력에 달려있지요. 물론 저 같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고작해야 자살 정도지만요.

유서를 쓰고 있는 이 순간, 내 안에서 날뛰던 양심들이 돌연 숨을 죽이고 무거운 침묵 속에 잠겨듭니다. 그것들은 마치 오래되고 새까만 돌덩어리 같아요.

선생님, 다시 말하지만 저는 죽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평생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고, 도대체 왜 자살들을 해대는지 이해하지도 못해요. 삶을 나락이라고, 죽음을 안식이라고, 자살을 낭만이라고 여기는 일각의 방만한 사조와도 거리가 멉니다. 저는 가능한 천수를 누리며 오래도록 살고 싶습니다. 누구나 그럴 권리가 있잖아요? 선생님, 그런데도 나는 내가 자살할까봐 두렵습니다. 별안간 덜컥, 아무런 전조도 예감도 미련도 없이, 별다른 결정적인 사건도 없이, 마치 오랫동안 계획해 온 사람처럼 불시에 실행에 옮길까봐 소름이 끼칩니다.

알려진 바로는 자살자 중 많은 사람들이 유서를 남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짐작할 만한 일이죠. 그들은 이미 그 모든 문제들에서 까마득히 멀어졌을 테니까요. 오직 죽기 위해 살아있을 뿐, 벌써 그들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거예요. 그들은 어느새 목에 줄을 걸고 있거나, 다리 난간 끝에 서 있거나, 입속으로 약을 털어 넣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했을 겁니다. 더 이상 단 한글자도 떠올리고 싶지 않았을 거예요. 마지막 순간을 산만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을 겁니다. 이해할 수 있어요. 우린 살아가면서 수많은 말들을 하지만 그게 뭐 어디 하나 그리 신통하던가요. 그런데 죽으면서 남기는 말이야 더 말할 것도 없지요.

하지만 그래도 저는 유서를 써놓으려고 합니다. 사실 유서에 뭘 써야 할지는 잘 모르겠어요. 저는 재산도 없고, 죽은 후에 딱히 처리해야 할 일도 없거든요.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애통해 해줄 사람도 없구요. 그냥 그걸로 끝장이죠. 세상은 눈도 깜짝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선생님, 저는 유서 한 장은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그건 선생님의 영향인지도 모르겠어요. 선생님께서는 선생님의 그림 하나하나가 모두 선생님의 유서라고 하셨죠. 선생님이 죽고 난 후에도 그림들은 남을 것이고, 그 그림들이 선생님 자신보다 더 위대해 지길 바란다구요. 저야 그런 대단한 야심이 있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무언가를 남겨야겠다는 기분이 든 건 사실이에요. 물론 그저 기분 문제라는 건 압니다. 그냥 종이쪼가리일 뿐이죠. 위대해지기는커녕 구질구질한 변명과 잡담으로 가득 찬……. 그래도 저는 선생님께 이 유서를 남기고 싶습니다. 선생님을 존경하니까요. 진심이에요. 제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제일 그럴 듯한 분이시죠. 저는 제 자살로 선생님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고, 저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고 느끼게 하고 싶지도 않아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돌연 낯선 사람으로 기억되는 건 씁쓸한 일입니다.

선생님은 자살이 제게는 너무나 철학적이고 관념적인 문제라고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어요. 선생님은 언제나 제게 “저렇게 태평한 놈은 처음이야. 대체 고민이라곤 없어”라고 말씀하시니까요. 그건 사실이에요. 제 천성이죠. 저는 낮잠과 농담거리들을 좋아합니다. 심각함이나 우울함과는 거리가 멀어요. 조금만 골치 아픈 일이 생겨도 저는 제 모자를 두 손에 움켜쥐고 비틀어버리죠. 제 머리가 아니라 거기에서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짜내려는 것처럼요. 그런 제가 어쩌다가 자살에 관심을 갖게 됐는지 궁금하시겠죠. 간단합니다. 그건 5년 전 부터였어요. 제 아버지가 자살했을 때부터지요. 아버지는 건물 옥상에 올라갔다가 벼락을 맞아 떨어져 죽었다고 선생님께 말씀드린 적이 있었죠? 거짓말이었어요. 왜 그런 거창한 거짓말을 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병이나 사고로 죽었다고 하면 될 일인데 말이에요. 하지만 아버지가 9층 옥상에서 떨어져 죽은 건 사실입니다. 벼락에 맞아 떨어진 게 아니라 스스로 뛰어내린 거지만요. 아니, 그것도 일종의 벼락이라면 벼락이겠죠.

확언하건데, 만약 제가 자살한다면 절대로 건물 위에서 뛰어내리지는 않을 겁니다. 저는 고소공포증이 있거든요. 죽기 위해 높은 곳에 올라가느니 차라리 죽는 걸 포기하는 게 나아요. 누구든지 자살하기 위해 그런 고통을 견뎌야 한다면 아무도 자살하지 않을 겁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문제는 자살이 너무 쉽다는 거예요. 깜짝 놀랄 정도로 쉽다니까요. 세상에 그보다 더 쉽고 간단한 일은 없을 정도예요. 신인지, 자연인지, 진화인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우리를 창조한 존재가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뭐, 아니면 의도적이었는지도 모르죠. ‘도태’란 정당하며 심지어 정의로우니까요. 선생님 작업실에 자주 오시는 해부학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도태란 정당하며 심지어 정의롭고 모든 결론은 결국 합당하다고 말입니다.

아, 혹시 선생님께서 궁금하실까봐 덧붙이자면 제 고소공포증이 아버지의 자살 때문에 생긴 건 아닙니다. 요즘은 뭐든지 어린 시절의 충격이나 마음의 상처와 연관 짓는 게 유행이지만, 제 경우에는 선천적이에요. 높은 곳에만 올라가면 금세 식은땀이 나고, 다리가 후들거리고, 하늘이 노래지지요. 아버지는 그런 나를 한심하게 여겼습니다. 베짱이 약하다고 생각했어요. 정신력이 부족하다는 거죠. 그래서 아버지는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방법을 선택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게 남자다운 게 뭔지 보여주려구요.

전 가끔 아버지가 자살하리라는 징조나 예감이 오랜 전부터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버지가 자살을 결심하기 전,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오래 전부터요. 가령 아버지가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그런 조짐이 있었던 게 아닐까요?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지만 아버지 주변에는 항상 불길한 예감이 떠돌고 있지 않았을까요?

선생님처럼 개화된 분이야 저의 이런 생각을 나무라시겠죠. 선생님이 미신을 질색한다는 걸 저도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그 어떤 신보다 노란색 레몬 하나를 더 숭배할 거예요. 요즘 사람들이 그 어떤 신이 그려진 그림보다 노란색 레몬 하나가 그려진 그림을 더 비싼 값에 구입하는 것 처럼요. 심지어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저까지도 제가 개화된 시민이라고 믿고 있을 정도라니까요. 지금은 구두닦이가 되려 해도 개화가 돼야 하지요. 하지만 선생님, 왜 개화된 시대에도 자살은 여전히 일어나는 걸까요? 아니, 점점 더 많이 일어나고 있잖아요. 물론 고명한 학자들이 이런저런 설명을 그럴 듯하게 늘어놓지만, 저는 도무지 그들이 진지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그들은 자살자들로부터 복잡하고 다채로운 그래프들을 만들어 내더군요. 마치 확률과 통계를 이용해서 별들의 운항을 계산하는 과학자들처럼요. 그것은 운명의 다른 이름 인가요? 아니면 우연의 다른 이름 인가요?

운명인지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돌이켜보면 아버지에게도 몇 가지 짚이는 점이 있었습니다. 사소하지만 기억에 선명한 자국을 남긴 일들이죠. 그 중에서도 언젠가 아버지가 집 담벼락 밑에서 새끼 쥐들 한 움큼을 찾아냈던 일이 떠오릅니다. 엄지손가락만 한 것들이 뒤엉켜서 꼬물거리고 있었는데, 아직 눈도 뜨지 못한 새빨간 살덩어리들이었지요. 귀엽고도 징그러운 생명체들이었습니다. 모든 아기들이 그렇듯이요. 그것들을 아버지는 한 손에 움켜쥐더니 남김없이 옆집 삽살개에게 던져주었습니다. 개의 커다란 입 속으로 야금야금 떨어지는 새끼 쥐들을 보면서 아버지는 통쾌하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그 웃음소리가 제 안에 지워지지 않는 공포와 불안을 남겼습니다. 평소에 ‘토끼’라고 부르며 예뻐했던 옆집 개를 저는 다시는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새끼 쥐들을 산채로 씹어 먹던 개의 만족스러운 눈빛과 아버지의 자살이 정말 아무런 연관도 없는 걸까요? 아버지의 운명을 미리 예고했던 건 아니었을까요?

물론 선생님께서는 운명 같은 건 모두 헛소리라고 치부하시겠죠. 자살이란 결국 비겁한 패배자의 논리라구요. 이해합니다. 선생님은 절대 자살 같은 건 하지 않을 거예요. 제가 장담하죠. 그건 비단 선생님의 대단한 성공과 명성 때문만은 아닙니다. 물론 그 점이 가장 중요하긴 하지만, 선생님에게 자살은 지나치게 야만적이거나 지나치게 몽상적이죠. 어느 쪽이든 선생님과는 거리가 먼 얘기들이에요. 요즘의 예술가들과 지식인들도 모두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들은 정규 교육을 통해서 자살이 무엇보다 멍청한 짓이라는 걸 배웠으니까요. 자살이란 자신의 저능과 무능을 증명하는 최악의 방법이죠. 네, 부정할 수가 없군요. 하지만 두고 보세요, 선생님. 얼마 안 있어 개화된 사람들이 앞장서서 자살하기 시작할 겁니다. 자살이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게 될 거예요. 오히려 자살은 무지나 패배가 아니라 지성과 우월의 상징이 될 겁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미래에는 사람뿐만 아니라 정치도, 사상도, 예술도, 문학도 자살하는 시대가 올지도 몰라요. 어떻게 아냐구요? 우리는 이미 종교가 백주대낮에 광장 한가운데서 자살하는 광경을 똑똑히 목격하지 않았던가요? 선생님의 친구인 시인 선생님께서도 늘 말씀하십니다. 미래에는 무한 자유와 무한 책임이라는 개화의 복음이 우리 모두를 평등하게 만들 거라구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평등은 딱 두 가지뿐이에요. 투표와 자살이죠.

선생님, 제 궤변을 불쾌하게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그저 선생님과 선생님 친구분들의 대화에서 엿들었던 얘기들이 이 순간 두서없이 제 머릿속을 휘젓고 있는 것뿐입니다. 자살이 진보적인 행동이고 제 아버지가 시대를 앞서간 사람이라는 얘기를 하려던 건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전혀 아니죠. 오히려 그 반대에요. 제 아버지는 평생 동안 당황한 채 살았습니다. 한 번도 진정하지를 못했어요. 마치 전혀 다른 시대를 기대하고 태어난 사람 같았죠. 아마도 ‘현재’를 기대했겠지만 지금은 과거와 미래만 있는 시대잖아요? 당황한 나머지 결국 그 사이로 뛰어내리고 만겁니다. ‘현재’가 있었어야할 그 텅 빈 자리로요. 그건 9층보다 더 높았을 겁니다. 훨씬 더 높았을 거예요.

반면에 선생님은 곡예사지요. 허공이 높고 깊을수록 더 멋진 재주를 부려서 사람들을 감탄시킵니다. 모든 사람들이 선생님을 미워하거나 응원해요. 정말 멋진 일이죠. 그런데 왜 저희 아버지는 그러지 못했을까요? 솔직히 전 가끔 제 아버지와 선생님을 비교하곤 합니다.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닌데, 정말이에요. 그냥 저절로 비교가 되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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