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필요하게 될지도 모르는 유언장 (3) - 완결

by 곡도




사실 선생님 몰래 붓질도 몇 번 해봤습니다. 하얀 캔버스 앞에 앉는 게 아직은 오금이 저려서, 선생님이 그리다가 버린 캔버스에 덧칠을 해봤어요. 상체에는 검은색 깃털 옷을 입고 하체는 벌거벗은 중년 여자의 그림이었는데 제가 치마를 그려서 입혔습니다. 푸른색에 청록색과 갈색 빛이 맴도는 멋진 치마였지요. 그 여자에게 잘 어울렸어요. 무엇보다 품위가 있었습니다.

품위는 중요해요. 그렇지 않나요? 솔직히 선생님의 그림 속에 나오는 여자들은 품위가 없습니다. 물론 그것이 선생님이 늘 말씀하시는 동시대의 사실주의라는 걸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 얘기를 하실 때마다 선생님은 격앙되시죠. 예술은 현실에 대한 사실의 도전이며, 공감에 대한 도발이며, 감상주의를 극복한 감상이어야 한다구요. 그림은 화장대의 거울이 아니라 작품 그 자체가 되어야 하고 누구도 예술을 모욕해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선생님, 저는 선생님 그림 속의 여자들이 모욕 받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모델은 그저 모델일 뿐이고 그림은 그저 그림이라는 걸 알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도 냉담하고 적나라해서요. 예의를 차리거나 수줍어하지도 않고 뻔뻔하게 똑바로 쳐다보죠. 마치 모델 자신은 아무런 시선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처럼요.

선생님의 그림을 보기 전에는 일말의 애정도 없는 욕망이 가능하다는 걸 미처 몰랐습니다. 상대방을 낱낱이 까발려서 실핏줄 한 가닥 한 가닥 까지 남김없이 활용하고 싶어 하지요. 예술에게 슬픔이란 세련이고 불행이란 화려함입니다. 자살은 축제와 같아요. 그리고 전쟁, 전쟁은, 세상에, 그건 천국일 거예요. 선생님, 역시 이건 모욕이 아닐까요? 상대방이 가상의 인물이거나, 풍속이거나, 이념이거나, 과거이거나, 기호 또는 상징이라고 해도, 모든 것이 그저 그런 척 짜 맞춘 연극이라고 해도, 모욕은 실재하는 게 아닐까요? 설사 빈 허공에 대고 모욕을 쏘아 올린다 해도 결국은 누군가의 가슴으로 떨어지고 말거예요.

고명하신 선생님께서 생각하실 때 우리의 삶에 모욕이 부족한가요? 우리의 세계는 좀 더 모욕 받아야 하나요? 우리가 감수하는 모든 모욕이 빠짐없이 일일이 폭로되어야 해요?

압니다. 선생님은 분명히 이 부분을 읽으면서 미소를 지으셨겠죠. 마치 올무에 걸린 작은 짐승을 바라보듯 동정과 만족을 동시에 느끼셨을 겁니다. 선생님은 차분하게 제게 반문하실 거예요. 왜 안 되지? 왜 모욕하면 안 되지? 왜 까발리면 안 되지? 왜 저지르면 안 되지? 금지된 것을 위반하는 건 의미 있는 일이야. 그 의미가 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 금기 자체가 의미니까. 위반의 역사는 바로 인류의 역사이고 무엇보다 개인의 역사야. 우린 좀 더 모욕 받아야 돼. 더 치욕스럽게. 더 철저하게. 더 자유롭게. 그게 거들먹거리는 시시한 인격보다, 무감각한 연장의 일상보다 더 우리 자신을 존중하는 길이야.

그래요. 자유. 선생님은 늘 귀가 따갑도록 말씀하시죠. 자유. 그것이 선생님의 깃발이죠. 그것이 예술의 깃발이구요. 인류의 깃발이에요. 맞습니다. 가고 싶다면 가 봐야죠. 하고 싶다면 해봐야 하고, 이루고 싶다면 이루어야죠. 전진할 수 있는 자유. 전복할 수 있는 자유. 정복할 수 있는 자유. 그 무엇도 행군의 앞길을 막아선 안 돼요. 자유는 모든 경계를 침투하지요. 그 무엇도 봐주는 법이 없구요. 모든 비밀을 까발리고, 모든 인격과 사정을 뛰어넘어서, 우리의 세계는 선명해지고 확장됩니다. 그렇죠. 자유는 진보에요. 성찰이구요. 숙명이에요. 하지만, 아세요, 선생님? 자유가 우리를 미치게 해요. 자유가 우리를 쥐어짜고, 우리의 코를 세상 안으로 쑤셔 넣고, 한발 한발 선택을 강요해요. 우리는 쉴 새 없이 밟고 지나가야 하고, 스쳐지나가야 합니다. 세상 끝까지 말이에요. 선생님, 무감각에서 벗어나려는 자유 역시 끔찍하게 무감각하다는 걸 모르시겠어요?

저는 선생님과 아버지의 무한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공통점을 봅니다. 두 분 모두 누구보다 자유롭고, 두 분 모두 전지적 작가 시점적으로 비겁해요.

선생님, 제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저도 제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글이 써지는 데로 써나가고 있을 뿐이에요. 머릿속이 거품으로 가득 찬 것처럼 부글부글합니다. 주제넘게 굴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선생님 그림 속의 여자들이 모욕 받고 있다는 건 순전히 제 상상에 불과합니다. 어쩐지 속이 뒤틀려서요. 아마도 제가 선생님의 모델을 했을 때가 떠올랐던 모양입니다. 선생님께서는 마치 노란 레몬 하나를 바라보듯이 저를 바라보셨죠. 아니, 선생님께서 바라본 건 레몬이 아니었을 겁니다. 바로 제 아버지의 아들이죠. 그럼요. 또 달리 누구겠어요.

선생님의 아들은 어떤가요? 선생님의 아들도 화가가 되고 싶어 하나요? 저는 가끔 작업실에서 선생님의 아들과 마주칩니다. 검은색 천을 두른 챙이 좁은 멋진 밀짚모자를 쓰고 다니죠. 비슷한 또래이긴 하지만 우리는 서로 아는 채 하지 않습니다. 우린 서로가 너무 다르다는 걸 잘 알고 있거든요. 얘기를 나눠본 적은 없지만 서로의 눈을 보면 알 수 있지요. 선생님의 아들은 자신의 아버지가 위대한 화가라는 걸 알고, 저는 제 아버지가 자살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자신에게 없는 걸 가졌다는 걸 알아요. 친해지기 쉬울 리 없지요. 친해지기는커녕 우리는 본능적으로 서로를 싫어해요. 그건 이질감이 아닙니다. 질투라든지 멸시 같은 익숙한 감정도 아니죠. 오히려 상대방을 이해하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거예요. 친구가 될까봐 겁이 나는 겁니다.

선생님, 얘기가 나온 김에 아드님의 비밀 하나 알려드릴까요? 저는 떠벌이는 아니지만 아버지인 선생님께서 알아두셔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선생님의 아들은 아직 여자 경험이 없지요. 딱한 노릇이에요. 저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벌써 제 작년에 총각 딱지를 땠는데요. 그 뒤로 지금껏 여자가 부족한 적은 없었습니다. 여자는 쉽게 구할 수 있어요. 복잡할 게 없죠. 취향에 얽매이지만 않으면 훨씬 다채로운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훨씬 인간적이구요. 거기에 약간의 의리만 있으면 여자들도 딱히 자신의 것을 아끼지 않아요. 하지만 선생님 같은 분들에게는 취향이 얼마나 중요한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에게는 취향이야 말로 모든 것이죠. 선생님은 쓸데없이 똑똑하거나 쓸데없이 백치인 여자들을 좋아하시죠? 아드님도 그런 선생님을 닮았나요?

아, 선생님의 아들이 숫총각이라는 게 제 얘기의 요점은 아닙니다. 소녀라면 모를까 소년에게 경험이 없다는 게 그리 큰 얘깃거리는 아니죠.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아드님이 선생님의 모델 중 한명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아냐구요? 그냥 알게 되었어요. 모르기가 더 어렵죠. 아드님이 그 모델 그림 주변을 기웃거리는 걸 여러 번 보았거든요. 한 번은 적절치 않은 시간에 찾아와서 선생님이 그 모델을 그리는 모습을 훔쳐보기까지 했습니다. 모델이 누구인지 궁금하시겠죠. 저는 아드님의 명예를 생각해서 모델의 이름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힌트를 드리자면 선생님의 그림 중에서 물감으로 두텁게 펴 바른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자에요. 선생님도 누구인지 짐작하시리라 믿습니다. 물론 저는 선생님과 그 모델의 관계를 알고 있습니다. 다만 선생님의 아드님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죠. 자고로 집안 마다 전해 내려오는 기질과 예감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선생님, 혹시 제가 선생님의 집안 얘기를 하는 게 불쾌하신가요? 유세를 떨려는 건 아니지만, 저는 선생님이 짐작하시는 것보다 선생님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비밀이 되어야만 마땅한 것들도 몇 가지 있지요. 남들이 알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일들이요. 제가 남들보다 기민해서 알아차린 건 아니에요. 선생님이 제 앞에서는 체면을 차리지 않았기 때문이죠. 아무리 훌륭한 신사라도 혼자 있을 때는 가랑이를 긁고 냄새를 맡아보듯이, 저도 본의 아니게 선생님의 그런 모습을 많이 보았던 것 뿐입니다. 혹시 그게 선생님이 저를 싫어하는 이유인가요?

그렇다고 대답해 주세요.

상대방이 왜 저를 싫어하는지 알고 나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대부분 마땅한 이유가 있고 그 이유가 솔직하기 때문이지요. 설사 선생님이 저를 미워하신다 해도 전 괜찮습니다. 미움이 주는 특유의 활력이 나쁘지만은 않거든요. 피를 따듯하게 데워주지요. 그러니 선생님께서 아무리 저를 집으로 돌려보내려고 하셔도 저는 곁을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 언젠가는 선생님도 저를 싫어하는 일에 익숙해지실 테니까요. 아니, 그걸 좋아하게 되실 걸요. 그런 관계야 말로 애정이나 믿음보다 더 끈끈하기 마련이지요. 문제는 오히려 애정이에요. 사람을 미워하는 데는 이유가 있지만 사람을 좋아하는 데는 이유가 없거든요. 그런 애정은 저를 불안하게 합니다. 애정 특유의 매운 후추 냄새가 코를 찌르고 불투명한 온기가 미역처럼 목에 감겨요. 사람은 결국 미움이 아니라 애정 때문에 목을 매달 겁니다. 두고 보세요.

선생님, 혹시 제가 염세가라고 생각하시나요? 천만의 말씀이에요. 저는 현실에 비하면 지나치게 낙천적입니다. 아니, 실은 뛰어난 낙천가죠. 가끔 제 낙천성에 진절머리가 처질 정도인데요. 어쩌면 이리도 한가한지 말입니다. 하지만, 이건 비밀인데, 제 낙천성은 실은 가불된 거랍니다. 제 삶 전체에서, 제 과거에서, 제 미래에서, 마구잡이로 끌어다가 쓰고 있는 거예요. 심지어 햇빛에서, 구름에서, 건물 유리에서, 자동차에서, 광고판에서, 그림 속 여자에게서, 선생님에게서도 끌어다 쓰고 있지요. 매일 아슬아슬하게 파산을 면하고 있는 겁니다. 간신히 지연시키고 있는 거예요. 햇볕을 쬐는데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야하는 냉혈동물처럼요. 그것은 지루하고, 끈질기고, 인위적인 일입니다. 모든 순간이 인위적이라는 게 어떤 건지 선생님은 짐작할 수 있으시겠어요? 만약 끌어다 쓸 낙천성이 바닥나버리고 나면 저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그 때서야 세상을 제 모습 그대로 보게 될까요?

사실은 전에 딱 한번 본 적이 있습니다. 자살한 제 아버지의 얼굴에서요.

선생님, 다시 말하지만 저는 자살하고 싶지 않습니다.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계속 말 할 수 있어요. 나는 자살하고 싶지 않다. 나는 자살하고 싶지 않다. 나는 자살하고 싶지 않다. 나는 자살하고 싶지 않다. 나는 자살하고 싶지 않다. 나는 자살하고 싶지 않다. 나는 자살하고 싶지 않다. 나는 자살하고 싶지 않다. 나는 자살하고 싶지 않다. 나는 자살하고 싶지 않다. 나는 자살하고 싶지 않다. 나는 자살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만약 이 생각이 24시간 밤낮으로 끊임없이 저를 따라다닌다면 아무리 자살하고 싶지 않아도 결국은 스스로 방아쇠를 당기지 않고는 못 견딜 겁니다.

이런, 어느새 정오가 지났네요. 이제 곧 점심식사를 마친 선생님께서 오실 시간입니다. 언제나처럼 예의 그 친구분들도 같이 오셔서 진한 커피를 한잔씩 마시겠죠. 그리고는 소란스럽고도 유쾌한 대화를 나누실 겁니다. 태초에 빛이 먼저 있었는지 말씀이 먼저 있었는지 따위의 얘기들이죠.

이제 저는 청소를 마저 해야겠습니다. 봄에는 먼지가 너무 많이 날려요. 그게 밝은 햇빛 탓인지 피어 오른 먼지 탓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아이고, 이런, 큰일이네요. 선생님께서 창문 옆 기둥 위에 튀어나와 있는 못을 뽑아버리라고 몇 번이나 이르신 걸 또 깜빡했습니다. 분명 크게 화를 내실 텐데요. 어쩌면 집으로 보내버리겠다고 또 으름장을 놓으실지도 몰라요. 죄송합니다, 선생님. 어째서인지 그 일만은 자꾸 깜빡깜빡 잊어버리거든요. 모든 중요한 일들이 그렇듯이요. 내일은 꼭 그 못을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약속드리죠.


선생님의 벗, A 올림.



추신 - 만약 제가 자살해서 선생님이 이 유언장을 보게 된다면, 제 초상화 속의 모자 색깔을 바꿔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밝은 녹색이 괜찮을 것 같아요.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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