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은 거대한 황금 조각상이었다. 언제부터 그리고 왜 이 조각상이 ‘고운’으로 불리게 됐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전해 내려오는 얘기도 사람들의 견해도 분분했다. ‘곱다’는 형용사에서 유래되었다는 말에서부터 ‘古韻 예스러운 운치’, ‘高韻 고상한 운치’, ‘高運 좋은 운’, ‘孤雲 외따로 떠도는 구름’, ‘高雲 높은 구름’ 등의 한자로 다양하게 풀이되기도 했다. 멀리 퉁구스어에서 왔다느니 더 멀리 캘트어라는 말까지 있었다. 그렇다면 독자들은 왜 작가가 하필 ‘고운’이라는 이름을 이 조각상에 끌어다 붙였는지 의문이 생길 것이다. 물론 세간에 잘 알려진 어느 시인의 이름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나는 그 사람의 시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고운’이 아닌 다른 명칭이었어도 별 상관은 없었다. 그저 약간의 개인적인 계기가 있었고, 어쨌든 어떤 이름이 되었든 간에 결정을 내려야했다. 그나저나 '고운'이 한글이나 한자일 수 있다는 건 이 왕국이 중국, 한국, 일본처럼 동아시아 국가라는 걸까? 딱히 그런 생각을 치밀하게 했던 것도 아니었다.
이 거대하고 아름다운 황금 조각상 ‘고운’에 대해 알려진 건 거의 없었다. 약 천 년 전부터, 혹은 더 오래 전,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알려져 있지 않은 지극히 오래 전부터 이 조각상은 이곳에 있었다. 한 위대한 예술가가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었지만 예술가의 이름은 고사하고 출신이나 성별조차 전해 내려오지 않았다. 전설에 의하면 그 예술가는 반신반인이었다고 하며,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반인반수였다고 한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부리로 쪼아 ‘고운’을 조각하는 검은 깃털의 반인반조에 대한 이야기가 크게 유행하기도 해서, 그 모습을 그린 그림이 소원성취용 부적으로 쓰이기도 했다. 기원과 단절된 덕분에 ‘고운’은 언제나 고전적이면서도 현대적이며 신비하면서도 세속적이어서 대중들의 경외심을 끊임없이 자극했다.
조각상은 왕국에서 단연 첫 번째로 손꼽히는 보물 중의 보물이었다. 그것은 왕궁 가장 깊숙한 곳, 5겹의 대문을 지나야만 당도할 수 있는 황제의 처소 바로 옆방에 보관되어 있었다. 아니, 이야기가 더 거창해지도록 5겹의 대문과 36개의 작은 문을 통과해야만 닿을 수 있는 곳이라고 하자. 평소에는 황제와, 청소를 담당하는 어린 나인(內人) 외에는 아무도 그 조각상을 볼 수 없었다. 황제가 얼마나 자주 조각상을 보기 위해 그 방을 출입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것은 왕궁의 기밀 사항 중 하나였다. 다만 어린 나인은 매일 아침마다 청소를 하기 위해 그 방에 들어가곤 했다. 그 나인이 장님이라는 소문이 있었지만 나인 중에 장님은 한 명도 없다고 왕실은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하지만 곧 또 다른 소문이 돌았는데 나인은 눈을 가린 채 나체인 상태로 그 방에 들어가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번에도 왕실은 터무니없는 풍문이라고 일축했다. 그 외에도 왕궁 주변으로 ‘고운’에 대한 몇몇 기발하고 선정적인 유언비어들이 떠돌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5겹의 대문과 36개의 작은 문 가장 안쪽은 은밀하고 경이롭고 또 지루했을 것이다. 황금빛은 두꺼운 커튼 뒤에서 점차 창백해졌을 것이고, 아무리 조각상을 열심히 닦아도 먼지가 묻어나지 않아 어린 나인도 허탈해졌을 것이다. 이제 이야기가 더 진행 되려면 그 5겹의 대문과 36개의 작은 문을 모두 활짝 열어야 한다. 가을밤처럼 멀리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야 한다. 사람들이 옷깃을 여미며 뒤를 돌아봐야 한다. 작가와 황제가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말이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 궁궐 속에 꽁꽁 숨겨져 있던 ‘고운’도 매년 정월 초하루가 되면 왕궁 앞 광장 한가운데에 세워져 누구나 볼 수 있도록 했다. 그것은 까마득히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온 전통이었다. 왕궁에서 4대째 황제를 섬겨온 가장 나이 많은 시종 역시 그 행사를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었다고 확언했다. 어쩌면 그것은 황제들의 고약한 취미였는지도 모른다. 한밤중에 자신의 아내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내를 불러내 손님들에게 술을 따르게 하는 남편처럼 말이다. 그날 밤 남편은 남자들의 탐욕스러운 시선을 한 몸에 받은 부인을 더 사랑하게 되고 성욕도 더 강해져서 그날 밤의 정사가 더 즐거웠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 5겹의 대문과 36개의 작은 문 안 밀실에서 ‘고운’이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건 황제도 작가도 아닌 ‘고운’ 자신의 힘이었는지도 모른다. 하나의 그림이, 하나의 조각이, 하나의 소설이 탄생하는 건 과연 누구의 힘인가. 지금 독자들이 읽고 있는 이 소설이 쓰여지고 있는 건 어째서인가. 드넓은 바다에서 낚은 고기가 자신의 것이라고 큰소리치는 낚시꾼처럼 자신의 작품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고 큰소리치는 작가가 있다면 그는 행복한 인간이다.
정월 초하루가 되면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고운’을 보기 위해 왕궁 앞으로 몰려들었다. ‘고운’을 봤다는 건 큰 얘깃거리였고, 살면서 ‘고운’을 몇 번 보았느냐로 자신의 위신을 세우기도 했다. ‘장님 고운 보기’ ‘황금도 쪼지 않으면 고운을 이루지 못한다’ ‘고운 나고 사람 났지 사람 나고 고운 났나’와 같은 속담은 ‘고운’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수많은 시와 노래가 ‘고운’에게 바쳐졌으며 한 해에도 수백 개의 논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수천 가지가 넘는 연구이론들 속에서 여전히 새로운 관점과 해석들이 발표된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영원한 현대성’, ‘물질로의 초월’, ‘가혹한 평화’ 등은 ‘고운’에 대한 대표적인 명구가 되었다. 가장 최근에 왕립학회로부터 주목받은 논문으로는 [고운, 미학의 반미학의 미학에 대하여]가 있다. 뭐든지 동어반복을 사용하면 심오한 느낌을 주기 마련인데 ‘고운, 반미학의 미학의 반미학에 대하여’라고 했어도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내가 쓴 글 중에도 ‘확신에 대한 확신에 대한 불신’이라는 제목의 소설이 있는데 이런 표현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해서 독자들이 언짢을 필요는 없다. 단언컨대 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왕국의 모든 아이들은 아기 때부터 ‘고운’에 대한 얘기를 들으면서 자랐다. 부모들은 칭찬할 때도 혼낼 때도 고운을 언급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는 마치 부모가 한 명 더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아니, 심지어 ‘고운’이야 말로 진짜 부모이며 부모들은 양육자에 불과한 듯 했다. 아이들은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최소한 한 번은 그 조각상을 직접 보는 것이 관례였다. 대부분은 아이가 10살이 되기 전에 가족이 함께 조각상을 방문했고, 십대가 된 아이들은 혼자서 ‘고운’을 보러 나서곤 했다. 특별한 이유 없이 스무 살이 될 때까지 ‘고운’을 보지 못하는 건 매우 드문 일이었고 부끄럽게 여겨졌다. 물론 그 정도로 무기력하고 냉담한 사람이라면 애초에 부끄러움조차 없었을 것이다. 아니, 계속 생을 이어가는 것조차 어려웠을 게 틀림없다. 아름다움이라는 수면 위가 아니라면 대체 어디에 삶이라는 배를 띄우고 노를 저을 것인가. 수면의 반짝임과 수평선의 신비, 그리고 바닥을 가늠할 수 없는 물속에 대한 두려움 없이 무슨 힘으로 아침마다 잠에서 깨어난단 말인가.
고운을 처음 봤을 때 어떤 이들은 꿈을 꾸는 것 같았다고 했다. 반대로 어떤 이들은 꿈에서 깨어나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했다. 사람들은 쪼글쪼글하던 자신의 삶이 풍선처럼 팽팽하게 부풀어 올라 두둥실 떠오르는 걸 느꼈다고 했다. 햇빛과 먼지로 퇴색되었던 세상에 다시 물기가 오르고 윤기가 흐르기 시작했다는 표현도 그럴 듯했다. 맑고 선명한 황금빛이 그들의 온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서 기분 좋은 무게감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가 이 세상과 어떤 연관이 있다는 느낌, 고통 보다는 기쁨이 더 소중하다는 느낌, 그래도 한번쯤 태어나봄직하다는 느낌이 그들의 목과 무릎 관절에 힘을 불어넣었다. 의심은 의문으로, 공허는 여백으로, 결핍은 농담으로 바뀌었다. 비바람이 치고 누런 낙엽이 우수수 흩어지는 스산한 날이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들 ‘고운’에 대한 노래를 흥얼거렸다. 이 세상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사람 누구도 행복해질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이 세상 어딘가에 ‘고운’이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사람들은 행복해지곤 했다.
글쎄, 이런 낙천적인 문학적 수사를 싫어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특히 ‘행복’이라는 근본도 없고 정체도 불확실한 단어의 남발에 대한 지적은 마땅하다. ‘행복’은 부드럽고 인간적인 감성을 불러일으키지만 지극히 시적인 개념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것의 실존을 쫓느라 인생을 낭비한다. 마치 거짓 보물지도를 들고 평생 바다를 헤매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문학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인간을 실제 인간보다 더 인간답게 그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고로 문학이 인간을 흉내 낸 게 아니라 인간이 문학을 흉내내 왔다. 말하자면 우리가 신봉하는 인권이라는 것도 우리를 위한 권리가 아니라 문학이 창조해 놓은 인간을 위한 권리인 것이다. (지금은 인간이나 문학이나 모두 영화를 흉내 내고 있긴 하지만.) 물론 흉내 내는 게 꼭 나쁜 건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흉내 낼만한 대상의 부제와 부족에 대해 호소한다. 우리는 매 순간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는 없으며 자기 자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실제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다면적이며 독특하고 절망적이라고 믿을 필요가 있다. 최소한 그 정도 미학적 가치는 있는 존재라고 자부해야 한다. 그러니 무언가를 흉내 내는 건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건전한 일이기도 하다. 거짓 보물지도 같은, 문학 같은, 나 자신 같은 가증과 기만이야 말로 우리 삶의 든든한 기반인 것이다.
‘고운’에 대한 사람들의 사랑은 당연하게도 그만큼이나 거대한 시장을 형성했다. 그리고 그 시장 한가운데에는 왕궁이 있었다. 우선 왕궁은 ‘고운님’이라는 복권을 판매하고 있었다. 꿈속에서 ‘고운’을 본 사람들은 다음 날 반드시 이 복권을 사는 게 철칙처럼 되어 있었다. 복권에는 ‘고운’이 인쇄되어 있는 노란색 금박지가 붙어있고, 그 금박지를 벗겨내면 6개의 숫자들이 그들의 운명을 알려주었다.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 즉 ‘고운님’들은 언제나 첫 번째로 고운에게 감사를 표했다. 심지어 당첨금의 10%를 고운에게 바치는 사람도 있었다. 이 왕궁에서는 누구나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어김없이 고운에 대한 꿈을 꾸기 마련이어서 복권 판매금은 왕궁 재정의 큰 버팀목이었다.
거기다가 왕궁에서는 대리석이나 청동으로 만든 여러 가지 크기의 ‘고운’ 복제품을 높은 가격에 판매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가정은 집에 한 두 개씩 이 복제품을 갖추어 놓고 있었고, 종류별로 혹은 크기별로 수집하는 사람도 많았다. 황제의 탄생일에 내놓는 한정판 같은 경우에는 며칠 전부터 밤을 새워가며 줄을 서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돈이 부족한 서민들을 위해서는 탁본도 준비되어 있었다. ‘고운’의 표면에 먹칠을 한 뒤 종이로 찍어내는 방식이었는데 이것이 또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사람들은 열정적으로 그 종이쪼가리들을 모아들였다. 혹여 같은 위치의 탁본이라도 정확히 똑같은 탁본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몇 만장이라도 수집할 수 있었다. 왕궁의 인증서가 없다면 지저분한 휴지쪼가리에 불과했을 종잇조각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날개 돋친 듯 거래되는 건 거의 신비에 가까웠다. 어째서 제작비도 몇 푼 들지 않은 이 종이가 평론가들의 감탄을 자아내는지, 왜 이 탁본을 구입하기 위해 가난한 이들마저 너도나도 달려드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 타당성을 의심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었다. 파랗게 칠한 화면 한가운데 하얀색 점 하나를 찍어 놓은 100호짜리 캔버스를 5억 원을 주고 사는 건 대체 얼마나 지적인 행위인가. 시장에서 구입한 삼나무 틀, 삼베 천조각, 파란색과 흰색 유화 물감이 합쳐져서 5억 원의 가치로 재탄생된다는 건 일종의 기적일 것이다. 예전 연금술사들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유리 비커니 불타는 가마 따위는 집어 치우고 너도나도 예술가가 되었을 텐데. 수은으로 황금을 만들어 내는 것보다 훨씬 더 남는 장사일 테니까.
석공이 처음 ‘고운’을 본 건 7살 되던 해였다. 부모님 손에 이끌려 사람들을 헤치고 조각상 앞에 섰을 때, 그는 머리가 빙그르르 도는 것 같은 현기증을 느꼈다. 늦가을 노을처럼 부드럽게 퍼지는 고요하고 따듯한 황금빛, 비대칭으로부터 조화를 이끌어 내는 생동감과 균형감, 섬세한 질감의 차이를 절묘하게 교차시키는 고도의 기교, 그리고 그 모든 걸 아우르는 고결하고 진실한 인간미. 이보다 아름다운 것을 그는 결코 볼 수 없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단순히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하지만 그 외에는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매우’나 ‘엄청’, ‘대단히’ 같은 부사를 사용하는 건 오히려 ‘아름다움’을 저열하게 만드는 짓이었다. 단어는 어째서 이토록 짧고 뭉툭한 칼날 같은가.
독자들도 눈치 챘겠지만, 석공의 머릿속에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는 건 작가인 내 머릿속에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는 뜻이다. ‘아름답다’보다 더 아름다운 단어를 찾기 위해 나는 이 부분에서 20분 이상을 허비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어휘력 부족은 언제나 내 발목을 잡아왔다. 어휘력이 문학의 본질처럼 여겨지는 이 바닥에서 그것은 작가로서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그러니 난 그저 ‘아름답다’라고 쓰고 그 결과는 독자들에게 맡기는 편이 좋겠다.
아니, 아니다. 그럴 순 없다. 나는 이 부분을 좀 더 짚고 넘어가야겠다. 설사 독자들은 관심이 없을지라도 말이다. 물론 독자들은 관심이 없다. 독자들이란 단번에 위대함을 원하기 마련이다. 그건 납득할 만하다. 대단하지도 않은 글 따위를 공들여 읽어서 무엇 하겠는가. 대단할 수 없다면 대단함을 그럴 듯하게 흉내라도 내야하는 것이 작가들의 운명이다. 하지만 화려한 문장으로 화장할 수 있다고 해서, 대충 뜻이 뜯어 맞춰진다고 해서,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고 해서 얼렁뚱땅 넘어갈 수만은 없다. 물론 그게 내 수준의 바닥을 들어내겠지만 나는 누군가를 실망시킬 명성이 없으니 차라리 다행한 일이다. 사실 ‘아름답다’는 말에는 그 진부하고 협소한 사용 이상의 난처함이 있다. 어떤 단어들은 유난히 세밀한 촉감을 가지고 있는데 ‘아름답다’는 단어가 바로 그렇다. 그런 단어는 손가락 안에 쥐고 이리저리 주물럭거리며 굴려보게 된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풍경이나 꽃이나 모자나 조각상이나 사람에 대해 아름답다고 평하는 건 다소 김빠지는 일이다. 그런 것들은 아름다움이나 추함과는 아무 상관없이 어쨌든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늘 ‘존재’라는 거만한 단어를 회피하려고 노력하지만 때때로 달리 방법이 없다.) 존재는 그저 존재하고 있으며, 그건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다. 용인할 수도, 견딜 수도 없는 일이지만 그건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가 결국 그것을 용인하지도, 견디지도 않는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가 대상의 미학적 가치를 알지 못한다는 건 대상과의 거리를 알지 못하는 것이며, 대상과의 거리를 알지 못한다는 건 내 자신의 위치를 알지 못하는 것이며, 내 자신의 위치를 알지 못한다는 건 스스로 눈을 감고 사물화 되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아름다움과 추함의 시선을 생산해낼 수밖에 없다. 밀어내고 다시 끌어당기고 다시 도망가고 다시 접근하는 것. 결코 가질 수 없지만 결코 잊을 수도 없는 것. 아름다움이란 그러한 진동 자체이다. 진동하는 모든 것은 – 추함조차 – 아름다움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황금 조각상이야 말로 끔찍하고 절대적으로 (나는 결국 부사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아름답다. 이것은 혼신의 아름다움이다. 그 외의 것은 아무 것도 될 수가 없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에 무엇이 문제였을까? 아름다움에 죄가 없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아름다움에는 그 만큼의 반동이 있다는 것 또한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아름다움은 결코 ‘선’이 아니다. 아름다움은 선한 것도, 평화로운 것도, 낙관적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아름다움’은 본질적으로 사람이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진동은 우리의 영혼과 뇌와 육체를 믹서기처럼 깨부순다. 그것은 비인간적인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적인 것을 가능하게 하는 비인간적인 틈새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름다움의 부재를 견딜 수 없는 것만큼이나 아름다움의 존재 역시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기 위해 자신들이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낸다. 결국 황제마저도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었던 걸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