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조각 (3)

by 곡도




정월 초하루인 오늘, 저녁노을이 지기 직전, 광장 한 가운데 세워진 ‘고운’은 족히 천 명은 될법한 거지 떼들에게 둘러싸였다. 그것 역시 왕국의 오래된 관례 중 하나였다. ‘고운’이 왕궁으로 물러가기 전 잠시 동안 거지들이 조각상에 접근하는 게 허락되었다. 그것이 아름다움 앞에서는 귀천이 없다는 평등의 소신인지, 동정심에 의한 배려인지, 미학적인 대비 효과를 노린 것인지, 구경거리를 위한 이벤트인지는 분명치 않았다. 하지만 정작 거지들은 사람들의 가지각색의 시선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았다. 더러운 누더기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두르고 영양실조와 무기력증으로 비쩍 말라빠진 그들은 잠시나마 위안을 받기 위해,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기 위해, 바스락거리는 낙엽처럼 한없이 굴러 떨어지지 않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황금 냄새를 맡기 위해 더럽고 새까만 손들을 뻗어 ‘고운’의 발치에 매달렸다. 모두 흥분해서 신음 소리를 내질렀고 그 중에는 눈물을 보이는 자들도 있었다. 그럼 사람들은 주머니에 있는 동전들을 꺼내 거지들에게 던져주곤 했다. 동전들은 곧바로 거지들의 속옷 속으로 굴러 떨어졌다. 거지들은 정말 ‘고운’을 보러 온 걸까? 아니면 구걸을 하러 온 걸까?

위대한 작가들이라면 이 질문에 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깜짝 놀랄 정도로 정확하게 사람을 일반화하고 구체화 시키는 통찰력이 있으니까. 그들은 사람들에게 일관성과 캐릭터를 부여한다. ‘고뇌’라는 단어를 만들어낸 것도 작가들이다. 사람들의 이마에 숙명의 표식을 새겨주고 눈동자를 짙게 물들이고 채취가 진동하게 한다. 그래, 그게 바로 문학이지. 하지만 나에게는 그게 어렵기만 하다. 사람의 모순을 일목요연하게 구분하고 정리하고 선언하는 게 도무지 가능한 것 같지가 않다. 예를 들면 이렇게 말이다.

[이 목사님 이름은 요릭이었다. (중략) 쉽게 말해 그는 닳아빠진 데가 없이 세상 물정에 어두운 사람이었고, 흔히 정략적 절제가 요구되는 주제의 담화에서도 전혀 분별없이 바보처럼 굴었다. 요릭이 받아들이는 인상은 딱 한 가지뿐이었으니, 그것은 화제가 되고 있는 행위의 본질에서 나오는 인상이고, 그는 그 인상을 어떤 완곡어법도 없이 그대로 평이한 영어로 번역했으며 – 너무나 자주 인물이나 장소, 시간에 대한 구별을 무시했다. - 따라서 참으로 한심하거나 옹졸한 행동거지에 대해 언급할 기회가 오면, 그는 그 일의 장본인이 누구인지, - 그가 어떤 지위의 인물인지, - 앞으로 자기에게 피해를 줄 힘이 있는 인물은 아닌지, 그런 것을 따져 볼 겨를도 없이 – 그게 더러운 행동이었으면, - 아무 망설임 없이 그냥 – 그 사람 더러운 친구야 라고 선언하는, - 뭐 그런 식이었다. - 게다가 그의 논평은 흔히 명구로 끝나거나 표현상의 유머나 익살로 생기를 얻게 되는 불운까지 겹쳐서 요릭의 경솔함에 날개를 달아 주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마음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을 아무런 격식 없이 내뱉을 계기를 그가 찾아다니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피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 자신의 재치와 유머 - 조롱과 익살을 주변에 퍼뜨릴 유혹과 끊임없이 맞닥뜨리게 되었고, - 스스로 모으지 않았어도 기회는 얼마든지 찾아왔다. 그 결과가 무엇이었는지, 그 때문에 요릭이 어떤 재앙을 당했는지는 다음 장에서 읽게 될 것이다.]

한 사람에 대한 이런 명쾌한 정의는 나로서는 도저히 쓸 수가 없다. 너무 어려운데다가 비위에도 맞지 않는다. 그러니 이제껏 내가 작가로 성공하지 못한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이 인용구를 읽은 당신 역시도 당장 내 책을 내려놓고 저 ‘다음 장’을 읽으러 달려가고 싶겠지. 벌써 오래된 이웃처럼 친근해진 요릭이 자신의 기질과 운명 때문에 어떤 대단한 재앙을 당했을지 궁금할 테니까. 이런, 아니, 독자들은 오해하고 있다. 맹세하건데 난 지금 비꼬는 게 아니다. 이상하게도 난 오히려 진심일수록 그런 오해를 받는다. 나는 내 능력의 부족을, 평생 노력했으나 성취하지 못했던 문학적 실패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 단락을 ‘거지들은 아름다움과 적선을 모두 원했으며, 어쩌면 그 둘을 구분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진부한 대답 중에서도 가장 진부하고 비겁한 대답 중에서도 가장 비겁한 대답으로 얼버무리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은 아마도 지금쯤 이 독서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처음 각오했던 것보다 더 너그러운 이해와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거지들은 아름다움과 적선을 모두 원했으며, 어쩌면 그 둘을 구분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아름다움 때문이든, 적선 때문이든, 둘 다 때문이든, 아니면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한 (더 정확히 말하면 작가가 생각지도 못한) 다른 어떤 이유 때문이든지 간에, 거지들은 매년 정월 초하루마다 ‘고운’을 찾아왔다. 황제의 전 황제의 시절에도 그랬고, 또 그 황제의 전 황제의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말하자면 거지들의 전 거지들의 시절에도 그랬고, 또 그 거지들의 전 거지들의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왕에게 만큼이나 거지들에게도 판에 박힌 행사였고 모두들 각자의 역할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모든 전통이 갖는 신성함의 본질이다. 영원히 반복함으로써 영원히 초월하는 것. 하지만 작년 정월에는 다른 때와는 달리 작은 소동이 있었다. ‘작은’ 이란 표현이 작위적인데다가 반어법에 가까운 게 사실이지만, 어차피 상대적인 표현으로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작년에도 정월 초하루 행사가 끝나고 노을이 질 무렵 언제나처럼 조각상 주위로 거지들이 모여들었다. 그 날 거지들이 특별히 더 더러웠다거나 더 소란스러웠던 건 아니었다. 거지들이야 늘 그만큼 더럽고 또 그만큼 소란스럽기 마련이니까. 그들은 하나같이 사팔뜨기가 되어 사람들이 던져 주는 동전들을 쫓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머리 위에 낙엽 부스러기가 잔뜩 붙어있고 다른 거지들만큼이나 발이 더러운 거지 하나가 동전을 주울 생각은 않고 엉거주춤 멈춰 서서 ‘고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성병 때문에 코가 문드러지고 땟국물로 새까만 얼굴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먼 눈빛만은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축축하게 번들거렸다. 어떤 꿈, 어떤 생각, 어떤 슬픔. 그 때 하루 종일 침묵을 지키고 있던 황제가 별안간 왕좌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그 거지에게 달려들어 뺨을 있는 힘껏 후려쳤다. 덩치 좋은 황제가 불시에 갈긴 따귀에 거지는 단단한 돌바닥을 뒹구르며 비명을 내질렀다. 그 요란한 비명소리를 황제는 꼿꼿이 서서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모두가 새파랗게 겁에 질렸다.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감히 황제에게 이유를 따져 묻는 사람도 없었다. 다만 딱히 무슨 짓을 하지 않아도, 눈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거지는 본래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지 않는가. 비참함에 비참함을 조금 더한다고 해서 무슨 대수냐고 사람들은 애써 납득해 버렸다.

1년이 지난 오늘도 거지들은 ‘고운’을 보기 위해 왕궁 앞으로 모여들었다. 작년의 소동 때문에 어쩌면 이번 해에는 거지들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건 기우에 불과했다. 거지들은 납득할 수 없는 일들에 익숙했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뻔뻔하고 자유로웠다. 그렇다면 작년에 황제에게 따귀를 맞았던 그 거지도 다시 왔을까? 사람들은 머리에 낙엽을 뒤집어쓰고 코가 문드러진 검은 얼굴의 거지를 찾기 위해 주변을 샅샅이 살펴봤지만 확인할 길이 없었다. 거기에는 너무나 많은 거지들이 있었고 그들은 서로 비슷해 보였기 때문이다. 소문에 의하면 그 거지는 그 날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고도 하고, 또 다른 소문에서는 왕에게 큰돈을 하사받고 부자가 되었다고도 했다. 후자의 소문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전년보다 더 많은 거지들이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호응이라도 하듯 더 많은 동전들이 그들의 머리 위로 소낙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어쩌면 사람들은 또다시 벌어질지도 모르는 진귀한 볼거리를 위해 미리 관람료를 지불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황제는 말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에는 아무 표정이 없었지만 눈빛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아니, 날카로운 건 그의 권력인지도 모른다. 그 정도 권력을 가지게 되면 바보 천치라도 눈빛에 살기를 띌 것이다. 그 때 황제는 돌연 천천히 왕좌에서 일어나더니 사람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고운’을 천 개의 조각으로 쪼개어 거지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이것이 황제의 명이었다. 아무런 부연도 단서도 없었다. 단지 저 한마디만 남기고 황제는 자신의 5겹의 대문과 36개의 작은 문 안 처소로 사라졌다. 왕국 전체가 엄청난 소란에 휩싸였다. 거지 한명이 따귀를 맞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소란이었다. 충격, 혼란, 슬픔, 망연자실 속에서 터져 나오는 비탄, 그 모든 걸 여기에 자세히 적지는 않겠다. 나 자신만큼이나 독자들을 지루하게 만들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저 온 왕국이 발칵 뒤집어졌다고 하자. 하지만 황제가 내린 명령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고 즉각 이행되어야만 했다. 만약 황제의 명령이 돌이킬 수 있고 즉각 이행될 필요가 없다면 아예 황제 같은 건 필요가 없을 것이다. 황제는 쉽게 이해되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부당한 수수께끼가 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까.

그리고 바로 그것이 민주주의의 치명적인 맹점이기도 하다. 속속들이 알려진 한낱 비속한 인간이 신성함이 없는 절대 권력을 손에 쥐는 것. 그리하여 국가의 기원이나 목표에 그 어떤 신비도 없는 것. 그리하여 국민의 긍지와 존엄이 퇴락하는 것. 그리하여 탄생한 개인들은 부모도 없이 고아가 되어 법치의 거리를 떠돈다.

어쨌거나 그 날벼락 같은 황제의 명을 수행하기 위해, ‘고운’을 천개의 조각으로 쪼개기 위해, 오늘 밤 (아마도 독자들이 이미, 솔직히 말하자면 나 자신도, 까맣게 잊어버렸던) 석공이 이곳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동안에도 내내 자신의 가혹한 운명을 한탄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다른 이야기들이 모두 물러가고 조각상과 홀로 남게 되자, 석공은 잠시나마라도 자신이 ‘고운’을 독차지했다는 사실에 온 몸을 떨었다. 언제나 먼발치에서만 바라보던 ‘고운’이었다. 순전히 ‘고운’ 때문에 그는 감히 황제를 질투하기도 했다. ‘고운’은 한 사람의 차지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과격한 마음을 삼키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 어찌 되었건, 내일 아침까지는, ‘고운’은 온전히 자신의 소유였다. 마음껏 바라보고 마음껏 만질 수 있었다. 얼마나 무수히 이런 순간을 상상했던가. 그는 ‘고운’의 손에 조심스럽게 자신의 이마를 기대어 보다가 와락 조각상을 부둥켜안았다. 별안간 참을 수 없는 설움이 밀려왔다.

7살 때 처음 ‘고운’을 본 뒤 그는 ‘고운’ 같은 작품을 만드는 위대한 조각가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왜 안 되겠는가? 그는 아직 어렸고 그의 앞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었다.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그는 ‘고운’을 떠올리며 단단히 각오를 다졌다. 저 위대한 조각상을 만든 위대한 조각가도 분명 자신처럼 어리고 막막했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라고. 의혹과 의혹 사이를 맴돌던 어리석은 날들이 있었을 것이고, 견디다가 끝내 포기하려 했던 위기의 순간도 있었을 것이라고. 단념하라고 설득하는 다정한 친구들과 험담을 늘어놓으며 멸시하는 선생들도 있었을 것이 아닌가. 그는 그 모든 걸 이겨낼 각오가 되어 있었다. 아무 것도 두렵지 않았고 무엇이든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진부하지만 절실한 표현처럼, 할 수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단 하나, 재능이 없었다. 모든 것이 없더라도 꼭 있어야 할 그 한 가지가 말이다. 그가 그걸 인정하는 데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째서 자신에게 재능이 없다는 사실은 본인이 가장 늦게 깨닫게 되는가.

아, 혹시 독자들이 오해할까봐 덧붙이건 데, 나는 지금 석공에게 나 자신을 이입하고 있는 게 아니다. (만약 독자들이 그렇게 느꼈다면 참으로 유감이다.) 내가 질색 하는 소설이 두 종류 있는데 그 중 한 가지가 ‘성장 소설’이고 다른 하나가 바로 ‘자전적인 소설’이다. 나는 내 자격지심을 대신 하라고 내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을 종용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나는 재능은 없지만 그 정도로 비참하지는 않다. 그러니 석공과 나 사이에 여러 가지 공교로운 공통점이 있다 하더라도 그건 우연의 일치이거나 독자들의 과장된 상상일 뿐이라는 걸 분명히 밝혀둔다. 작품과 독자들은 작가로부터 되도록 온전히 그리고 철저히 보호받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의 재능 없는 석공은 결국 조각가가 되지 못했다. (당연하게도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글에서 석공을 조각가라고 부르지 않는 것이다.) 그가 가는 곳마다 재능 있는 사람들이 바글거렸고, 그들조차 자신들의 재능이 부족함을 괴로워했다. 석공은 심지어 그들과 친구조차 될 수 없었다. 그는 모차르트는커녕 살리에르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결국 왕궁 뜰의 디딤돌을 다듬는 석공이 되었다. 그의 가족과 친구들은 왕궁에 취직한 그에게 아낌없는 축하를 보냈다. 아무런 질투나 시기도 없는 단출한 축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성공이란, 그리고 주변사람들이 그에게 기대하는 성공이란 고작 그 정도라는 의미였다.

‘고작’이라고? 저런, 독자들은 내가 지금 예술가의 삶에 비해 일반 사람들의 삶을 격하시키고 있다고 오해할지도 모르겠다. 천만의 말씀이다. 예술가로서의 삶을 거들떠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야 말로 진정한 승리자라고 나는 생각한다. 뭐 하러 진창에 뛰어들어 구정물과 오물로 자신을 더럽히는가. 소위 예술가라는 사람들이 쓸모없는 고통 속에서 스스로를 탕진하도록 내버려두고, 나머지 사람들은 손쉽게 그 결과물을 소비하고 향유하면 그만인데 말이다.

아, 위대한 창조자가 되고 싶다고?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유일자가 되고 싶다고? 헛소리. 분명히 말 하건데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사람은 없으며, 예술은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며, 심지어 예술가 역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제 3자일뿐이다. 작품 위에 누구의 이름을 새기느냐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예술가들은 명의에 기대어 의기양양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예술가들에게 허용된 아량 같은 것이다. 오직 미천한 인간만이 재능이라는 미끼에 걸려 자기 자신을 함부로 예술에 내던진다. 자루 안에 담아두었던 물이 가장 약한 곳을 찢으며 새어 나오듯 예술가는 이 세상의 가장 허술한 구멍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니 진심으로 조언하건데 예술가가 될 생각도 말고 예술가와 가까이 할 생각도 말아야 한다. 독자들은 절대 내 말이 반어법이라거나 풍자라거나 자조적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때로는 독자들이 문학적 독서법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단순한 뜻일수록 전달하기가 더 힘이 든다.) 문자 그대로 말해서, 예술가들은 더러운 족속들이다. 예술적 혹은 세속적 성취와 성공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들이야말로 가장 밑바닥 인간들이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자신이 석공이라는 사실에 울적해지곤 했던 우리의 석공도 독자들이 맘 놓고 비웃어주기를 바란다. 그는 사실 훌륭한 석공이었다. 그가 만든 디딤돌은 안정된 형태와 적당한 크기로 인해 모두에게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소소한 성공은 그를 더욱 부끄럽게 만들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만든 네모반듯한 디딤돌을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는 걸 볼 때마다 혐오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매년 빠짐없이 ‘고운’을 보러가곤 했다. 그것은 기쁨만큼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고운’을 보고 홀로 돌아오는 밤길에 그는 늘 똑같은 생각에 빠지곤 했다. ‘고운’을 알지 못했다면 자신이 좀 더 행복했을까? 하지만 ‘고운’을 볼 수 없었다면 굳이 태어날 필요가 있었을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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