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조각 (4) - 완결

by 곡도




우리가 석공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동안에도 석공은 내내 ‘고운’을 껴안고 있었다. 그의 체온이 전해져 황금 조각상에도 어느덧 따듯한 온기가 돌았다. 석공은 자신이 만든 조각상과 사랑에 빠졌다는 옛이야기 속의 조각가를 떠올렸다. 결국 신의 은총으로 사람이 된 조각상과 조각가의 사랑이 이루어지면서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었지. 그 뒤 두 사람은 어떻게 됐을까? 평생을 해로하면서 남들처럼 번듯하게 살았을까? 그런데 더 이상 조각상이 아닌 그 사람을 조각가는 계속 사랑할 수 있었을까? 그런 서민적인 행복에 만족할 수 있었을까? 에이, 예술가인 그가? 그것이 옛이야기의 함정이다. 뻔하지만 무난한 결말로 황급히 끝을 맺어버린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면면의 삶에서 뻔하지만 무난한 결말은 오직 죽음뿐일 것이다.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과 사랑에 빠지는 건 자신의 작품이 사람을 닮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이 그들의 작품을 닮았기 때문에 그들은 잠시 사람과 사랑에 빠진다. 자신의 작품이야말로 모든 것의 원형이며 그 밖의 것들은 모두 불완전한 복제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전해지지 않은 뒷이야기에서 조각가는 결국 그 여인을 다시 조각상으로 돌려놓아달라고 신에게 애원했다고 한다.

아니, 어쩌면 이야기의 결론은 정 반대였는지도 모른다. 사람으로 변한 조각상이 자신을 만든 조각가와 당연히 사랑에 빠졌을 거라는 가정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모든 예술작품들은 결국 자신의 창조자를 저버린다. 작품들은 자신의 근원보다는 자신의 가능성에만 온통 정신이 팔려있기 때문이다. 한 때 조각상이었던 그 사람도 관계를 강요하는 자신의 창조자에게서 되도록 멀리, 그리고 영원히 떠났을 것이다. 그런데 어디로 떠난단 말인가? 어떤 이들은 독자-관객인 자신들이야 말로 작품의 마지막 사랑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하, 순박한 촌뜨기들 같으니. 하지만 작품은 작가와 사랑에 빠지지 않는 것만큼이나 독자-관객과도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 작품을 향한 작가의 사랑처럼 독자-관객의 사랑 역시 짝사랑으로 끝날 뿐이다. 작가와 독자-관객은 같은 상대를 사랑하고 또 같은 상대에게 실연을 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를 위로하고 질투하며 떠나버린 사랑을 함께 추억한다. 그것은 기묘한 우정이다. 작가와 독자-관객의 관계는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석공은 고개를 들어 물끄러미 조각상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이 아름다움을 목격하는 마지막 증인이라는 사실에 숨이 막혔다. 누구도 다시는 ‘고운’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저 소문만 무성해질 것이며, 복제품과 탁본의 가격이 치솟을 것이며, 복제품의 복제품, 또 그 복제품의 복제품이 만들어질 것이다. 이 완벽한 아름다움의 정수를 산산이 부숴버린다는 건, 유일한 아름다움을 이 세계에서 영원히 지워버린다는 건,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이 아닐까? 하지만 ‘죄악’이라는 존엄하고 신성한 말이 과연 여기에 합당한지 석공은 확신할 수 없었다. 물론 ‘고운’이 세계에서 오직 하나뿐인 위대한 작품인 건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그저 잘 만든 (매우 잘 만든) 조각상에 불과했다. 이 조각상을 부수는 것은 그가 매일 돌조각을 부수는 것과 물리적으로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 사람을 죽이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석공은 이 조각상을 부수는 것에 죄의식을 느꼈고, 동시에 이 조각상을 부수는데 죄의식을 느낀다는 사실에도 죄의식을 느꼈다. 그리고 이 조각상을 부수는데 죄의식을 느낀다는 사실에 죄의식을 느낀다는 사실에도 죄의식을 느꼈다. 이것은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이었다. 그는 자신이 속물적인 몽상가처럼 여겨졌다. 이 아름다운 조각상이 5겹의 대문과 36개의 작은 문 안에서 황금빛 꿈에 빠져 있는 동안 세상은 진짜 고통과 절망과 죄악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작 조각상 하나를 부수면서 손쉽게 고통과 절망과 죄악을 끌어들이다니. 석공은, 그리고 나는, 그것이 부끄럽다.

하지만 석공은 솔직해 지기로 했다. ‘고운’을 만들 때 5살이 된 소년과 소녀 한 쌍을 산채로 끓는 도가니 속에 집어넣었다는 전설은 이제 와서야 어찌되었든 좋았다. 370년 전 이웃 나라와의 전쟁에서 ‘고운’을 지키기 위해 수백 명의 군사가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도 상관없었다. 매년 ‘고운’을 관리하는 데 들어가는 돈이 왕국의 모든 문둥병 환자에게 지원되는 돈보다 더 많다는 게 뭐 어떻단 말인가. 만약 황제의 명이 아니었다면, 설사 누군가의 목숨이 걸려있다고 해도, 석공은 결코 ‘고운’을 파괴하지 않았을 것이다. 감히 명확한 숫자를 대지는 못하지만 ‘고운’은 최소한 한 명의 목숨보다는 가치가 있었다. 대략 그렇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럼 10명의 목숨과 맞바꾸는 건 어떨까? 잠시 주저하던 석공이 좌우로 고개를 흔든다. 안 돼. 그는 이것저것 이유를 대본다. 하지만 그럴 듯한 핑계가 떠오르지 않는다. 이러니저러니 하지만 결국 ‘고운’을 올려놓은 저울 쪽이 더 무거운 것뿐이다. 중력은 한낱 인간인 그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럼 우리는 노여워져서 끝까지 밀어붙이고 싶어진다. 백 명은 어떨까? 천 명은? 만 명의 목숨이라면? 그래도 ‘고운’을 선택할 텐가? 자, 석공을 너무 괴롭히지는 말도록 하자. 우린 좀 더 솔직해져야 한다. 몇 명의 사람이 죽어나가든 실은 우린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어차피 더 많은 사람들이 시답지 않은 이유로 매일 죽어가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우리는 단 한 번의 폭발로 몇 십만 명을 단번에 잃은 진귀한 경험도 가지고 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의 죽음에 대해 진심으로 가슴 아파한다는 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 ‘고운’이라면 그 이상의 가치가 있지 않나?

이런 진부하고 뻔한 윤리론을 독자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이 부분을 통째로 삭제해 버릴까 나 역시 몇 번이나 고민했다. 고백하건 데 나는 윤리에 대한 글을 평가절하 하는 버릇이 있다. 윤리적 문학은, 뭐랄까, 따분하고 상상력이 결여되어 있으며 무력한 느낌을 준다. 윤리가 제도화 된 사회에서까지 문학이 윤리를 강조하는 건 불필요하고 지루한 일이다. 그런데도 그런 소설이나 영화가 요즘도 대중의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게 놀랍기만 하다. 며칠 전에 만났던 한 젊은 작가는 독자에게서 감동의 눈물을 뽑아낼 수 있는 문학만이 예술이라고 소리 높여 선언했다. 아연실색하는 나에게 곁에 있던 출판사 직원은 눈물이야말로 여전히 그리고 언제나 가장 잘 팔리는 소재라고 귀띔해 주었다. 세상에, 그렇다면 그들이 옳다. 자유경제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늘 대중이 옳다. 지금은 모든 게 그렇듯 예술도 다수결로 평가받아야 할 의무가 있다. 석공이 황제의 명령을 따라야하는 의무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황제와 대중 중에 누가 더 변덕스럽고 누가 더 현명하며 누가 더 포악한지 석공도 나도 알지 못한다. 어쨌든 나는 대중을, 석공은 황제를 옹호할 테지만 각자의 의심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석공은 여전히 ‘고운’을 품에 꼭 껴안고 있다. 그러나 마음은 이미 차분해졌다. 마치 사랑했던 연인의 시체를 안고 있는 듯 하다. 눈물이 마르고, 팔이 아프고, 푸르스름하게 경직된 살덩어리가 찝찝하기도 하고, 이제 슬슬 시체를 어디에 묻을지 궁리하고 있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를 비난하지는 못할 것이다. 석공은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한다. 어쨌든 1000명의 거지들을 배불리 먹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들은 깨끗해질 것이고, 부유해질 것이며, 무시 받지 않고, 그 중 몇 명은 행복해질지도 모른다. (물론 그 후에도 다른 1000명의 거지들이 또 생겨날 테지만.) 무엇보다 사람들은 조각상 앞에서 네발로 기어 다니는 그들의 모습을 보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고작해야 값비싼 돌덩어리 앞에서.

석공은 별안간 힘껏 ‘고운’을 밀어버렸다. 조각상은 천천히 기울어지더니 육중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차라리 이대로 산산조각이 나기를 바랐지만 모든 게 그렇게 쉽지만은 않은 법이다. 자신의 발밑에서 흙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고운’을 보면서 그는 평생 처음으로 기도라는 걸 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누가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겠는가. 신은 오직 최강자와 최약자만을 사랑한다. 황제와 거지만을 말이다.

석공은 기도 대신에 정과 망치를 집어 들었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날이 밝기 전에 일을 끝마쳐야 했다. 그는 황금 조각상을 받치고 있는 아랫단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조각상의 단은 황금이 아니라 푸른색 화강암이었다. 그는 조각상에 손대기 전에 화강암 단부터 부술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돌이라는 소재는 그에게 익숙했고 돌을 쪼개는 동안 돌과 ‘고운’이 결코 다르지 않음을 숙고할 수 있을 것이다. 석공은 한자가 넘는 길쭉한 정을 단의 모서리에 갖다 대고 쇠망치를 휘둘렀다. 화강암 단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단번에 박살이 났다. 놀란 쪽은 오히려 석공이었다. 그는 왜 이토록 힘차게 망치를 휘둘렀을까?

석공은 두 발로 꼿꼿이 버티고 서서 이제 벌거숭이가 된 ‘고운’을 내려다보았다. 손에 들고 있는 연장의 차갑고 묵직한 촉감이 그의 온 몸의 근육을 긴장시켰다. 그는 불쑥 망치를 치켜 들더니 갑자기 경련하듯 거칠게 웃음을 터트렸다. 결국 그에게도 어떤 역할이 마련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그는 감탄했다. 그는 ‘고운’을 조각한 조각가처럼 되지는 못했지만 파괴자가 되어 그 조각가와 동등한 대칭을 이루고 있었다. 결국 그는 여기까지 온 것이다. 익명의 창조자와 익명의 파괴자, 누가 더 절대적인가.

석공은 조각의 아래쪽에 정을 대고 부지불식간에 망치를 휘둘렀다. 누런 황금 조각이 쩍 갈라지면서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는 잠시 그대로 멈추어 서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온 세상이 비명이라도 지르길 기대했던 걸까? 그러나 세상은 쥐 죽은 듯 조용하기만 했다. 하지만 이 정적은 적막이 아닌 침묵이라는 걸 석공은 알고 있었다. 세상이 침묵하는 사이 천 년 동안 지켜져 온 완전한 아름다움을 자신이 살해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 어느새 그의 이마에는 땀이 흥건하게 맺히고 겨드랑이와 가랑이에서 더운 김이 올라왔다. 차라리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치는 사람을 죽이는 게 더 쉽지 않을까?

석공은 묵직한 쇠망치를 힘껏 움켜쥐었다. 그리고 온 인류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다시 한 번 망치를 크게 휘둘렀다. 또 다시 큼직한 황금 조각 하나가 떨어져 나왔다. 어쩐지 아까만큼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다시 망치를 휘둘렀다. 더 반듯한 모양의 황금 조각이 떨어져 나왔다. 다시 망치를 휘둘렀다.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점차 모든 미신들이 물러가고 어느새 물질과 역학의 상호관계만이 그를 사로잡았다. 거기다 쪼개질 때마다 빛을 더하는 황금색. 그는 완전히 평온을 되찾았다. 자신이 왜 그토록 호들갑을 떨었는지 어느새 모두 잊었다. 싱거운 싸움이었다. ‘고운’은 이토록 나약한 사물에 불과했다. 그 아름다움도 이만큼이나 무력했다. 이제 석공은 자신에게 익숙하기 그지없는 단순 노동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저 때리고 쪼개고, 때리고 쪼개고, 때리고 쪼개고를 반복했다. 그의 오른쪽에는 비슷한 크기의 황금조각들이 커다란 더미를 이루며 차곡차곡 쌓여갔다. ‘고운’은 이미 하반신을 모두 잃었다.

이제 이야기는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다. 나는 처음에 이 소설을 궁리하면서 이야기를 어떻게 끌고나가야 할지 이리저리 고민했다. 사실 처음에는 석공이 아니라 ‘고운’의 청소를 담당하던 어린 ‘나인’이 주인공이었다. 그 다음에는 ‘거지’였고, 다른 인물들도 몇몇 고려하다가 마지막에 결국 ‘석공’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석공의 인격 안에 그 인물들이 모두 뒤섞여 있다 해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석공이 주인공으로 낙점된 뒤에도 글쓰기는 평탄치 않았다. 이야기는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가 다시 되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순금인 줄 알았던 ‘고운’이 알고 보니 금박을 씌운 돌조각이었다거나, 온 왕국의 디딤돌 마다 석공이 몰래 ‘고운’을 새겨 넣기도 하고, 석공이 ‘고운’과 똑같이 생긴 연인을 찾아 세상을 떠도는가 하면, 끝내 황제의 명을 거부해서 목이 잘리기도 했다. 하지만 알다시피 우리의 석공은 지금 ‘고운’을 차근차근 부숴나가고 있는 중이다. 그로서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우리의 ‘석공’은 오직 이런 ‘석공’일 뿐이고, 결국 일이 그렇게 되었으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얘기다.

아니, 어차피 이 모든 게 작가인 나의 뜻이 아니냐고? 물론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석공을 불시에 광인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 정과 망치를 들고 거리를 뛰어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이라고 시킬 수도 있다. 황제의 처소로 숨어들어가 그의 머리를 박살내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상 그건 불가능하다. 작가는 그 정도로 전능하지 않으며 실제로는 훨씬 더 무력하기 때문이다. 그런 글을 쓰느니 차라리 내가 직접 거리로 뛰어나가 광인 행세를 하는 편이 더 쉬울 정도다. 미안하지만 나는 다른 작가들이 종종 떠벌리는 (그리고 독자들이 열광하는) 창작절대주의에 힘을 보태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다. 이미 작가주의 시대는 끝장이 났다. 그리고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모두들 작가들을 동정하고 있다. 그런데도 아직도 예술가들만이 여전히 그 숙취에 시달리고 있는 듯하다.

어느새 석공은 ‘고운’의 머리만을 남겨놓았다. 석공의 오른편에는 주먹만 한 크기의 황금조각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이제 더 환하게 빛을 발하는 쪽은 황금조각 더미다. 그리고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고운’ 못지않게 여전히 아름다울 것이다. 석공으로서는 자신의 새 작품이 자랑스러운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일을 썩 잘 해낸 건 사실이었다. 이제 마무리만이 남아 있었다.

석공은 ‘고운’의 이마에 정을 들이대고 망치를 치켜들다가 그대로 손을 멈추었다. 어쩌면 그 끈질긴 의인법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조각이라고 해도 항아리 형상을 부수는 일과 얼굴 형상을 부수는 일이 같을 수는 없다. 더구나 이토록 아름다운 머리를 부숴버릴 때는 한층 더 잔인한 용기가 필요하다. 의인법이란 결코 극복할 수 없는 미신일까. 우리 역시 의인법으로 인해 인간이 되지 않았나. 그리고 어쩌면 그 첫 번째 대상조차 아니었는지 모른다.

석공은 잠시 숨을 골랐다. 숨을 고르면서 (혹은 고르는 척 하면서) 조각상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머리만 남은 그것이 오히려 온전할 때보다 더 아름다워 보인다면 이상한 일일까. 하지만 괴이하게도 그건 사실이었다. 그는 언제까지고 이 얼굴을 바라보고 싶었다. 온 얼굴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자신의 비밀을 속삭이고 싶었다. 품속에 껴안고 잠들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날이 밝기 직전이었고 그는 너무나 지쳐있었다. 어서 이 머리통을 부숴버리고 그 내부까지 누런 황금으로 가득 차 있는 걸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는 망치를 높이 치켜들었다. 이제 이걸로 모든 게 끝장이었다. 그 길었던 아름다움도. 이 짧았던 이야기도.

그 때 석공의 등 뒤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멈춰라.

나는 이쯤에서 다시 황제를 등장시키려 한다. 황제에게 결정적인 역할을 맡기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독자들이 황제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는 과묵하고, 지적이며, 난폭하고, 비밀이 많다. 거기다가 독재자라니, 한 인간이 이보다 더 매력적이긴 힘들 것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우리는 독재자를 사랑한다. 우리는 독재자를 원한다. 왕을 원한다. 다만 이것을 인정하기에는 너무 많은 현대교육을 받은 것뿐이다. 하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이 단편 소설 안에서만큼은 무심코 대꾸하듯이 인정할 수도 있지 않은가. 나는 뛰어난 인간의 절대적인 권력에 복종하기를 갈망하노라고. 잔인한 독재자 앞에서 한없이 선해지고만 싶노라고. 판단도 선택도 하지 않는 노예가 되는 걸 두려워하지 않노라고. 아하, 경솔한 문학적 방종이라고? 나도 인정한다. 현실의 결계 안으로 돌아오면, 나는 뼛속까지 민주 시민이다. 민주 시민으로 태어나 민주 시민으로 죽을 것이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모든 의심을 말끔히 지울 수는 없다. 민주주의란 일종의 소강상태가 아닐까? 민주 시민이란 위대한 독재자가 올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충복들이 아닐까? 오직 독재자만이 위대해질 수 있는 게 아닐까? 무엇이 문제인가? 너무 종말론적이라서?

멈춰라.

황제가 말했다. 하지만 석공은 멈추지 못하고 그만 망치를 휘둘렀다. 쨍 하는 소리와 함께 ‘고운’의 코가 떨어져 나갔다. 석공은 고개를 들어 황제를 바라보았다. 바닥에 엎드려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고 꼿꼿이 서서 황제와 마주보았다. 황제는 그 점을 탓하지 않았다. 관심조차 없는 듯 했다. 황제는 석공을 지나쳐 손수 허리를 굽혀서 ‘고운’의 머리를 집어 들었다. 코가 없어져서 흉물스러워진 머리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황제는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는 ‘고운’의 머리 크기만 한 황금 덩어리를 석공의 발밑에 던져주고는 ‘고운’의 머리를 품속 깊숙이 넣고서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떠났다.

석공은 한참이 지난 후에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왈칵 눈물을 떨구었다. 기쁨의 눈물인지 슬픔의 눈물인지 알 수 없었다. 결국 자신은 절대적인 파괴자조차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어떤 역할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어느새 하늘이 환하게 밝아오며 첫 아침 햇살을 뿌리고 있었다. 햇빛을 받은 황금조각들이 눈부시게 번쩍거렸다. 하지만 아직은 990개의 조각뿐이었다. 석공에게는 끝마쳐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그는 황제가 놓고 간 매끈한 황금덩어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지만 정확히 어디를 쳐다봐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왜 우리는 하얀 백지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는가. 왜 점이라도 하나 찍어 놓아야 안심이 되는가. 아니면 갈가리 찢어버리기라도 해야 하는 것인가. 석공은 정을 대고서 있는 힘을 다해 망치를 휘둘렀다. 황금덩어리는 곧 10개의 조각으로 쪼개어 졌다. 석공은 들고 있던 정과 망치를 집어 던졌다. 천 개의 조각이 완성되었다. 마침내 내 이야기도 완성되었다.

자, 이렇게 소설이 끝이 났다. 이제 이따위 소설은 집어 던져 버리고 독자들은 더 중요한 일을 하러 가도 좋다. 아니면 가기 전에 내게 욕지거리를 몇 마디쯤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내게는 들리지 않을 테니까. 독자들 중 몇몇은 대체 이 소설의 주제가 뭐냐고 내게 물을지도 모르겠다. 최대한 좋게 말하자면 나를 도와주려는 순수한 의도에서 말이다. 하지만 이미 3자가 된 내가 작품과 독자 사이에 끼어드는 건 추태일 뿐이다. 나는 이미 모든 걸 말했고, 더 말할 것이 없다. 마음껏 욕을 하시라. 나는 가혹한 평가에 익숙하다. 이 나이가 될 때까지 글을 쓴다는 건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씩씩한 일이다.

이제 10월의 가을밤은 깊어지고 풀벌레 소리마저 잦아들었다. 조금 있으면 자박하게 이슬이 내리다가 새벽안개로 바뀔 것이다. 실내에도 한기가 돌아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비비고 있다. 자, 그럼 잠자리에 들기 전에 여러분에게 작별 인사를 해야겠다. 만약 당신이 낮에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좋은 하루가 되길. 밤에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좋은 꿈을 꾸길. 다시 만날 생각도 없으면서 다음을 기약하는 한국 사람들답게, 다음에 또 만나게 되길.

그럼 안녕.

아, 그리고 당신들의 아름다운 황금 코에게도 안부를.





(완결)




매거진의 이전글천 개의 조각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