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놀이 (1)

by 곡도





그는 눈을 떴다. 잠깐 졸았던 모양이다. 마차는 거친 자갈길을 달리느라 덜그럭거리고 창밖에는 무성한 나무 그림자가 겹겹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아마도 참나무일 것이다. 너도밤나무인지도 모른다. 마차 앞에 걸어놓은 등불에서 기름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을음이 많이 나는 걸로 봐서 질이 좋지 않은 기름인 게 분명했다. 그는 손을 들어 두 눈을 비볐다. 깊은 잠에 빠졌다가 홀연히 정신을 차렸기 때문에 그는 불현듯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잊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앞에 앉은 여자를 바라보았다. 얼굴이 하얗고 옆모습이 단정한 여자였다.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어쩌면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폐하, 일어나셨어요?”

그 한마디에 그는 모든 걸 기억해 냈다. 고통과 냉소가 그의 머릿속을 선명하게 달구었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아내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누추한 푸른색 드레스를 걸치고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것이 그의 신경을 거슬렀다. (그들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적들에게도 그럴 것이다.) 그녀의 동글동글한 볼에는 아직도 분홍색 볼연지가 묻어 있고 그녀의 속옷에서는 라일락 향수 냄새가 피어올랐다. 그 화려한 향기가 그로 하여금 그가 막 도망쳐 나온 왕궁을 떠올리게 했다. 그의 평생의 고향. 그의 신혼집이자 가정. 대리석, 보석, 레이스, 유리, 거울, 장미꽃다발, 유화그림들이 내부로 끝없이 증식해가는 곳. 왕궁은 이제 텅 비어버렸지만 여전히 그 증식을 멈추지 않을 거라고 그는 확신했다. 어쩌면 왕궁은 이미 오래 전부터 더 이상 왕이 필요 없었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왕이니 왕비니 거들먹거리며 돌아다니는 것들이 걸리적거리기만 했을 것이다. 더 이상 왕을 필요로 하지 않는 그의 백성들처럼 말이다. 차라리 불을 질렀어야 했어. 그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타오르는 왕궁을 둘러싸고 사람들은 기꺼이 춤을 추었을 것이다. 그도 함께 기꺼이 춤을 추었을 것이다. 그럼 모든 원한이 사라지지 않았을까. 서로가 용서받지 않았을까. 거기서부터 모든 걸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는 왕궁을 불태우는 대신에 (그는 결코 그런 짓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모든 걸 고스란히 버려두고 몰래 마차에 올랐다. 대단한 왕궁과, 그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보물들, 무지렁이들은 감히 가치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진귀한 책들, 국가의 비밀이 적힌 문서들, 외국에서 들여온 가구들, 혈통 좋은 그의 애견들과 애마들, 심지어 그는 왕관까지 버리고 길을 나섰다. 그에 비해 그가 왕궁을 도망쳐 나오면서 가지고 나온 건 비루한 수준이었다. 보석과 금붙이로 가득 찬 흑단 상자 세 개와 비단옷과 모피들을 쑤셔 넣은 트렁크가 열한 개, 속옷과 양말로 가득 찬 트렁크 세 개, 개인적인 문서들, 향수병들, 화장 가방, 와인 두 상자, 커다란 요리바구니 다섯 개, 용변기 두 개, 만찬용 은식기 세트 두 벌, 수십 켤레의 구두가 들어있는 종이 상자 세 개, 장난감과 동화책이 뒤섞여 있는 트렁크 두 개 정도였다. 물론 이마저도 사치스럽다며 사람들은 손가락질 할 것이다. 특히 와인과 용변기가 그들의 관심을 끌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말단 시종이 피난을 떠날 때도 최소한 이 정도는 가지고 갈 것이라고 그는 항변하고 싶었다. 하물며 그는 왕이 아닌가. 모두들 그를 단지 왕이라는 이유로 비난하면서 어째서 그가 단지 왕이라는 사실을 용납해 주지 않는 걸까. 하지만 그도 그렇게 꽉 막힌 인간은 아니었다. 내심 어느 정도 그들의 지적에 공감하는 부분도 있었다. 자신이 비단양말 없이는 신발을 신지 못하고 용변기 없이는 용변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부끄러웠다. 하지만 모든 게 그 이상으로 부당했다. 설사 그가 맨 빵에 버터만 발라 먹는다 해도 사람들은 그를 사치스럽다고, 비열하고 뻔뻔하다고 비난할 것이다. 그들은 빈곤한 자들 중에서도 가장 빈곤한 자들과 그를 비교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예의를 갖추라고 그에게 강요할 것이다. 죽은 자 외에는 아무도 그들 앞에서 떳떳할 수 없는데도 말이다.

그는 별안간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누군가 쫓아오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지나온 길을 보고 싶었던 것인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마차 뒷창문을 통해 보이는 거라곤 깜깜한 어둠뿐이었다. 그가 지나온 길은 어둠 속에서 흔적도 없이 지워진 듯 했다. 참나무인지 너도밤나무인지 모를 나무들만이 앞뒤 없는 어둠에 거친 질감을 부여하고 있었다.

지금쯤 그가 몰래 왕궁을 빠져나갔다는 소식이 왕궁 담장 너머까지 퍼졌을 것이다. 분노한 사람들이 궁전으로 몰려가 닥치는 대로 휘젓는 모습이 그의 두 눈에 선했다. 옆집의 비루한 살림살이에도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니 왕의 살림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는 갑작스럽게 손님을 맞게 된 여염집 주부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설거지통에는 더러운 그릇들이 가득 쌓여있고 의자 여기저기 낡은 속옷 빨래를 널어놓은 기분이었다. 물론 실상은 완전히 그 반대였지만 말이다. 거칠게 문을 열어젖히며 궁궐 안으로 쳐들어 간 사람들은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한 궁전의 규모와 호사스러움에 할 말을 잃었을 것이다. 진흙이 묻은 더러운 신발을 바지 뒤춤에 문질러 닦아내며 감탄에 감탄을 더하다가 급기야 치를 떨었을 것이다. 총천연색 벽화로 가득 찬 황금빛 천정과, 4겹자리 터키 공단 커튼과, 파이 한 조각을 내놓기 위해 크기별로 겹쳐놓은 3겹의 중국 접시와, 은과 루비로 세공한 조화 꽃다발과, 금실로 촘촘하게 비단수를 놓았으면서도 누군가 한 번도 앉은 적이 없었던 수십 개의 소파와, 터키석을 박아 넣은 문구용 가위와, 진주와 금으로 장식된 그리스 신이 조각되어 있는 후추통 같은 것들의 끝없는 나열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한 인간이 독차지해서는 안 되는 영광이라고, 인간인 이상 누구도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인간이길 포기해선 안 된다고, 정당한 복수심에 발을 쾅쾅 굴렀을 것이다.

그는 목덜미가 서늘하다는 듯 옷깃을 바짝 여몄다. 옷깃에 달린 새하얀 거미줄 레이스가 그의 턱을 부드럽게 간질였다. 그가 특별히 주문했던 인도산 최고급 레이스였다. 뭐든지 최고급이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니까. 그건 자신의 위신뿐만 아니라 국가의 위신이 걸린 중요한 문제가 아닌가. 그가 자신에게 주어졌던 영광에 교만했던 건 사실이었다. 말 그대로 그는 그 영광에 흠뻑 빠져있었다. 왜 아니겠는가. 태초에 영광이 있었다. 그것이 그가 아는 유일한 진리였다. 그는 영광이라는 정자로 수태되었고, 영광이라는 젖을 빨면서 자랐고, 영광이라는 거울을 보며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다. 그를 남자로 만들어 준 것도, 그의 성기를 발기시킨 것도, 그의 부인을 수태시킨 것 역시도 모두 영광이었다. 진부한 표현처럼, 그의 혈관에는 붉은 피 대신에 새하얀 우윳빛 영광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가 그 영광을 더 높이 더 멀리 떠받들려고 했던 건 지당한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위대한 아이에게도 그 찬란한 영광을 고스란히 물려줄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영광이 끔찍하고 수치스럽기도 했다는 걸 그도 이제는 인정하고 싶었다. 그것은 영원히 입 밖에 낼 수 없는 비밀이었다. 영광은 조금의 의심도 허락하지 않으며, 왕은 결코 불행할 수 없는 존재였다. 실제로 왕궁에서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이 불행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그 단어의 사용법조차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림자도 없는 눈부신 영광 뒤편에서 그는 늘 철저하게 소외되어 있었다. 그는 어른들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모두들 받들어 모실 뿐 돌봐주지는 않는 어린애였다. 키 큰 어른들 다리 틈새에서 갈팡질팡 하는 사이 그는 어느새 난쟁이처럼 나이만 들어버렸다. 아니, 실제로 왕으로 태어났다는 건 일종의 선천적인 장애가 아닐까? 왕가 사람들에게 만연해 있는 유전병이야 말로 그 계시가 아닌가. 그리고 그 장애를 숨기기 위해 왕궁에 갇혀있었던 거라고 그는 상상해보았다. 미노타우루스의 운명, 그것이 모든 왕들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누군가 칼로 목을 칠 때까지 왕궁에 갇혀있어야 하는 괴물의 운명.

잠깐, 장애라니? 만약 사람들이 이 얘기를 듣는다면 부글부글 끓고 있는 그들의 분노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 것이다. 배가 터지도록 먹을 수 있는 산해진미와, 금과 보석들이 아로새겨진 비단 의복과, 아침마다 따끈한 향수 목욕통이 주어지는 권능을 장애라고 부른다는 건 악마의 수작질이 아닌가. 상식에 대한 모독이고, 고통과 공감에 대한 냉담이고, 심지어 윤리를 희화시키는 게 아닌가 말이다. 그런 장애를 위해서라면 사람들은 나부터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려 달라고 그에게 애원할 것이다. 아니면 진짜 장애가 뭔지 똑똑히 알려주겠다며 그의 다리를 분지르기 위해 달려들 것이다. 술에 취하듯 자신의 운명에 만취해있는 주정뱅이라고 그를 몰아세울 것이다. 마음대로 생각하라지. 그는 이제 자기 자신에게 좀 더 솔직하고 싶었다. 그동안 사람들의 눈치를 너무 많이 보며 살았다. 가장 높은 자에서부터 가장 낮은 자까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지켜보고 있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고, 무언의 수많은 요구에 부합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써왔다. 결국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게 자명해질 때까지 말이다.

그런데 만약 그가 미노타우루스라면 그의 왕궁은 미로가 되는 걸까? 그건 정말이지 그럴 듯한 비유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의 왕궁은 대리석과 유리와 거울과 벽지로 이루어진 미로였다. 다른 점이라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이 버젓이 있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밖으로 나갈 생각이 없는 미노타우루스에게는 문이 있거나 없거나 다를 바가 없었다. 왕궁 전체를 빽빽이 뒤덮고 있는 꽃무늬 벽지는 미로를 여러 겹으로 감싸고 있는 포장지 같았다. 포장지를 까고 까고 또 까도 계속해서 포장지가 나왔다. 어쩌면 포장지 자체가 바로 미로였을까. 포장지가 감추고 있던 건 바로 포장지 자신이었을까. 그는 한밤중에 혼자 잠에서 깨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벽지의 촘촘한 문양들의 기이한 소용돌이를 지켜보곤 했다. (심지어 왕궁을 빠져나오기 직전인 어젯밤에도 그랬다.) 도대체 이 왕궁에는 이런 벽들이 몇 개나 있는 거지? 수백 개? 수천 개? 평생을 그곳에서 살았지만 그가 가보지 못한 방들이 아직도 많았다. 확실한 건 왕궁에는 벽보다 유리가 많고, 유리보다 거울이 더 많다는 사실이었다. 거울은 다시 벽과, 유리와, 거울을 수천수만 배로 늘여 놓았다.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조화를 포기한 증식의 과잉. 분명 거기에는 일종의 사악함이 있었다. 왕궁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증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백하건데 평범한 줄무늬 벽지가 발라진 방에서 그는 결코 잠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여동생도 종종 몸서리를 치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우리는 이 궁궐에서 나가면 장님이 돼버릴 거야. 단조롭게 펼쳐진 들판의 지평선과 반짝이지 않는 소박한 공기를 견디지 못할 테니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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