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한 번도 (진정한 의미에서) 왕궁을 떠난 적이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면 그는 침대에 누워 벽지의 꽃잎파리를 세고 있거나, 거울로 둘러싸인 복도를 느릿느릿 걷고 있거나, 서재 창가에 앉아 육면체로 깎아놓은 정원의 나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왜 왕궁 정원의 나무들은 모두 기하학적인 모양을 하고 있는 걸까? 그는 왕궁을 떠나온 지금에서야 처음으로 의문을 가져보았다. 그것은 왕의 절대적인 권능이 나무 한그루, 꽃 한 송이에 까지 철저하게 미치고 있다는 표식이었을까?
하지만 실상은 어떠했나? 그는 남몰래 얼굴을 붉히며 땀도 흐르지 않는 차가운 이마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나무를 반듯하게 자라도록 하는 권능은 고사하고 그는 단 한 번도 왕궁의 진정한 주인인 적이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그는 고귀한 출신의 세입자에 불과했다. 그는 복도 창가를 장식해 놓은 유리병 하나라도 깨뜨릴까 싶어 늘 전전긍긍해야 했다. 그 유리병은 최소한 170년 전부터 그 자리에 있던 것으로 아시아 북쪽의 어떤 작은 나라에서 최고의 장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했다. 왕궁을 꽉꽉 채우고 있는 것들은 모두 오래되고 더 없이 훌륭한 것들뿐이었다. 최고의 화가들이, 최고의 건축가들이, 최고의 장인들이, 최고의 여인들이, 최고의 왕을 위해, 최고의 왕궁을 만들어 냈다. 옛것은 언제나 오늘 날의 것보다 값지고 빼어났다. 그 완벽한 왕궁에 더 보탤 거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왕궁에는 ‘오늘’을 위한 공간은 손톱만큼도 남아있지 않았고, 그리하여 ‘오늘’은 왕궁에 발을 붙이지 못한 채 유령처럼 허공을 떠돌아다녔다. 그러니 ‘미래’는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는 장차 왕이 될 자신의 아이가 태어났을 때조차 아이를 포화 상태인 왕궁 속에 어떻게 끼워 넣어야 할지 고민했을 정도였다.
“좀 더 눈을 붙이세요, 폐하. 국경에 도착하려면 멀었어요.”
그녀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리고 자신의 무릎에 기대어 자고 있는 아이의 어깨 위로 금빛 비단 숄을 바짝 끌어올렸다. 그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기름 램프의 불빛이 불안하게 일렁이고 있었지만 아이는 평온한 얼굴로 깊이 잠들어 있었다. 볼 위로 드리워진 아이의 길고 섬세한 속눈썹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는 돌연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이의 태평함이 참을 수 없이 혐오스러웠다. 그는 아이를 흔들어 깨우고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단 하나도 놓치지 말고 똑똑히 봐두라고 호통치고 싶었다. 무능도 유전이 되는가?
[폐하의 죄목은 바로 무능입니다.]
며칠 전 그는, 예전이라면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조차 없었던 자로부터 막말을 들었다. 그 남자는 그와 비슷한 또래였다. 그는 남자의 불손함보다 자신의 무능이 비밀이 아니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알고 있을까. 언제부터 알고 있었을까. 온 나라가 알고 있단 말인가? 백성들 모두? 그는 몸서리 쳤다. 백성들. 그의 아래 있는 건지, 그의 위에 있는 건지, 그의 세계 안에 있는 건지, 그의 세계 바깥에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괴상한 존재들. 한 평생 그들을 다스렸지만 그가 단 한 번도 진정으로 만난 적이 없었던 사람들. 그는 ‘백성’이라는 단어로부터 어떤 얼굴도 떠올릴 수 없었다. 그저 그가 긴 옷자락을 끌며 지나가던 길거리에서 우글우글 모여 있던 수많은 머리들을 기억해냈다. 울그락불그락 하던 눈동자들. 하나로 모아지지 않는 표정들. “폐하 전하께 신의 가호가 있기를”을 기계적으로 외치던 아우성들. 그는 그들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들이 들어있는지 한 번도 궁금한 적이 없었다. 아마도 생각이란 것 자체가 없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들은 얼마만큼 그와 같은 사람들일까, 또 얼마만큼 다른 사람들일까. 그런데 그들 중 한명이 별안간 그의 턱밑까지 코를 들이밀며 그에게 무능을 운운했던 것이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심지어 소탈하게.
“폐하, 혹시 시장하시면 호두를 넣은 빵과 햄이 있어요. 드릴까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지금 죄인의 신분이었다. 심지어 도주하고 있는 죄인이 아닌가. 모든 백성들이 그를 재판정에 세우기 위해 살기가 등등했다. 빵과 햄, 이것은 그의 심각한 죄목이 될 것이다. 빵을 먹은 죄로, 햄을 먹은 죄로 그들은 그를 고소할 것이다. 물을 마신다면 그 역시 고소할 것이다. 숨을 쉰다는 이유로 고소할 것이고, 변을 본다는 이유로 고소할 것이고, 거슬러 올라가 요람에서 질식해 죽지 않은 죄로 고소할 것이다. 살아있다면 살았다고 고소할 것이고, 죽었다면 죽었다고 고소할 것이다. 그는 죽은 시체가 되어서도 법정에 나가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 한 때 그를 무척이나 사랑했다는 사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왕들 중에서, 위대한 왕들도 포함해서, 그가 그들에게 가장 사랑받았던 왕이었음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것마저 긴 죄목의 목록 중 하나로 추가될 것이다. 왕은 숭배의 대상이어야지 사랑의 대상이어선 안 된다면서. 백성들의 사랑이 오히려 가혹한 경고였음을 그는 알았어야 했다.
마차가 크게 덜컹거렸다. 그는 허공에 붕 떠올랐다가 제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는 자신이 마치 짐짝처럼 다루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받기를 원하지 않아 이곳저곳으로 떠넘겨지는 주인 없는 짐짝이었다. 마차는 모래와 굳은 진흙이 울퉁불퉁하게 깔린 내리막길을 거칠게 달려 내려갔다. 그의 아내는 멀미가 나는지 가슴에 두 손을 얹었다. 그는 마부석에 앉아 묵묵히 말 옆구리에 채찍을 휘두르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은 뒤로 아무렇게나 동여매어져 있고, 목덜미는 땟물에 흠뻑 젖어있었다. 남자는 오늘 그와 처음 만난 사람이었다. 다부진 체격에 공손한 말투를 쓰고 있었지만 두 손은 야만적이라 할 만큼 크고 상처투성이였다. 그는 처음부터 이 말수 없는 남자를 경계했다. 남자가 왜 이 위험한 일에 자원했는지 동기가 의심스러웠다. 충성심 때문일까? 신념 때문일까? 역사의 한 귀퉁이나마 참여하고 싶어서? 혹은 모험 자체를 즐기는 걸까? 아니면 누구나 그렇듯 돈 때문인가. 그 어느 쪽이든 그것은 왕에 대한 애정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야 물론이지. 계몽된 시대에 대체 누가 왕을 사랑한단 말인가.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왕인 그 역시도 계몽주의자라는 사실이었다. 이게 알려지면 모두가 까무러칠까? 그의 적들은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모욕당했다며 분개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왕이라는 사실 만큼이나 분명한 현실이었다. 계몽주의는 이미 피할 수 없는 전염병이었다. 오늘날의 모든 아이들이 이미 이 병에 걸린 채로 태어났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숨을 뿜어대며 기꺼이 이 병을 공유했고, 어느새 예전의 방식으로 숨 쉬는 방법을 영영 잊어버렸다. 앞으로는 오직 계몽주의를 통해서만 사람들은 생명을 유지할 것이다. 왕궁이라는 높고 복잡한 미로도 이 전염병을 가로막지는 못했다. 우연히 불어오는 바람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숨결이 뒤섞여 있는가. 한평생을 탑 꼭대기에 갇혀있었던 사람이라도 어느 날 아침 자신이 계몽주의자가 되어 잠에서 깨어났음을 깨달을 것이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처럼 그가 계몽되지 않은 가장 마지막 사람은 아니었다. 아침이면 이 세상의 모든 신문들이 왕궁으로 배달되곤 했다. 그는 벽지로 이루어진 미로 한 가운데 또아리를 틀고 앉아 매일 그 신문들을 빠짐없이 읽어 내려갔다. 예전의 위대한 왕들은 그 활화산 같은 지성들을 마치 미천한 가십이라도 되는 것처럼 냉소적으로 비웃곤 했다. 그리고 신성한 권력은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스스로에게 천명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다. 그럴 수가 없었다. 오히려 반대로 신문에 밑줄을 긋고 오려서 따로 모아두기 까지 했다. 그 구절들을 입 속에서 이리저리 굴려보면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미로는 더 이상 왕궁 따위가 아니라 이 놀라울 정도로 잘나디 잘난 사람들이라는 사실에 한 없이 겸손해지기도 했다. 사실 오래 전부터 그는 계몽주의자들의 젊음을, 그들의 활기와 무례함을 남몰래 흠모하고 있었다. 그도 또래들과 술집에 둘러앉아 한 손에는 술잔을 들고 한 손으로는 테이블을 쾅쾅 두드리며 지성의 새 시대, 진보의 무한한 가능성, 무엇보다 자유, 자유, 자유를 소리 높여 외칠 수 있었다면……. 하지만 그는 자신이 계몽주의자임을 철저하게 숨겨야 했다. 사람들 앞에서 고집 세고 눈치 없는 바보처럼 구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계몽주의를 깎아내리고, 자유를 폐륜이라 부르고, 새로운 시대를 부정했다.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왕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다음 왕이 될 아이의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막 잠에서 깨어나 햄 한 조각을 입 안 가득 씹고 있는 자신의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의 손가락과 입가는 기름기로 범벅이 되었고 마차 안은 돼지기름 냄새가 진동했다. 그의 아내가 냄새를 빼기 위해 마차 창문을 조금 열어 놓았다가 우수수 흩어지는 나뭇잎 소리에 놀라 도로 문을 닫았다. 햄을 다 먹어치운 아이는 여염집 아이처럼 더러운 손을 가슴께에다 문지르고는 창문에 바짝 얼굴을 붙이고 참나무이거나 너도밤나무일지도 모르는 나무들이 어둠 속에서 솟구치는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에게는 마치 아이가 창밖에서 무슨 불길한 징조라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불길한 징조는 모두 이 마차 안에 있는데 말이다. 차라리 이 아이도 요람에서 질식해 죽는 편이 나았을까? 그는 아이가 태어나던 날을 떠올렸다. 그 날은 그의 인생의 최고의 날이었다. 그가 진정 왕다운 왕이었던 유일한 날이기도 했다. 갓 태어난 아이를 품에 안으며, 왕으로서의 그와 인간으로서의 그가 아무런 반목도 없이 아름다운 합일을 이루었다. 온 세상의 축복이 아이에게 쏟아졌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쪽쪽 짜내서 더는 이 땅에 내릴 축복이 없을 지경이었다. 이제 축복의 가뭄이 시작된 것이다. 그것이 계몽시대의 왕인 그가 다스려야 할 세상이었다. 그것이 역시나 계몽주의자로 태어난 이 아이에게 물려줘야 할 세상이기도 했다. ‘물려준다’기 보다는 ‘떠넘긴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지만. 아이는 얼굴을 바싹 붙이고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의 턱이 닿아있는 유리창에 뿌옇게 김이 서렸다. 아이가 돌연 그곳에 입을 맞추더니 조그만 입술자국을 남기고는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도 아이를 따라 미소를 지었다. 이 아이는 반드시 왕이 되어야 한다. 그는 흐려진 마음을 닦아내듯이 마음을 다잡았다. 아이는 다시 왕궁으로 돌아가야 한다. 왕궁으로 돌아가 미로 속에서 밤마다 벽지 무늬를 세고, 티끌하나 없이 말끔한 거울들을 피해 달아나고, 수정유리병을 깰까봐 조심하고, 똑똑한 자들 앞에서 바보인 척 하며 살아가야 한다. 어쩌면 아이는 왕궁이 모으고 있는 수많은 장식품 중 하나로 전락할 지도 모른다. 쇼룸 속의 연기자처럼 왕을 연기하는 전문배우가 돼야 할지도 모른다. 계몽주의자들의 귀염둥이이자 마스코트로 대중 앞에서 웃음을 팔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는 반드시 왕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