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예찬2 - 완결

by 곡도




어둠.

숨소리.

정확히 말하면 숨소리는 아니다.

부대낌. 오르락내리락 부대끼는 소리.

그리고 따듯한 온기가 있다. 알 수 없는 덩어리가 뿜어내는 열기와 열기 바로 밑에서 끈적하게 배어 오르는 습기.

온갖 구멍에서 온갖 냄새가 풍겨 나온다. 하지만 이 지독한 악취는 불쾌감을 유발하지 않는다. 불쾌감은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지식이다. 어둠 너머까지 스며들어간 피부는 모든 불쾌감을 뛰어 넘을 만큼 예민하다. 피부 아래 내장 구석구석까지 피부로 꽉 들어찬 것 같은 둔중한 육질감. 그리고 물컹한 어둠 속에 박혀 있는 바늘처럼 거치적거리는 뾰족한 뼈다귀들. 돌연 숨소리가 파고든다. 정확히 말하면 숨소리는 아니다. 따듯한 어둠 속에 스며있는 졸음이다. 구심점도 중력도 없는 졸음이 사방으로 퍼져간다. 까마득히 미끄러진다. 떨어지던 살덩이가 뼈다귀에 걸린다. 덜컥거린다. 열기와 열기 바로 밑에서 끈적하게 배어 오르는 습기. 그 습기가 어둠과 침묵에서 약간의 무게를 끌어 모은다. 덜그럭거린다. 흔들린다. 오르락내리락 부대끼는 소리. 어둠은 잠들지 않는다. 잠들지 않으니 꿈꾸지 않는다. 꿈꾸지 않으니 깨어나지도 않는다. 멀리서 검은 불꽃이 튄다. 온갖 구멍에서 온갖 냄새가 풍겨 나온다. 냄새는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지식이다. 냄새가 얼핏 코의 위치를 가늠케 한다. 어떤 냄새에는 희미하게 색이 묻어있다. 이미 많은 색을 잃었다. 회색, 갈색, 노란색, 붉은색이 영원히 사라졌다. 보라색, 파란색도 희미해졌다. 갈색과 초록색은 더 이상 구분이 되지 않는다. 연두색과 하늘색, 그리고 분홍색만이 때때로 따듯한 어둠 속으로 스며든다. 끈적하게 배어 오르는 습기. 구심점도 중력도 없는 망각이 사방으로 퍼져간다. 까마득히 미끄러진다. 흔들린다. 온갖 구멍에서 온갖 냄새가 풍겨 나온다. 냄새가 얼핏 코의 위치를 가늠케 한다. 하지만 눈은 영영 잃어버린 듯하다. 어쩌면 여기저기서 따로따로 굴러다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발가락이나 배꼽의 행방도 묘연하다. 가만있자, 손가락이 원래 몇 개였지? 눈은 원래 몇 개였더라? 떨어지던 살덩이가 뼈다귀에 걸린다. 덜컥거린다. 눈을 뜨고 있는 것일까. 똑바로 보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어둠을 본다고 할 수 있을까. 구심점도 중력도 없는 어둠이 사방으로 퍼져간다. 열기와 열기 바로 밑에서 끈적하게 배어 오르는 습기. 축축한 습기가 얼핏 혀의 위치를 가늠케 한다. 입맛을 다신다. 맛, 맛을 떠올려보려 한다. 하지만 이미 오래전에 미각을 잃었다. 더 이상 짠맛, 신맛, 쓴맛, 매운맛, 단맛을 구별할 수 없다. 그 중에서도 단맛은 가장 까마득히 멀어졌다. 설탕의 맛도, 설탕의 색깔도, 설탕의 모양도 사라졌다. ‘설탕’은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지식이다. 비록 ‘설탕’의 내용물은 텅 비었지만 ‘설탕’이라는 단어는 잊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한다. 바짝 말라버린 ‘설탕’을 ‘구두’와 ‘떡갈나무’, ‘시멘트’ ‘누룩’같은 수집품 속에 조심스럽게 집어넣는다. 가끔씩 사탕처럼 혀 사이로 굴려보기 위해서다. 설탕이 빠진 ‘설탕’에는 여전히 끈적끈적한 무언가가 스며있다. 일종의 따듯한 온기가 있다. 녹아내리고, 녹아내리고, 녹아내린 온기가 어둠의 우묵한 곳에 고인다. 피부 아래 내장 구석구석까지 온기로 꽉 들어찬 것 같은 둔중한 육질감. 뿌웅. 돌연 소리가 출현한다. 뿌웅. 덜그럭거린다. 뿌웅. 행위와 소리가 순전히 우연에 의해 연달아 일어난다. 때로는 순서가 뒤바뀌기도 한다. 뿌웅. 소리가 어둠과 침묵에서 약간의 무게를 끌어 모은다. 오르락내리락 부대끼는 소리. 뿌웅. 소리는 침묵한다. 뿌웅. 소리는 말이 없다. 뿌웅. 소리는 벙어리다. 뿌웅뿌웅. 소리는 아무리 많이 모여도 말이 되지 않는다. 말이 아무리 많이 모여도 소리가 되지 않는 것처럼. 말은 이곳에 없다. 어둠에 스며들지 못했다. 어둠은 거름망처럼 소리 이외의 모든 것을 걸러낸다. 말들이 걸러지고, 말들이 아닌 것들도 걸러진다. 오르락내리락 부대끼는 소리. 어디에선가 단단한 뼈마디가 파고든다. 출렁인다. 덜그럭거린다. 소리가 말을 지운다. 말이 소리를 지웠던 것처럼. 축 늘어지는 밑바닥. 말은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지식이다. 말이 빠져나간 자리로 어둠이 빈틈없이 채워진다. 어둠이 단단해진다. 움츠러든다. 멀리서 검은 불꽃이 튄다. 연두색과 하늘색, 분홍색이 불티처럼 튀어 올랐다가 사라진다. 아, 불꽃의 잔상에서 ‘음악’이라는 단어가 불연 듯 떠오른다. ‘음악’이 뭐더라? 뿌웅. 음악은 소리일까? 말일까? 둘 다일까? 소리는 아무리 많이 모여도 음악이 되지 않는다. 말은 아무리 많이 모여도 음악이 되지 않는다. 라 라라라 라라 라라라라 라라라 라라 라 라 라라라 라라 라라 라라라라 라 라라라라 라라라라 라라라 라 라 라라 라라라 라라라라 라라 라라라 라. 이건 음악이 아니다. 그저 문자 ‘라’와, 그 ‘라’와 전혀 상관없는 문자 ‘라’들의 조합. 라라라 라 라라 라라라 라라 라라라라라 라 라라라 라라 라 라라 라라라 라 라라라라라 라라 라라라 라라 라. 텅 빈 머릿속으로 ‘라’의 나열들이 소리 없이 지나간다. 라라 라 라 라라라라라 라라라 라라라 라 라라 라라라라 라 라라라라 라라 라 라라라 라라라 라라라라라 라 라 라라. ‘음악’은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지식이다. 모든 단어들 중에서도 가장 까마득히 멀어졌다. 비록 ‘음악’의 내용물은 텅 비었지만 ‘음악’이라는 단어는 잊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한다. 바짝 말린 ‘음악’을 ‘구두’와 ‘떡갈나무’, ‘시멘트’, ‘누룩’, ‘설탕’ 같은 수집품 속에 조심스럽게 집어넣는다. 아니. 아니다. ‘음악’은 ‘구두’와 ‘떡갈나무’, ‘시멘트’, ‘누룩’, ‘설탕’ 같은 수집품 속에 넣을 수 없다. ‘음악’은 내용물뿐만 아니라 껍질까지 텅 비었다. 라라라 라 라 라라라 라라 라라라라라 라라 라라라라라라 라 라 라 라라라라라라 라라 라라라라라 라 라 라라라 라 라 라라라. 얼마든지 더 할 수 있다. 라라 라라 라라라라 라라라 라 라라라 라라라라라 라라 라 라라 라라라라라 라라라 라 라라라 라라라라 라라 라라. 돌연 숨소리가 파고든다. 정확히 말하면 숨소리는 아니다. 따듯한 어둠 속에 스며있는 하품이다. 구심점도 중력도 없는 하품이 사방으로 퍼져간다. 흔들린다. 오르락내리락 부대끼는 소리. 생명은 잠들지 않는다. 잠들지 않으니 꿈꾸지 않는다. 꿈꾸지 않으니 깨어나지도 않는다. 오르락내리락 부대끼는 소리. 경련이 졸음과 함께 번져간다. 미끄러진다. 번들거린다. 떨어지던 살덩이가 뼈다귀에 걸린다. 덜컥거린다. 열기와 열기 바로 밑에서 끈적하게 배어 오르는 습기. 구심점도 중력도 없는 습기가 사방으로 퍼져간다. 부풀어 오른다. 단단해진다. 피부 아래 내장 구석구석까지 습기로 꽉 들어찬 것 같은 둔중한 육질감. 온갖 구멍에서 온갖 냄새가 풍겨 나온다. 하지만 이 지독한 악취는 불쾌감을 유발하지 않는다. 입맛을 다신다. 오르락내리락 부대끼는 소리. 돌연 열기가 파고든다. 어둠 너머까지 스며들어간 열기는 모든 쾌감을 뛰어 넘을 만큼 예민하다. 뒤엉킨다. 무거워진다. 구심점도 중력도 없는 무게가 사방으로 퍼져간다. 까마득히 미끄러진다. 알 수 없는 덩어리가 뿜어내는 열기와 열기 바로 밑에서 끈적하게 배어 오르는 습기. 움찔거린다. 번들거린다. 축 늘어지는 밑바닥. 멀리서 검은 불꽃이 튄다. 어둠 속에서 튀어 오르는 검은색. 쾌락은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지식이다. 그런데 ‘이해한다’는 건 무슨 뜻일까? 더 밝아진다는 걸까? 더 어두워진다는 걸까? ‘이해’ 역시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지식이다. 멸종된 지식이다. 내용물뿐만 아니라 껍질까지 텅 비었다. 라 라라 라 라라라 라라라 라 라라라라 라 라라라 라 라라라 라라라라 라라 라. 손가락 발가락들이 어둠 속을 멋대로 기어 다닌다. 라라라라라 라라라라 라라라 라라 라 라라 라라라 라라라라 라라라라라. 얼마든지 더 할 수 있다. 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 피부 아래 내장 구석구석까지 어둠으로 꽉 들어찬 것 같은 둔중한 육질감. 멀리서 검은 불꽃이 튄다. 꿈꾸지 않으니 깨어나지도 않는다. 잠들지 않으니 꿈꾸지 않는다. 어둠은 잠들지 않는다. 오르락내리락 부대끼는 소리. 흔들린다. 덜그럭거린다. 그 습기가 어둠과 침묵에서 약간의 무게를 끌어 모은다. 열기와 열기 바로 밑에서 끈적하게 배어 오르는 습기. 덜컥거린다. 떨어지던 살덩이가 뼈다귀에 걸린다. 까마득히 미끄러진다. 구심점도 중력도 없는 졸음이 사방으로 퍼져간다. 따듯한 어둠 속에 스며있는 졸음이다. 정확히 말하면 숨소리는 아니다. 돌연 숨소리가 파고든다. 그리고 물컹한 어둠 속에 박혀 있는 바늘처럼 거치적거리는 뾰족한 뼈다귀들. 피부 아래 내장 구석구석까지 피부로 꽉 들어찬 것 같은 둔중한 육질감. 어둠 너머까지 스며들어간 피부는 모든 불쾌감을 뛰어 넘을 만큼 예민하다. 불쾌감은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지식이다. 하지만 이 지독한 악취는 불쾌감을 유발하지 않는다. 온갖 구멍에서 온갖 냄새가 풍겨 나온다.

알 수 없는 덩어리가 뿜어내는 열기와 열기 바로 밑에서 끈적하게 배어 오르는 습기. 그리고 따듯한 온기가 있다.

오르락내리락 부대끼는 소리. 부대낌.

정확히 말하면 숨소리는 아니다.

숨소리.

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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