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오후에는 수혈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혈소판이 너무 낮아서 거의 2, 3일에 한 번 꼴로 수혈을 받아야 한다. 수혈을 받고 나면 머릿속이 조금 개운해진다. 머리 뒤쪽에서 웅얼거리던 소리도 잦아들고 혼탁해진 마음도 어느 정도 진정이 된다. 그러나 그 정도일 뿐 나로서는 딱히 큰 차이를 느끼지는 못하는데 아이 말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제법 멀쩡해 보인다나. 그럼 평소에는 대체 어떤 몰골인 걸까? 궁금하기도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거울을 보지 않는다. 두 달 전에 화장실에서 우연히 거울을 보고는 그만 변기 위로 쓰러져 두 주먹에 얼굴을 묻고 울어버리고 말았다. 거울과 머리 중 하나가 문드러질 때까지 거울에 머리를 짓이기고만 싶었다. 모든 걸 망쳐버렸어. 주어도 없는 이 생각이 칼날처럼 선명하게 머릿속을 난자했다. 모든 걸 망쳐버렸어. 그 뒤로 나는 거울을 보지 않는다. 그저 내 얼굴을 바라보는 아이의 얼굴에서 스치는 경련으로 대충 짐작해볼 뿐이다. 대신에 나는 내 얼굴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가끔 예전 사진을 꺼내본다. 지긋지긋해질 때까지 살 거라는, 혹은 웬만큼 살면 결국에는 지긋지긋해 질 거라는 자신감으로 노랗게 빛나는 얼굴. 하지만 오래 보고 있자면 이미 죽은 사람의 사진을 보고 있는 것처럼 섬뜩한 기분이 들어 치워버리곤 한다. 그런데 며칠 전에는 어쩐지 한참이나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자살을 떠올렸다. 내가 이 사진 속의 인물이라는 걸 사람들이 못 알아보기 전에, 내가 이 사진 속의 인물이라는 걸 내 자신이 못 알아보기 전에, 이만 마감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물론 나는 진심으로 자살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물론 나는 매일 자살에 대해 생각한다. 곧 자살조차 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당장 죽고 싶어진다. 그래서 나는 잠이 들 때마다 차라리 다시 깨어나지 않기를 바래본다. 내 나름으로는 소심한 자살인 셈이다. 그러나 깨어나서는 내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을 정도로 안심이 된다. 한숨 자고 일어난 것뿐인데 거의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 돌아온 것처럼 가슴이 미어진다. 그러고 보니 아이는 내가 잠을 너무 많이 잔다고 걱정이다. 이상한 일이다. 나는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어서 이만저만 고통이 아닌데 말이다. 그저 눈만 감고 있거나 1시간 남짓 졸다가 깨는 게 고작인데, 심지어 깨워도 일어나지 못하고 하루를 넘겨 꼬박 잘 때도 있다는 말에 나는 아연실색 한다. 손발에 핏기가 가시고 뱃속 어딘가가 비비 꼬이는 것처럼 구역질이 치밀어 오른다. 내게 지금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있는데, 누구나 다 그걸 뻔히 알고 있는데, 정작 나만 알지 못하는 것 같다. 하지만 정말 나를 역겹게 하는 건, 정말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나 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세상 천지에, 아니, 이 우주 전체에, 태초에서부터 최후까지, 오직 나 혼자 뿐이다.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다. 어쩌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우리에게는 이런 상황을 표현할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이 단어가 필요했던 사람들은 이미 모두 죽어버렸다. 이 단어는 죽어가는 사람들 속에 잉태되었다가 태어나지도 못하고 사산되어 버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침묵 속에서 홀로 죽어 간다. 나는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모르겠다. 나는 이런 상태가 빨리 끝나길 바래야 할지, 최대한 오래 계속되길 바래야 할지조차 모르겠다. 내게 남겨진 3개월이라는 시간도 얼마나 긴 시간인지 얼마나 짧은 시간인지 더 이상 판단이 서지를 않는다. 나는 이 병원에서 5개월을 있었다. 그 5개월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희망도 있었고 의욕도 있었다. 아니, 돌이켜 보면 참 좋은 날들이었다. 살만한 날들이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날들이었다. 진심으로 그렇다. 이제는 그 5개월의 날들이 5년 전처럼 까마득하기만 하다. 병원에 입원하던 날 의사는 항암을 무사히 마치고 골수이식만 잘 되면 완치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완치. 마치 신의 본명처럼 신성한 단어. 의사는 나의 맹신과 숭배를 갈취하기 위해 그 단어를 시전했다. 하지만 내가 확률을 묻자 의사는 머뭇거리며 50%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만 의사 앞에서 웃음을 터트렸다. 50%라니, 아무 의미도 없는 수치가 아닌가. 아니, 더 나쁘게도,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겠다고 의사 스스로가 인정한 꼴이 아닌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운이 불끈 솟았다.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거라면 이제 남은 건 의지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조건 노력하면 되는 것이다. 결코 포기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사람이 죽을 만큼 노력하고 또 노력하고 더 노력하면 무슨 수가 나도 나는 것이다. 나는 자신이 있었다. 자신이 없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나는 그것이 얼마나 무모한 객기였는지를 절실히 깨달았다. 나는 이 병에 대해, 백혈병에 대해 너무도 모르고 있었다. 백혈‘병’이라고 하니 진짜 병인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문제가 있어서 병에 걸렸고 그 문제만 해결하면 치료할 수 있을 거라는, 그런 인과 관계의 구조 속에서 모든 걸 손쉽게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백혈병은 ‘병’이 아니다. 그것은 죽은 시체의 발에 걸어 놓은 이름표와 같다. 그 시체의 살아생전 이름이 아니라 죽음 본인의 이름이다. 도대체가 이 병은 원인도 정체도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갑자기 증상이나 상태로 드러날 뿐인데 그 증상이나 상태라는 것들이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숫자로만 이루어져 있다. 백혈구 15840, 혈소판 23000, 혈색소 9.1, 호중구 0, 혈당 78, 총단백량 4.9, 알부민 2.1, 글로불린 2.8, 총빌리루빈 7.8, 알칼라인포스파타제 124, 지오티 56, 지피티 9, 크레아티닌 1.36, 혈액요소질소 34, 칼슘 8.7, 인 5.9, 나트륨 134, 칼륨 4.9, 염산 97, 이산화탄소 17, 마그네슘 2.5, 콜레스테롤 31... 그 숫자들이 너무나 엄중해서 의사나 환자 본인은 고사하고 심지어 신마저도 그 숫자와 숫자 사이에 개입하지 못할 것이다. 신도 영문을 모르는 것, 신보다 더 강하고 사악한 것, 신도 죽일 수 있는 것, 나는 그런 병에 걸렸다. 백혈병, 그것은 나의 이름이다. 마침내 짧은 노크 소리가 두 번 들리더니 간호사가 병실 안으로 들어온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간호사다. 얼굴이 둥글둥글하고 팔다리가 가느다란 이 간호사는 늘 지나치게 친절하다. 자칫 가식처럼 느껴져서 거부감이 들만도 한데 나는 그게 싫지가 않다. 어차피 지금 사람들이 내게 보이는 친절은 모두 동정과 가식뿐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확실하게 그렇게 해주 편이 더 낫다. 자신의 심경조차 분명히 정하지 못해 정직하게도 어중간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게 더욱 혐오스러운 일이다. 간호사는 피를 뽑고 혈압을 재면서 내 기분이라든지, 오한이 나지는 않는지, 물은 얼마나 마셨는지, 대소변은 보았는지 등을 묻는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아이가 내 대신 대답을 한다. 간호사는 가지고 온 노트에 무언가를 적더니 늘 그렇듯 잘 만들어진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재빨리 병실을 나간다. 나는 짧은 순간 마치 신선한 공기라도 들이마시는 것처럼 흠뻑 그 미소를 빨아올린다. 나보다 더 창백하고, 더 불결하며, 더 빨리 죽어가고 있는 듯한 이 병실에서 저 간호사의 미소만큼 온전한 건 없다. 저 미소마저 썩어 문드러지면 나는 내가 죽을 날짜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 이불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피로와 신경증, 그리고 내가 알 수 없는 여러 수고와 불만 때문에 아이의 얼굴은 누렇게 까칠하다. 그래도 최대한 내게 미소를 지어 보이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이는 간호사만큼 가식을 부릴 줄 모른다. 하긴 아이 역시 당사자인데 가식을 부려서 뭘 하겠는가. 아니, 아니다. 아이는 당사자가 아니다. 아이도 결국 3자일뿐이다. 아이는 이제 저 멀리 길거리를 오가는 낯선 이들만큼이나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기에 함께 있다. 그것이 우리의 심정을 뒤트는 것이다. 아이는 씻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간다. 곧 출근을 해야 할 시간이다. 서두르는 아이의 모습이 활기차 보인다. 아이는 이 병실을 벗어날 생각에 저절로 기쁜 듯하다. 아이는 오늘 하루를 또 거침없이 살아낼 것이다. 아픈 사람도, 철제침대도, 링거 줄도 없는 저 완강한 세상에서 말이다. 나는 오줌이 마렵다고 아이에게 말한다. 사실 아이가 일어나기 전부터 참고 있던 참이다. 아이는 곧바로 주저 없이 날렵하게 내 바지를 벗기고는 침대 맡에 엎어놓았던 소변기를 내 엉덩이 밑에 받혀준다. 이럴 땐 나도 아이도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나로 말하자면 부끄럽지 않은 건 아니지만 간악할 정도로 무감각해졌다. 어린 간호사들이 아랫도리를 이리저리 헤집는 것도 다반사이고, 오줌이 잘 나오지 않아 요도에 관을 꼽은 경우도 몇 번이나 있었다. 환자의 성기란 본인을 포함한 모두에게 그저 걸리적거리는 물건에 불과하다. 물론 그건 단지 성기에 한정된 얘기는 아니지만. 나는 오줌이 오줌 통 밖으로 새지 않도록 심열을 기울이느라 어느새 이마에 땀이 맺힌다. 오줌이 새어나가면 바지를 갈아입히고 침대 시트까지 갈아야 하는데 그게 아이에게는 보통 곤욕이 아니다. 그럴 때마다 아이는 화를 참느라 얼굴이 시뻘게지곤 한다. 나에게 화가 나는 건 아니다. 나 때문에 화가 나는 것이다. 아이는 그 두 가지를 구분하는 게 점점 힘에 부치는 모양이다. 저번에 한 번은 내게 그만 버럭 고함을 지르고는 본인이 더 당황하고 말았다. 앞으로 3개월 뒤면 나는 더 이상 이 일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본인은 이 기억을 10년, 30년, 혹은 평생도록 가져가야 한다는 게 두려웠을 것이다. 아이는 언제까지나 내게 고함을 지르고 지르고 또 질러야 할 것이다. 마침내 내가 끝났다는 신호를 보내자 아이가 오줌통을 내 다리 사이에서 들어올린다. 순간 톡 쏘는 신선한 오줌 냄새가 내 코를 찌른다. 나는 아이 몰래 이 냄새를 흠뻑 들이마신다. 정신이 번쩍 든다. 이것은 내게 허락된 소수의 몇몇 냄새들 중 하나다. 오줌 냄새, 변 냄새, 시트 냄새, 소독약 냄새, 멀건 미음 냄새. 그래도 이제 내 기분을 북돋우는 건 이 냄새들뿐이다. 태어나 코가 뚫려 첫 숨을 들이 쉴 때 거기에도 냄새가 있었을 것이다. 가끔 이 냄새들 사이로 예전에 맡았던 냄새들이 은근히 떠오른다. 집 앞 전봇대 옆에 마른 잡초와 함께 뒤엉켜 피어나던 먼지 섞인 들국화 냄새, 회사 건물 1층의 작은 카페 앞을 지날 때마다 진동하던 블랙커피 내리는 냄새, 센 불에 팔팔 끓여낸 시큼한 돼지고기 김치찌개 냄새, 낡은 자전거 앞바퀴에 듬뿍 칠 때마다 침이 고이게 하던 휘발유 냄새, 매번 너무 많이 넣어서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던 라일락 섬유 유연제 냄새, 그리고 생선 비린내 같은 냄새마저도 그립다. 머릿속까지 함부로 파고드는 그 고약한 냄새에 속이 뒤집혀 구역질을 해대면 퍽이나 즐거울 것 같다. 그래, 견딜 수 있는 건 뭐든지 다 즐거울 것 같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