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오줌통을 치우고 침대보를 확인한다. 오늘은 오줌을 침대에 흘리지 않은 모양이다. 긴장하고 있던 아이의 얼굴이 풀어진다. 내 바지를 추스르는 손길도 한결 부드럽다. 이불을 끌어올리며 짐짓 칭찬 한마디도 잊지 않는다. 나는 오줌을 싸면서 흘리지 않았다고 자식에게 칭찬을 듣는다. 가만히 안도하고 있던 나는 벌컥 화가 치밀어 오른다. 아이는 나를 마음껏 얕보고 있다. 나를 어린 짐승처럼 길들이려고 한다. 내가 오래 전 자신에게 했던 짓을 그대로 내게 되돌려주려고 한다. 아이와 나는 병에 걸리기 전에도 살뜰한 부모 자식 간은 아니었다. 함께 있으면 어쩐지 서로가 편하지 않았다. 그리고 서로가 편하지 않다는 걸 서로가 잘 알고 있었다. 아이는 나를 사랑할까? 어찌되었든 나는 그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나는 아이를 사랑할까? 물론 사랑한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그것만으로는 역시나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솔직히 나는 그리 좋은 부모는 아니었다. 내 책임을 다하긴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거기까지’라는 분명한 경계가 있었다. 나는 언제나 아이가 낯설었다. 태어나서 처음 만났던 순간에도 그랬고 아이가 커가면서는 더욱 그랬다. 나로부터 태어난 내 자식이 타인이라는 사실이, 나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완벽한 타인이라는 사실이 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어차피 완벽한 타인이라면, 내 주변의 수많은 타인들에 또 한 명을 보탠 것뿐이라면 굳이 아이를 가질 필요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었다. 사실 나와 아이 중 누구도 상대방을 선택한 건 아니라는 사실은 근본적이고도 극복할 수 없는 결핍이었다. 그 누구의 잘못도 없이 우리는 외롭고 억울했다. 그래, 분명 아이가 나보다 더 억울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아이보다 더 외로웠다. 아이가 오줌통을 씻어 침대 머리맡에 엎어 놓았을 때 아침 식사가 도착했다. 나는 내 앞에 놓인 하얀색 식판을 보자 숨이 턱 막히는 것 같다. 이것은 내가 오늘 세 번이나 버텨야할 첫 번째 고욕이다. 한 때는 무언가를 씹고 마시고 삼키는 게 삶의 기쁨이자 권리인 적이 있었지. 짜고 달고 매운 요리들이 푸짐하게 차려진 식탁 앞에 앉아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껏 입 안 가득 음식을 떠 넣으며 배를 두드리면서 희희낙락했던 날들. 그 모든 날들이 바로 내 생일이나 다름없었는데. 이제는 무언가를 먹는다는 게 노동이자 의무가 되어버렸다. 살기 위해 먹는 건지 먹기 위해 사는 건지,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를 하지만 나는 이제 오직 살기 위해서만 먹는다. 마치 죽음이 직접 한 숟가락씩 떠먹여주는 것처럼 벌벌 떨며 억지로 음식을 받아먹는다. 나는 이미 모든 식욕과 미각을 잃었다. 입안은 헐고 목은 부어오르고 위장을 쪼그라들어서 음식을 삼키기조차 힘들다. 겨우 몇 숟가락 먹고 나면 숨이 차고 온 몸이 땀에 흠뻑 젖는다. 음식을 먹기 위해서 먹은 음식 이상의 에너지를 써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나마도 내가 먹이를 주지 않으면 이 굶주린 육체는 내게 달려들어 나를 자근자근 뜯어먹고 말겠지. 이빨도 손톱도 발톱도 다 빠진 나는 그저 살아있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 목도 팔다리도 다 부러져서 사냥할 필요가 없는 먹잇감이다. 그래도 살아있는 동안은 최대한 살아있기 위해 나는 이 흥건한 쌀죽을 밀어 넣는다. 한 숟가락. 또 한 숟가락. 그 때 갑자기 아이가 소리를 꽥 지르는 바람에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뜬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죽이 내 입에서 턱을 타고 식판 위로 줄줄 흘러내리고 있다. 휴지를 뽑아 내 입가를 훔쳐내는 아이의 손길이 곱지 않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집중하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삼켜요. 아이가 딱 부러지게 말한다. 삼켜요. 같은 말을 반복한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삼키려다가 그만 토악질을 하고 만다. 쌀죽과 구토물이 범벅이 되어 이불 위로 쏟아진다. 아이는 정말 화가 나서 입술을 씹으며 눈알을 부라린다. 삼켜요. 그냥 꿀꺽 삼키면 되잖아요. 아이는 내가 노력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노력하려고만 하면 노력할 수 있는 데 충분히 노력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런가. 내가 노력하지 않는 건가. 노력하려고만 하면 노력할 수 있는 데 충분히 노력하지 않는 건가. 사실인지도 모른다. 난 더 노력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노력하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노력하고, 노력하기 위해 노력하고, 노력하기 위해 노력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러다보면 어느새 아득해져서 정신을 놓아버리고 만다. 아이는 더 먹으라며 계속해서 나를 다그치다가 내가 간신히 죽 반 그릇을 비우고 나서야 식판을 물린다. 어쨌든 자신은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건 사실이다. 아이는 나름의 최선을 다 하고 있다. 설사 아이가 아팠다고 해도 내가 이 만큼 간호를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다만 이 거리감만큼은 모두지 어쩔 수가 없다. 아이는 내게서 멀고 희미하고 차갑다. 아이의 시선은 늘 내가 아닌 내 뒤 어딘가를 보고 있다. 마치 내가 반쯤 투명하기라도 한 것처럼. 혹은 자신이 반쯤 투명하기라도 한 것처럼. 아이는 식판을 치우고 옷을 갈아입고는 출근길에 나선다. 아이는 마지막으로 병실을 둘러보며 무언가 할 말이라도 있는 것처럼 우물거리다가 그저 다녀올게요 라고 말한다.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내 인생은 고작 3개월 밖에 남지 않았다. 그 귀한 하루를 또 이 좁은 병실의 철제 침대에 누워 졸다가 깨다가 또 졸기를 반복하며 보낼 것이다. 아이는 힘차게 병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건강하고 정상적인 삶을 향해 빠르게 발걸음을 옮긴다. 분명 내심 속이 후련할 것이다. 아픈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는 걸 실감하며 미소 지을 것이다. 햇빛이 환하게 쏟아지는 거리에서 사람들과 힘차게 어깨를 부딪치며 당당하게 미안하다고 외칠 것이다. 나도 마음껏 거리를 활보하던 때가 있었는데. 불과 몇 달 전에. 이제 다시는 그런 날은 오지 않는다. 나는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게 이상하다. 아이가 가고 나자 병실이 텅 빈다. 이제 나는 홀로 고독하고 자유롭다. 내가 원한 건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그건 사실이다. 솔직히 말해서 이제 아이도 거치적거린다. 아이에 대한 내 애정도, 나에 대한 아이의 애정도 액자에 넣어 걸어놓은 사진일 뿐이다. 나는 분에 넘치게 거창하고 강박적으로 반듯해서 마치 관짝처럼 침울해진 액자 속의 화학 처리된 사진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나 자신을, 상기해야 한다. 나는 점점 모든 일에, 모든 일상에, 모든 감정에 무감각해진다. 그런 나의 무감각에도 무감각해진다. 지나간 모든 기억들도 평준화 되고 표준화 되어서 마치 똑같이 생긴 공산품 유리병에 각각 똑같은 양이 들어 있는 투명한 액체 같다. 유리병에 붙어 있는 라벨에는 각자 제목이 쓰여 있지만 유리병 속의 액체는 색도, 냄새도, 맛도 느껴지지 않는다. 1리터의 맹물에 희석된 단 한방울의 기억처럼 말이다. 시간이 갈수록 유리병은 점점 커지고 물의 양도 점점 많아져서, 결국 유리병마저 사라지고 드넓은 바다가 되다가, 마침내 그 바다마저 사라지면. 나는 눈을 꿈뻑이며 창밖을 바라본다. 9층 창밖으로 보이는 건 하늘뿐이다. 옅은 안개구름이 끼어 하늘빛이 희뿌옇다. 나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가 불쑥 새 한마리가 창문 앞을 가로지르는 바람에 깜짝 놀란다.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나. 기다리고 있지. 무엇을. 죽기를. 그 외에는 더 이상 할 게 없으니까. 세상에. 진부하기도 하지. 씨팔, 나는 웃는다. 씨팔, 나는 죽는다. 씨팔, 한 번 더 웃어보고 싶지만 기운이 없어 눈을 감는다. 그런데 별안간 옆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 다시 눈을 뜬다. 아이가 창가에 서서 누군가와 전화를 하고 있다. 창밖은 어둡고 병실 안도 화장실 불만 켜져 있을 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벌써 저녁이 된 건가? 그럼 나는 낮 동안 뭘 하고 있었던 거지? 아니, 그건 어제였나? 잠시 어안이 벙벙하여 숨을 죽이고 있는데 아이가 통화하는 소리가 들린다. 들린다기 보다는 그저 웅얼거리는 소음 사이로 문득 몇몇 단어가 귀를 파고든다. 묘지. 장례식장. 연락처. 순간 나는 목뼈가 꺾어진 것처럼 온 몸이 뻣뻣하게 굳는다. 뱃가죽이 침대 밑으로 쑥 가라앉고 어둠이 내 두 눈을 짓무른다. 혹시 이미 나는 죽은 사람이 아닌가 혼란스럽다. 아니, 육체는 아직 나를 단단히 침대 위에 묶어놓고 있다. 나는 소리를 지르고 싶지만 대신 두 눈을 질끈 감는다. 나는 듣지 말아야 할 말을 들었다. 살아있는 내가 들을 얘기가 아니었다. 아직 3달이나 남았는데. 어쩌면 그보다 좀 더 살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저렇게 차분하게. 바로 내 옆에서. 내가 얼떨결에 발을 버둥거리는 바람에 아이는 황급히 전화를 끊는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일어나셨어요, 벌써 1시간 전에 저녁식사가 왔는데 잠이 깊이 들어 깨우지 않았어요, 하며 식판을 내온다. 나는 소름이 끼치지만 시키는 대로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나 숟가락을 든다. 그리고 차갑게 식은 죽을 기계적으로 입안으로 밀어 넣는다. 어쨌든 지금은 무언가 할일이 있다는 게 다행이다. 안 그러면 발작이라도 일으킬 것만 같다. 아이는 내가 씩씩하게 죽을 먹어치우자 얼굴이 환해지며 좋아한다. 나는 그 진심을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아이는 내가 최대한 오래 살기를 기대하는 것만큼이나 최대한 빨리 죽는 걸 대비하고 있는 것뿐이다. 이건 선악이나 윤리의 문제도 아니고 모순, 위선, 가증도 아니다. 그저 아이가 처해 있는 뒤틀린 현실 그대로일 뿐이다. 식사 때마다 내게 밥을 먹이는 것인지 아니면 암덩어리에게 밥을 먹이는 것인지 헷갈리는 것처럼 말이다. 아이는 나에게 인격이 없어진 것인지 아니면 암에게 인격이 생긴 것인지 혼란할 것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실은 내가 진짜 내가 아니라 내 행세를 하고 있는 암덩어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종종 든다. 자기 자신이 바로 암인 줄도 모르고 암에 걸렸다며 괴로워하는 꼴이라니 한편 우습고 한편 소름이 끼친다. 어쨌든 아이는 최선을 다해 자신의 현실에 적응하고 또 대처하고 있다. 반면 나에게는 현실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그러니 적응하고 대처할 수가 없다. 나는 그냥 방치하고 있다. 나는 그냥 방치되어 있다. 나의 현실은 이미 과거가 되었고 미래는 영영 오지 않는다. 나는 자꾸만 현실을 앞질러 허공으로 흩어진다. 순간 속에서 산 채로 딱딱해진다. 구석에 놓여있는 뻔한 물건처럼. 그래서 아이도 내 옆에서 그런 전화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방에 혼자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깜박 잊은 것이다. 이제 살아있는 나보다 내 장례식이 더 중요해 진 것이다. 나는 참석할 수 없는 나의 장례식. 이미 모든 사람들이 장례식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자꾸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다. 하지만 곧 내가 도착하리라는 걸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아아,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이러다 정말 큰일 나는데. 뭐라도 빨리 해야 돼. 어떻게 해서든 무슨 수를 써야 해. 나는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도망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도 나를 찾을 수 없는 곳에 꼭꼭 숨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 세상 어디라도 갈 것이다. 멀리, 아주 멀리, 먼 나라, 새로운 세계, 다른 삶. 나는 벌떡 몸을 일으키려 한다. 그러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몸이 도망가기를 거부한다. 몸이 나를 힘껏 움켜 안는다. 너무 늦었어. 이미 내 몸은 죽음과 한통속이 되었어. 내 몸이 나를 죽음에게 팔아 넘겼어. 나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침대 위에서 허우적거린다. 어푸어푸 침대 밑으로 가라앉았다가 떠오르기를 반복하다. 빠져 죽을 것처럼 숨이 찬다. 그 와중에도 창밖에서는 자꾸 해가 뜬다. 벌써 며칠 째 나는 밤을 보지 못했다. 며칠이 지났는지도 알지 못한다. 하루에 해가 여러 번 뜨는 건지 하루가 일주일 내내 계속되고 있는 건지 나는 모른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정확히 뭐가 이상한지도 모르겠고 그저 그런가 보다 할 수밖에는 도리가 없다. 밤이 사라지고부터 나는 아예 잠을 자지 못한다. 그러나 햇빛이 너무 눈부셔서 눈을 뜰 수가 없다. 나는 소리를 지르고 싶지만 침묵한다. 아무도 듣지 못할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