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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Oct 18. 2024

불면증 (17)




     경애는 우선 찬 맥주 두 병과 땅콩을 차려 내고는 주방으로 달려갔다. 오마담도 가게 문을 걸어 잠그고 주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주방장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안주며 술상 준비를 마담과 경애가 직접 해야 했다. 수철과 현태는 익숙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서 우선 맥주를 한 잔씩 들이키며 목을 축였다. 현태는 주방을 등지고, 수철은 주방 쪽을 바라보며 앉았는데 이 자리 배치는 그들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항상 그대로였다. 처음에는 우연히 그렇게 앉았을 뿐이지만 그 후에는 지정석처럼 되어 버렸고 그들도 ‘자신의 자리’에 앉는 것이 훨씬 편하게 느껴졌다. 

     수철은 자리에 앉자마자 담배를 꺼내 피워대기 시작했다. 담배연기를 싫어해서 평소에는 타박을 주는 현태였지만 주점 안에서 만큼은 묵과해 주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현태야말로 일부러 폐 속 깊이 숨을 들이키며 술보다 담배 연기에 먼저 취하곤 했다. 뿌연 담배 연기가 퍼지면서 주점 안은 점차 아늑하고 차분해졌다. 두 사람은 머리 위를 떠도는 연기를 바라보며 말없이 맥주를 홀짝였다. 불규칙한 무늬를 그리며 회칠한 벽이 전등 불빛을 받아 노랗게 빛나고, 다리를 떠는 버릇이 있는 수철 때문에 탁자가 규칙적으로 삐걱거렸다. 두 사람은 말없이 마주보며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얼마 안 있어 오마담과 경애가 안주 접시들과 싸구려 양주들을 쟁반 두 개에 가득 나누어 들고서 나타났다. 늘 그렇듯 마담은 수철 옆에, 경애는 현태 옆에 자리를 잡았다. 이 역시도 첫날 수철이 둘 중 한 사람이라도 어린 여자와 앉는 게 좋겠다며 현태 옆에 경애를 앉히면서 관행처럼 굳어진 것이었다. 같은 장소, 같은 자리, 같은 사람들, 같은 여자, 같은 담배 향기, 더 밝지도 더 어둡지도 않게 언제나 똑같이 빛나는 오렌지색 불빛.   

     안주와 술이 한상 가득 차려지고 여자들이 그들의 옆구리에 착 붙어 오자 두 사람도 그제서야 왁자지껄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사실 주로 떠드는 것은 오마담과 수철이었고, 현태와 경애는 듣는 쪽이었다. 

     “그러니까 형님, 아주 글러먹었다니까.”

     양주 한 병을 거의 혼자 다 비우고 두 번째 병을 따면서 후끈 취기가 오른 수철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마담이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맞장구를 쳤다.

     “수철씨 말이 맞아. 세상에 좋은 사람들 등쳐먹는 나쁜 인간들이 얼마나 많니? 나만 해도 이제껏 그런 새끼들한테 엄청 뜯기면서 살았다구. 하나 같이 입으로는 온갖 사탕발림을 나불대더니 결국 필요한 것만 쏙 빼먹고는 뒤도 안돌아보고 내빼더라니까. 그런 새끼들은 이 안에 아무 것도 없어. 텅 비었어. 헐었어.  온통 내장이랑 똥만 찬 것들. 그 새끼들이 약속만 지켰어도 난 적어도 다섯 번은 결혼했을 거야.”

     “그럼 지금쯤 싸모님 소리 들으면서 살았을 텐데.

     경애가 술잔을 쳐들며 쾌활하게 외쳤다. 

     “무슨, 그 위자료 다 모아서 지금쯤 더 큰 술집을 열었겠지.”

     오른손바닥을 쫙 피고 흔드는 마담의 말에 경애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고 현태도 덩달아 히죽거렸다. 하지만 수철은 듣는 둥 마는 둥 젓가락으로 접시를 두드리며 언성을 높였다.

     “아이, 누님, 내 얘기는 그게 아니라, 내 말은 우리가 문제라는 겁니다. 이 모든 게 우리 잘못이라구요. 뭐든지 고분고분한 우리가 등신이라니까. 모르겠어요? 순진하고 성실한 게 미덕이 아니에요. 오히려 그건 죄야, 죄. 세상에 무지함을 퍼트린 죄. 비열한 놈들을 위해 봉사한 죄. 혼자만 결백한 척 거들먹거린 죄.”

     “뭐야, 그러니까 수철씨 얘기는, 날 이용해 먹고 내뺀 연놈들보다 속아 넘어간 내 잘못이 더 크다는 거야?”

     마담이 연기가 피어오르는 담배를 마스카라가 번진 눈꺼풀 앞에서 흔들어대며 말했다. 그 바람에 담뱃재가 골뱅이 무침 접시 위로 떨어졌다. 

     “맞아. 바로 그거지. 생각해 봐. 누님을 속인 인간들이 어떻게 누님을 속일 수 있었겠어요? 바로 누님이 속아 넘어갔기 때문 아뇨? 속여 넘길 수 있는 사람을 속여 넘긴 게 무슨 죄일까? 그건 거의 초대나 마찬가지 아냐? 빨개벗고 달려드는 거나 마찬가지 아니냐고. 일종의  불가항력인 거지.”

     “차아, 건방지게.”

     마담은 비뚤어지게 웃으며 양주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오히려 듣고 있던 경애가 불쾌한 기색을 띄며 수철에게 항의했다. 

     “마담 언니는 그냥 착해서 당한 거라니까요.”

     “착하다고? 좋아. 맞아. 물론 그 놈들이 나쁜 놈들이지. 아주 썅놈들이야. 늘 당하는 건 여기 누님처럼 착한 사람들뿐이지. 근데 말이야, 그렇다면 도대체 착하다는 게 무슨 소용이지? 결국 우리의 발목을 잡을 뿐이라면 말이야. 자자, 생각해 봐요. 세상을 좀 더 넓게 보라니까. 도덕이니, 양심이니, 무슨 윤리니, 법이니, 씨팔, 어린애들처럼 어른들에게 잘 보이려고 아양이나 떨지 말고. 이 세상 진짜들, 진짜들은 우리와는 전혀 다르게 살고 있다구요.”

     어느새 연설이라도 하는 것처럼 큰소리를 탕탕치는 수철에게 오마담은 입가를 훔치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도통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 진짜는 뭐고, 다르게 산다는 건 또 뭐야?”

     생활에 대한 푸념, 먹고 사는 걱정, 상사에 대한 증오, 정치인에 대한 비난, 보수나 진보의 진영 논리, 재정 관리, 주식과 부동산 재테크, 각종 세금 계산, 가족 불화, 유산 상속 분쟁, 마누라 험담, 자식에 대한 실망, 치정 관계, 노후 걱정, 각종 지병 관리, 정신과 치료, 일상의 진부함, 무기력과 우울, 자괴감, 수치심, 고작 이게 다라는 혹은 정말 여기까지라는 놀라움 등등등, 남자들 겪는 온갖 문제에 대해 잘 짜여진 매뉴얼이라도 있는 것처럼 거침없이 맞장구 쳐줄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그녀였지만 수철이 하는 말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예를 들면 이런 거라고. 옛날부터 근친상간은 절대 금기였지만 왕족들은 어땠냐 하면 말이야, 오히려 대놓고 근친상간을 했어요. 친딸하고, 아들하고, 동생하고, 조카하고, 손녀 손자하고 막, 응, 막 했다니까. 그럼 어떻게 되는 지 알아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알겠어요? 근친상간을 하면 그건 더 이상 근칭상간이 아니라니까. 그렇게 그들은 그 따위 세속의 윤리에서 벗어나 있는 거라고. 위대하기에 벗어나 있고 벗어나 있기에 위대하지.

     “뭐?”

     현태, 오마담, 경애가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별안간 튀어나온 ‘근친상간’이란 말에 모두들 얼이 빠졌다. 경애는 단어 자체가 익숙하지 않은지 미간을 찌푸리며 ‘근친상간’을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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