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자아, 들어봐요.”
수철은 들고 있던 술잔을 탁자에 내려놓고는 호기 있게 팔을 흔들며 외쳤다.
“세상은 스포츠가 아니라는 거야. 그런데 모두들 이게 무슨 대단한 페어 플레이인양 굴고 있는 게 아주 우스워 죽겠다니까. 아니, 아니지, 말하자면 이건 하나의 잘 짜인 스포츠란 말이에요. 누군가 규칙을 만들고 또 심판도 보지. 하지만 생각해봐요. 대체 왜 축구는 발로만 공을 차야하는 거죠? 왜 손을 쓰면 안 되는 거야? 왜 공을 담장 밖으로 넘겨 버리면 안 되냐고. 그저 합성섬유로 만든 공을 차고 노는 공놀이일 뿐인데, 그걸 위해 어마어마한 규모의 경기장을 짓고, 몇 천억 씩 자금이 왔다 갔다 하고, 응, 고작 공 좀 잘 찬다고 몇 십억, 몇 백억 씩 받아 챙기지를 않나, 규칙 하나하나에 사람 목숨이라도 걸린 것마냥 엄중하고, 진짜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비장하게 주먹을 휘두르잖아. 그러니까 다 농담이나 미신일 뿐인데도 아무도 웃지를 않는 거야. 모두가 너무 진지하다고.”
“저기요, 그럼 야구를 보면 되잖아.”
이렇게 말하는 경애의 안색 역시 너무나 진지했기 때문에 현태는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오마담 역시 오뎅 꼬치에서 오뎅을 한 입 베어 물다 말고 해죽거렸다. 경애도 주책없이 따라 웃었다. 결국 세 사람은 헛기침까지 해대며 배를 움켜쥐고 실컷 웃었다. 아무래도 이건 바보 같은 대화였다. 술자리에서야 어떤 어리석고 미련한 얘기든 다 허용되기 마련이지만 수철의 주장은 너무나 유치하고 진부해서 요즘에는 아이들 만화 대사에서나 겨우 쓰일 법했다. 그런데도 저토록 거침없이 줄줄 읊어대는 건 분명 인터넷을 통해 이런 얘기들을, 아니, 오직 이런 얘기들만을 수없이 들어오고 또 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깔깔거리며 웃어 재끼는 세 사람을 수철은 손바닥으로 입가를 훔치며 빤히 노려보았다. 현실에서 확장된 지평이 다시 현실로 확장될 때 과연 웃음기를 잃는 건 어느 쪽인가.
“웃을 테면 웃어요. 경애씨 말이 그리 틀린 것도 아니니까. 결국 우리는 야구 빠따를 들고 축구장으로 쳐들어가야 할 판이야. 축구공으로 야구를 하거나, 아니면 야구 방망이로 축구공을 찢어버리기 위해서 말이야. 하여간 어느 쪽이든 난 구경꾼은 되지 않을 테니까. 구석에서 순순히 박수나 치는 등신은 되지 않겠다구요. 그러라고 우리를 태어나게 하고, 우리를 키우고, 우리를 교육시키고, 우리에게 일자리를 주고, 결혼을 시키고, 결국 또 다른 애새끼를 낳게 하지만, 난 조금도 감사하지 않아. 꼭 태어난 게 내 빚인 것처럼, 살면 살수록 빚이 점점 더 불어나는 것처럼, 죽을 때까지 상환을 연장해주고 있는 것처럼 숨쉬듯이 내게 죄의식을 세뇌시켜도 난 눈꼽만큼도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구요. 모르겠어요? 그 놈들은 우리가 빈털털이가 되기를 원해요. 정말 완전히 아무 것도 없는, 정말 완전히 아무 것도 아닌 빈털털이가 되기를 원한다니까."
“아이구야, 또 그놈의 음모 타령이냐?”
현태는 휴지를 구겨서 수철에게 던지며 심술궂게 웃었다. 경애 역시 영문도 모르고 따라 웃으며 수철의 팔뚝을 손바닥으로 살짝 때렸다. 하지만 여전히 수철은 웃지를 않았다.
"모르겠어요? 왜 갈수록 점점 더 음모론이 판을 치는지? 음모가 우리에게 기생하는 게 아니라 바로 우리가 음모에게 기생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최대한의 진리를 밝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최소한의 거짓을 밝히기 위해서지. 적어도 자신의 존엄성만큼은 지키려는 거야."
순간 현태는 빙글빙글 미소짓던 입꼬리를 꽉 비틀었다. '존엄성'이라는 단어가 위장에서 역류한 트림처럼 현태의 비위를 역겹게 했다. 그것은 죽은 생선이나 썩은 계란의 비린내 같은 게 아니라 유황처럼 질식할 것 같은 화공약품의 냄새였다.
“뭔 소리인지 도통 못 알아 처먹겠네. 음모고 존엄이고 다 상관없으니까 나는 돈이나 많이 벌었으면 좋겠구만.”
마담이 투덜대며 맥주잔을 입으로 가져가려는데 별안간 수철이 덥석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술잔의 맥주가 왈칵 탁자 위로 흘러넘쳤다. 모두들 어리둥절해서 수철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아주 잠깐동안 아주 긴 침묵이 이어졌다. 수철이 지나치게 흥분한 것 같아 현태는 슬슬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누님, 봐요. 이것 좀 봐요. 누님은 이게 좋다는 거죠?”
수철은 벌떡 일어나더니 품속을 뒤져 지갑에서 오만 원짜리 네 장을 꺼내 들고는 부채처럼 바람을 일으키며 세 사람의 눈앞에서 흔들어댔다.
“자, 봐. 돈이야. 모두가 좋아하는 돈, 돈, 돈, 돈. 그런데 돈이 뭐죠? 대체 돈이 뭐냐구요. 돈은 그냥 종이 쪼가리야. 고작 몇 십 원을 들여서 오만 원이라는 글자를 인쇄한 종이 쪼가리에 불과해. 이게 정말 오만 원의 가치가 있는 게 아니라니까? 몰랐죠? 못 믿겠죠? 한 번 보여줄까요?”
그러더니 수철은 쥐고 있던 오만 원짜리 네 장을 순식간에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나머지 세 사람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마치 눈앞에서 사람의 사지가 찢겨 나가는 걸 본 사람들처럼, 마치 영혼의 불멸을 철썩같이 믿고 있던 사람들처럼, 마치 돈이 찢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전 처음 깨달은 사람들처럼 말이다. 경애는 얼떨결에 입을 가리고 비명을 질렀고 마담은 얼른 손을 뻗어 떨어져 내리는 돈 조각들을 받아내려 했다. 감히 돈을 찢다니. 세상에, 감히. 물론 영화에서 처럼 한겨울 산속에서 고립되면 몸을 덥히기 위해 돈뭉치를 태울 수 있다. 아사 직전이 되면 살기 위해 인육이라도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지갑에서 돈을 꺼내 사람들 면전에서 찢어버린다는 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갈가리 찢어진 돈 조각들이 음식물이 남아 있는 접시 위와 더러운 바닥으로 흩어지는 걸 바라보면서 세 사람은 신성 모독을 직접 목도한 것만큼 징그럽고 혐오스러운 분노에 사로잡혔다. 가장 먼저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른 건 오마담이었다.
“미쳤어?”
경애는 두 손을 바들바들 떨면서 테이블 위에 떨어진 조각들 중에서 그나마 큰 조각들을 주섬주섬 집어 들고 다시 맞추어 보려했다.
“호들갑 떨지 마요. 종이 쪼가리일 뿐이라니까. 사람을 죽인 게 아니라구요. 그런데 꼭 돈에 인격이라도 있는 것처럼, 아니, 우리의 인격이 돈에서라도 나오는 것처럼 야단들이지.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가 얼마나 한심하게 살고 있는지 똑똑히 보란 말이에요. 몇 십 원짜리 인생을 몇 백만 원, 몇 천만 원에 강매당하면서도 싸게 샀다고 좋아하는 꼴이지. 몽창 다 그런 식이야."
수철은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렸다. 현태와 눈이 마주친 마담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느새 거의 다 주워 모은 오만 원짜리 조각들을 테이블 위에 수북하게 쌓아 올리며 경애가 말했다.
“아유, 오빠, 뭔 말인 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어쩌겠어.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비가 오면 비를 맞아야지 어쩌겠냐구. 비를 멈출 순 없잖아요? 우산이나 사는 게 고작이지.”
그 말이 놀라울 정도로 타당해서 현태는 저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에게는 우산이 필요하다. 작고, 튼튼하지도 않고, 결국 발은 흠뻑 젖고 말겠지만, 그래도 우산이 있어야 한다. 그것조차 장만하기 벅찬 것이 삶이 아닌가. 그거라도 살 수 있어서 참 다행이 아닌가.
“백 번 옳은 말이지.”
마담은 맞장구를 쳤고 현태는 더 이상 수철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수철은 버럭 언성을 높였다.
“아니, 나는 그렇게 살지 않을 겁니다. 아니, 난 그렇게 등신같이 살지는 않을 거예요. 간신히 우산 하나 달랑 쓰고 빌빌거리며 빗속을 뛰어다니지는 않을 거라구요. 두고 봐요. 머지않아 알게 될 테니까. 아니, 나중에 딴 소리나 마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