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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증 (28)

by 곡도




“사진첩을 가져오래?”

“네.”

미숙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현태는 차마 어머니와 눈을 마주칠 수 없어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녹슨 쇠맛처럼 에리고 알싸하니 모질고 통쾌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혹시 너, 니 아버지가 어디 사는지 알고 있어? 그 동안 그 집에 드나들고 있었니?”

현태의 눈에 미숙은 마치 머리카락이 다 삐죽이 곤두선 것처럼 보였다.

“아뇨, 전 몰라요. 그리고 내가 왜 거기를 드나들어요.”

이것은 사실이었다. 병규는 현태에게 자신의 주소를 알려준 적이 없었고 현태 역시 묻지 않았다. 다른 여자 집으로 떠난 아버지의 주소를 묻는 건 마치 그들에게 공모하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현태는 아버지나 그 여자에게 별다른 유감이 없었다. 용서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랬다. 6년 전 아버지의 외도로 온 집안이 난장판이 됐을 때도 현태는 가족 중 유일하게 차분했던 사람이었다. 아니, 그것은 차분함을 넘어 냉소에 가까웠다. 아버지의 외도를 알게 된 어머니의 충격, 격분, 결론 없는 시비, 꼬리에 꼬리를 무는 다툼 사이사이에 잠깐씩 찾아오는 화해, 기만적인 용서, 가장된 평화, 다시 갑작스레 반복되는 발작, 악다구니, 비난, 책임전가, 증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경멸들을 보고 들으면서 그는 꼭 오래 전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이, 아니 그 보다는 이미 까마득히 오래 전부터 벌어지고 있었던 일이라는 듯이 무덤덤했다.

일단 원칙적으로 그것은 부부사이의 문제이니 자식이라고 해서 함부로 끼어들 권리나 의무는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자신의 문제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닌데 괜히 골머리를 썩거나 흥분할 필요가 무엇인가. 그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그 지루한 반복이 어떤 식으로든 빨리 지나가버리길 바랄 뿐이었고, 결국 아버지가 집을 나갔을 때는 차라리 속이 후련했다.

“제가 가지고 있다가 아버지가 서울에 오실 때 드리기로 했어요.”

“이런 씨, 염치없는 인간 같으니. 주기는 뭘 줘? 내가 싸그리 찢어 버렸으면 찢어 버렸지 순순히 줄 것 같아? 웃기고들 있네.”

그녀가 늘어진 입가를 떨며 고함을 질렀다.

“왜요. 별 것도 아닌데 그냥 줘버려요. 제가 이미 주겠다고 했어요.”

현태도 지지 않고 언성을 높였다. 악랄한 즐거움이 그의 마음에 가득했다.

“누구 맘대로?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주겠다고 했다고?”

“달라고 하면 그냥 주면 되지 뭐가 어때서요? 엄마가 그걸 가지고 있어서 뭐하게요.”

“뭐라고? 너 진짜 왜 이러니?”

“아버지 사진첩을 아버지가 가져가겠다는데 왜 못하게 해요? 괜한 고집 피우지 말고 그냥 줘 버려요. 억지 부리지 마시라구요.”

그는 더 심하게 말하고 싶은 걸 참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보다 더 지독한 말들이, 더 잔인한 말들이 그의 가슴 속에서 들끓고 있는데 고작 이런 유치한 일을 핑계 삼아 분풀이를 해야 한다는 게 그의 화를 더욱 돋구었다.

“그래? 그래, 그럼 니 마음대로 해라. 나도 그런 인간 더 이상 상종하고 싶지 않다. 그 인간 얘기는 꺼내고 싶지도 않아. 저기 작은 방 서랍장에 가서 뒤져 봐. 그리고 네 아버지가 들어간 사진은 한 개도 남김없이 싹 가져다 줘. 알겠니? 싹 가져가란 말이야.”

그녀는 노랗게 질린 얼굴로 날카롭게 외치더니 두 주먹을 움켜 쥔 채 쌩하니 부엌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는 의기양양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작은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호기롭게 서랍장 서랍을 벌컥 열어젖히고는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사진들이 서랍장 전체를 꽉 채우고 있었다. 두툼한 일곱 개의 사진첩뿐만 아니라 미처 정리 하지 못한 사진들이 가득 들어있는 커다란 종이봉투가 세 개나 됐다. 그는 그 중 한 봉투를 열어 보았다. 때로는 둘이서, 셋이서 혹은 넷이 다 함께 찍기도 한 가족 사진들이 한가득 쏟아져 나왔다. 그것들은 어제 갓 뽑은 사진처럼 선명했지만 현태의 눈에는 100년도 더 된 것처럼 낡아 보였다. 언제 이렇게 많은 사진들을 찍었던가. 아니, 그보다 대체 무엇을 남기고자 했을까. 현태는 아무도 보지 않은 채 서랍 속에 쑤셔 박아 놓았던 이 많은 사진들을 하나씩 살펴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깜깜하게 묻어버렸던 그 모든 기억들이 다시 흙탕물처럼 피어오르는 건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필이면 왜 사진첩 얘기를 꺼냈는지 후회가 됐지만 이제 와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장롱 위에 놓여 있던 검은색 여행용 마대 가방을 꺼내어 사진첩 7개와 남은 사진들을 모조리 쓸어 넣었다. 묵직해진 가방을 들고 방 밖으로 나오니 그의 어머니가 부엌 식탁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뜬 채 입술을 쑥 내밀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유난히 새까맣게 보였다.

“다 골랐니?”

“아뇨. 사진이 너무 많아요. 일단 제가 가지고 갔다가 정리해서 다시 가져 올게요.”

“지금 가려고?”

“네.”

“자고 가지 그러니.”

방금 서로 악을 쓰며 싸운 게 별거 아니라는 투로 그녀가 말했다.

“안 돼요. 가서 할 일이 있어요.”

“맨날 넌 무슨 할 일이 그렇게 많니. 언제나 저녁만 먹고 휭 하니 가버리니, 진짜 너무하는구나.”

그녀는 갈라진 목소리로 무슨 말인가 더 하려고 입을 달싹이다가 꾹 다물어버렸다. 그리고는 어깨를 움츠리며 얼핏 힘없는 노인같은 행동거지를 취했는데, 그것이 또 그만 그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죄송해요. 가봐야 돼요. 다음 주에 또 올게요.”

그는 매정하지도 그렇다고 다정하지도 않은 건조한 말투로 미숙에게 인사하고는 사진첩이 가득 들어있는 마대 가방과 코트를 챙겨서 현관으로 걸어갔다. 미숙은 아무 말도 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현태는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미숙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만 되풀이해서 떠올랐다. 모두가 알다시피 부모 자식 간의 문제는 전적으로 부모의 탓이기 마련이었다. 한 아이가, 기원도 이유도 알 수 없는 이 무구한 우주에게, 광활한 지평선 너머에게, 자기 자신이라는 현실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할 수 있겠는가. 물론 그는 자신이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처럼 어머니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서로 마지못한 사랑일 뿐이었다. 자기 자식을, 혹은 자기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는 건 너무나 가혹하고 또 곤란한 일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리는 최소한 그것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 가장 무책임하고 무의미하며 사실상 공공 쓰레기통이나 다름 없는 단어 속에 그것을 쑤셔넣어야 한다. 그제서야 우리는 간신이 서로를 (서로의 눈은 아닐지라도) 마주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자명하고도 엄중한 진실은, 만약 애초에 어머니와 자식이 서로를 고를 수 있었다면 그도 미숙도 서로를 선택하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현태는 사진첩이 들어있는 마대 가방을 거실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리고 자정이 되려면 아직 시간이 좀 남았는데도 노란 의자에 앉아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며칠 전 비 오던 날 밤 회색 얼룩무늬 고양이가 차에 치여 죽은 후부터 그는 더욱 이 일에 매달리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이 빌라에 살고 있고, 빌라 거실에 창문이 나있고, 그 창문이 아스팔트길을 향해 있고, 밤마다 고양이들이 그 길을 건너다니고, 그러다 차에 치여 죽어나가고 있는 이상 말이다. 그는 자신이 지나치게 현실적인 건지 아니면 지나치게 망상적인 건지 더 이상 구분할 수가 없었다. 단지 그로서도 어쩔 수 없을 뿐이었다.

그는 창밖을 더 자세히 보기위해 두 손으로 턱을 받히고 창문에 바짝 얼굴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입김 때문에 자꾸만 유리가 흐려지자 그는 아예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밤공기가 제법 따듯했다. 곧 완연한 봄이 오고 곧이어 더운 여름이 올 것이다. 현태는 고개를 들어 403동의 21층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방주인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건지 아니면 이른 잠자리에라도 든 건지 방의 불은 꺼져있었다. 현태는 21층을 향해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와 팔을 들썩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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