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일찌감치 출근한 현태가 막 믹스커피 한 잔을 마시려는 데 핸드폰 벨이 울렸다. 또 아침부터 미숙이 전화한 건가 싶어 있는대로 이맛살을 찌푸리며 핸드폰 액정을 보니 국제전화로 표시되어 있었다. 현태는 얼른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오빠, 나야.”
“어, 그래. 현지야.”
“잘 있었어?”
“나야 별 일 없지, 뭐. 너도 잘 있지? 공부는 어때?”
“그냥, 그래.”
“그래. 매제도 잘 있지?”
“잘 있긴 한데, 요즘 이것저것 걱정이 많아.”
“왜?”
“앞으로 먹고 살 일 때문이지, 뭐.”
“벌써부터 무슨 걱정이야. 박사학위 따고나면 좋은 기회들이 많이 생기겠지.”
“모르는 소리 마. 요즘 흔해빠진 게 박사야.”
흔해빠진 게 박사라는 말에 박사가 아닌 사람이 무슨 대답을 할 수 있겠는가. 현태가 웃음을 터트리자 그녀가 화제를 바꾸었다.
“엄마가 전화하셨어.”
“아, 그래?”
“엄마가 막 우시더라. 엄마하고 싸웠다며?”
“싸우기는. 그냥 좀 그랬어.”
“아빠가 사진첩 가져 오래?”
“어어.”
그는 현지에게까지 거짓말을 하는 게 좀 꺼림칙했지만 현지와 병규는 서로 연락을 끊은 지 오래였기 때문에 들킬 염려는 없었다.
“오빠가 아빠하고 연락하고 지내는 건 뭐라고 않겠는데, 근데 엄마한테는 좀 잘 해줘. 나도 없는데 엄마한텐 지금 오빠밖에 없잖아. 많이 섭섭해 하던데.”
“알았어.”
“그냥 건성으로 말하지 말고. 엄마도 많이 안됐잖아. 부탁해. 응?”
“알았다니까. 잘 할게.”
그는 어린아이처럼 고분고분 대답했다. 현태에게 있어서 현지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녀의 말이라면 그는 무엇이든 거부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예전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귀여워하면서도 5살 차이 나는 여동생은 늘 그의 관심 밖이었다. 서로 친한 듯하면서도 소홀했던 그들은 부모님이라는 완충제를 사이에 두고 원만하게 겉돌았다. 그런 그녀가 달라 보이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완충제가 무너져내리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아버지가 바람을 피우고 3년 뒤 집을 나갈 때 까지 모든 것을 남의 집 불구경 하듯 방관했던 그와는 달리 현지는 부모님의 이혼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녀는 부모님을 달래고, 협박도 해보고, 화도 내고, 또 울기도 많이 울었다. 심지어 현지는 아버지의 상대 여자를 직접 만나기도 해서 그를 기겁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그 정도로 비위가 강하다는 것이 놀라웠고,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 정도까지 감수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도 그 당시에는 이미 20대 중반이었고 결혼할 약혼자도 있었으니 부모님의 이혼에 충격을 받거나 방황할 시기는 아니었는데 말이다. 물론 부모님이 화목하게 산다면야 좋겠지만 이혼을 해야 한다면 또 그렇게 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는 게 현태의 생각이었다. 그 점에 대해 나중에 현지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엄마 아빠가 갈라서는 건 날 역겹게 해. 나까지 불량품이 된 것 같단 말이야.”
그는 그 말뜻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 뒤 그녀의 말이라면 꼼짝할 수 없게 되었다.
“오빠는 요즘 어떻게 지내?”
“늘 똑같아.”
“장사는 잘 돼? 이제 봄이니까 바쁘겠네?”
“아무래도 그렇지.”
“아직 만나는 여자는 없고?”
그는 순간 경애를 떠올렸다.
“없어.”
“오빠도 빨리 여자도 만나고, 결혼도 해야 될 텐데.”
“뭐어, 인연이 있으면 그렇게 되겠지.”
“저기, 오빠. 그럼 말이야, 여자 친구 생길 때 까지만 당분간 엄마하고 같이 살면 안 돼? 엄마는 내심 바라는 것 같던데. 같이 살면서 둘이 좀 더 친해지면 좋을 것 같아. 엄마가 집안일은 해줄 테니까 오빠도 편한 구석이 있을 거고.”
그녀가 갑자기 불쑥 꺼낸 얘기에 현태는 몹시 언짢아졌다. 현지가 병규와 미숙의 이혼을 막기 위해 누구보다 애쓴 건 사실이었지만, 정작 그들이 헤어지자 서둘러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떠나버렸던 것이다. 그토록 어머니를 위했던 현지가 정작 외로운 처지에 놓인 미숙을 두고 유학을 간다고 했을 때 현태는 내심 깜짝 놀랐었다. 어머니를 냉정한 오빠에게 맡겨두고 먼 나라로 떠난 그녀야말로 자신보다 훨씬 더 매몰차지 않은가? 그래놓고 이제 와서 홀가분하게 훈수나 두려 하다니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같이 살면 매일 싸움만 할 거야. 사이가 더 나빠졌으면 나빠졌지 좋아질 리 없어.”
“그래도 서로 노력하면…….”
“안된다니까. 너도 알잖아? 엄마하고 나는 안 맞아. 이렇게 안맞는 사람들이 어쩌다 부모자식으로 엮였는지 한심할 정도야.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그래서 더 열 받는 거야. 엄마하고 나는 평생 같은 집에서 살기는 글렀어.”
현태는 핏대를 올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차암, 그래, 알았어. 하긴 오빠 말이 맞는 지도 몰라. 나도 그냥 답답해서 해 본 얘기야.”
현지가 시무룩하게 인정했다.
“어쨌거나 오빠한테 빨리 좋은 여자가 나타났으면 좋겠다. 오빠도 그냥 앉아서 기다리지 말고 노력이라도 좀 해봐, 응?”
“그래, 알았어.”
그는 조금 전 매정하게 얘기한 게 마음에 걸려 이번에는 지나칠 정도로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럼 오빠, 이만 끊을게. 엄마 잘 부탁해.”
전화를 끊고 나자 현태는 맥이 탁 풀렸다. 지긋지긋하다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차라리 자신이 부모도, 형제도 없는 천애 고아였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도, 출신도, 근본도 없이, 그 누구에게도 연연하지 않고, 그 누군가의 연연하는 대상도 되지 않고, 마치 난파라도 당해 생전 처음 방문한 나라에 뚝 떨어진 사람처럼 호젓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대체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친가와 처가 양쪽 부모님을 모두 상대하면서 형제와 조카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 모든 것들을 다 어떻게 견디고 있는지, 왜 견디고 있는지, 감탄과 탄식이 절로 나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