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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증 (27)

by 곡도



“저 왔어요.”

현태는 전자키를 눌러 현관문을 열면서 나직이 외쳤다. 미숙은 무늬가 화려한 적황색 커튼과 라벤더 조화 화환으로 장식된 작은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미숙은 마르고 작은 몸에 둥그런 얼굴 위로 툭 튀어나온 이마 탓에 64세의 나이보다 더 들어 보였지만 눈빛만은 젊은 사람 만큼이나 또렷했다. 그녀는 물방울무늬의 헐렁한 감색 실내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똑같은 옷을 여러 벌 사서 돌려가며 입었기 때문에 집에서는 늘 같은 차림이었다. 만약 먼 훗날 현태가 엄마를 떠올린다면 언제 어디서의 기억이든지간에 미숙은 이 물방울무늬의 헐렁한 감색 실내원피스를 입고 나타날 것이다.

“왔니?”

“네.”

“저녁 먹을래? 김치찌개하고 네가 좋아하는 잡채도 있는데.”

“잡채요? 만드셨어요?”

“아니, 샀어. 마트에서. 지금 먹을래?”

“아뇨. 좀 있다가요.”

며칠 전 파마한 머리를 매만지며 금방이라도 부엌으로 달려갈 채비를 하던 미숙은 현태의 말에 어깨를 늘어뜨렸다. 두 사람은 나란히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봤다. 일요일 저녁 텔레비전에서는 코미디 프로가 방영되고 있었고 두 사람은 개그맨들의 억지 설정에 간간히 함께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텔레비전 시청은 지루하면서도 평화롭고, 그래서 현태가 어머니와 조금이나마 가족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과 어머니 사이가 얼마나 서먹한지 깨닫게 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현태 역시 어머니와의 소원한 관계가 마음 편치 않았다. 아버지와 자식 사이가 좋지 않은 경우는 주변에서도 흔했고 또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란 으레 그럴 만 했지만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어느 자식에게나 메스꺼운 일이었다.

두 사람은 1시간 정도 텔레비전을 본 뒤 저녁을 먹었다. 잡채가 조금 짰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미숙이 만든 음식도 아니었다. 두 사람은 아무 대화 없이 묵묵히 밥만 입안으로 떠 넣었다. 끄지 않고 켜놓은 거실의 텔레비전 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의 적막을 채워주었다. 현태는 이런 관계가 자신에게 보다 어머니에게 더 씁쓸한 일일 거라고 짐작했다. 혹시 자신이 딸이었다면 어머니와 더 잘 지낼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실제로 그의 여동생인 현지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에게 자상했다. 미숙의 기분이 울적할 때마다 곁에서 말상대를 해주던 사람도 현지였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혼하기로 결정했을 때도 현지는 어머니 편에 서서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그 모든 게 어머니에 대한 애정 때문인지, 아니면 자식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스스로 품위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 그런 얘기는 형제 사이일수록 더 할 수 없는 법이다 - 어쨌거나 무뚝뚝한 자신이 아닌 현지가 미국에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건 미숙에게는 참으로 안 된 일이라고 현태는 생각했다.

저녁식사를 끝낸 뒤 현태는 다시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시청했고 미숙은 부엌에서 설거지를 했다. 24평 아파트 안에는 텔레비전 소리와 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자리에 앉은 지 30분도 채 되지 않아 현태는 벽에 걸린 시계를 흘긋거렸다. 10분만 더 있다가 일어날 참이었다. 하지만 미숙이 사과와 귤이 담긴 접시를 가지고 나오는 바람에 그는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그래, 요새 가게는 어떠니.”

과도로 사과를 쪼개며 미숙이 물었다. 그녀가 늘 버릇처럼 하는 질문이었지만 현태에게는 가장 까다롭고 불편한 질문이었다. 어떤 대답도 미숙을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괜찮아요. 괜찮은 편이에요.”

늘 그렇듯 현태는 긍정적이지만 애매하게 대답했다.

“그래? 그거 다행이네.”

그녀는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었는데 그것이 또 그를 와싹 불쾌하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미숙은 그를 불쾌하게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들을 훤히 꾀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현태라고해서 그녀를 불쾌하게 만드는 방법을 몰라서 가만히 있는 건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그녀를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르게 할 자신이 있었다. 다만 이를 악물고 참아주고 있는 것인데, 그녀는 도무지 그럴 줄을 몰랐다.

두 사람은 과일을 씹으며 말없이 또 텔레비전을 바라보았다. 텔레비전에서는 주말 드라마가 막 시작하는 참이었다. 그것은 현태도 가끔 보는 의학 드라마로 냉정하지만 실력 하나만큼은 누구보다 출중한 40대 남자 의사가 주인공이었다. 사실 그 주인공은 모든 남자들의 이상향이라고 할 만 했다. 그가 가진 실력, 부와 명성, 권력도 대단했지만 무엇보다 부러운 건 그에게는 냉담함과 인색함마저 실력으로 인정받는 특권이 허락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좋은 사람이 돼야 한다는, 좋은 사람이 바로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부담과 자책만 덜어버려도, 우리의 삶은 얼마나 산뜻하고 쾌적할 것인가.

드라마는 주인공과 의대 동기들의 동창회 모임 장면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격조 있는 일식집에서 머리를 반듯하게 빗어 넘긴 교양 있는 의사들이 전문용어와 시사와 욕설로 버무려진 냉소적인 유머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며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은 과연 성공한 사람들의 표상이라 할만 했다. 현태는 모른 척 과일을 뒤적였지만 아니나 다를까 미숙은 어김없이 꼬투리를 잡았다.

“너희 법대생들은 동창회 안하니?”

“몰라요.”

“왜 몰라?”

“간적이 없어요.”

“아니, 왜? 아, 중퇴생은 동창회에도 나갈 수 없는 거냐?”

“몇 번 전화는 왔었어요.”

“하긴 걔네들은 지금 다 검사, 변호사가 됐지?”

“다 그런 건 아니에요.”

그는 진심으로 그녀에게 묻고 싶었다. 자신의 아들을 화나게 하는 말들만 골라서 하는 저의가 무엇이냐고 말이다. 그리고 그가 화내는 이유가 그 말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사람 때문이라는 걸 그녀는 과연 알고 있을까? 사람들은 메신저가 아닌 메시지를 보아야한다고들 말하지만, 아니다, 언제나 메신저가 메시지보다 중요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메신저야말로 바로 메시지 자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아야 한다.

“그럼 대학 동기 중에 지금까지 만나는 친구는 없니?”

“없어요.”

“그으래?”

그녀는 한숨인지 실소인지 모를 애매한 헛기침을 흘리며 다시 텔레비전으로 고개를 돌렸다. 현태는 독한 술이라도 벌컥 삼킨 것처럼 목과 눈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잔인함이 혀뿌리 끝에서부터 독소처럼 끓어올라 순식간에 머리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었다. 그는 반쯤 씹다만 사과를 접시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엄마, 아버지 사진첩 아직 집에 있죠?”

“뭐?”

“아버지 사진첩이요.”

“그건 왜?”

미숙은 불에 댄 듯 두 눈을 부릅뜨며 현태를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가져 오래요. 여기 계속 놔두는 것도 그렇다구요.”

이것은 거짓말이었다. 아버지인 병규는 그에게 그런 부탁을 한 적이 없었다. 현태는 병규와 한 달에 한 번 정도 전화로만 서로 간단히 안부를 나누고 있었다. 그 안부라는 것도 간신히 부자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형식적인 장치에 불과했다. 잘 있었니?, 잘 계셨어요?, 장사는 어떠니?, 괜찮아요, 그래 별일 없고?, 네, 별일 없으시죠? 그렇지, 뭐. 네에. 그럼 다음에 또 통화하자. 네, 들어가세요, 정도의 대화가 다였다. 가끔 병규가 미숙의 안부를 묻기도 했지만 그건 순전히 의무감 때문이었다. 전처인 미숙에 대한 의무감이 아니라 자기 자식의 어머니에 대한 의무감 말이다. 자신이 몰인정한 인간은 아니라는 걸 현태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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