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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증 (30)

by 곡도




그로부터 며칠 동안 현태는 입학식 꽃다발을 만들어 파느라 분주했다. 그 동안 수철은 한 번도 현태의 가게에 들르지 않았다. 핸드폰 가게도 비울 때가 많았고 출근했다가도 급한 일만 처리하고 서둘러 나가는 것 같았다. 현태는 수철의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궁금해서 애가 탔지만 붙잡고 물어보는 것도 내키지 않아서 눈치만 보고 있었다.

이제 봄이 시작되면서 꽃가게에는 활기가 넘쳤다. 그는 앵초, 수선화, 설란, 마가렛 등 가지각색의 봄꽃들이 피어있는 화분들을 가게 안팎에 늘어놓았다. 새롭게 단장한 쇼윈도는 개나리와 버들강아지 가지로 풍성하게 장식했다. 봄꽃들이 뿜어내는 달콤하고 독한 향기가 또다시 그의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들었는데, 동시에 그 향기에는 묘하게 노골적인 데가 있어서 그는 종종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 결국 현태는 날이 저물기도 전에 경애에게 만나자는 문자를 보냈다. 하지만 언제나 번개처럼 답장을 하던 경애에게서는 몇 시간이 지나도록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 다음 날, 그리고 다시 사흘 후에 또 문자를 보내 봐도 마찬가지였다. 하는 수 없이 현태는 처음으로 경애에게 전화까지 걸었지만 전화기는 아예 꺼져 있었다. 현태는 며칠 동안 전전긍긍하다가 결국 시들해지고 말았다.

오늘도 바쁜 하루를 보낸 그는 8시쯤 늦은 저녁을 먹었다. 대충 담아온 반찬이 영 시원치가 않아서 뜨거운 물에 밥을 말아 깨작이고 있는데 누군가 벌컥 문을 열어 재끼며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황급히 휴지로 손을 뻗던 현태는 들어온 사람이 수철이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야, 살아 있었냐.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들어?”

현태의 인사에 수철은 말없이 싱긋 웃더니 건너 편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현태는 수철이 너스레라도 떨며 큰 소리를 탕탕 칠거라고 짐작했지만 의외로 그는 차분했고 또 많이 피곤해 보였다.

“바빴어요. 이것저것 알아보느라.”

“그 암호화폐인가 뭔가 때문에? 정말 하기로 한 거야?”

“당연하죠. 바보가 아닌 이상 인생을 다 걸어야죠. 일생일대의 기회인데 놓칠 순 없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수철은 군인처럼 확고하고 다부져 보였다. 아니, 비장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전장에서는 그 어떤 변명이나 핑계도 통하지 않는다. 모든 건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엄중한 결과로, 말하자면 생존자의 숫자로 결정된다. 현태는 그런 수철에게 주눅 들지 않으려고, 아니 주눅 든 걸 들키지 않으려고 다분히 애를 써야 했다.

“커피라도 한 잔 할래?”

“아니에요. 됐어요. 저 금방 가봐야 돼요. 만날 사람이 있어서. 저기 그 보다는, 할 말이 있어서 왔는데…….”

“할 말? 뭔 데?”

“시간이 없으니까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형, 저 돈 좀 빌려줘요.”

“돈?”

“네. 아니, 그러니까 꿔준다고 생각하지 마시구요, 투자라고, 투자라고 생각하세요. 저한테 6개월만 맡겨 주시면 제가 원금의 두 배로 돌려드릴게.”

수철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현태는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재빨리 계산기를 돌리고 있었다. 5000만원이 6개월 뒤에는 1억원, 이자율이 100%라는 얘기였다.

“어때요? 나쁘지 않죠?”

“뭐, 그러니까 얼마나?”

“한 5억 정도요. 물론 더 하시면 좋구요.”

현태는 앉은 채로 펄쩍 뛰어 올랐다.

“야. 내가 그런 돈이 어디 있어?”

“가게랑 집이랑 이래저래 저당 잡혀서 대출 받고 주변에서 좀 빌리고 하면 그 정도는 끌어올 수 있잖아요. 그렇게 이자라고 해 봐야 얼마 되지도 않아요. 6개월 뒤에는 10억을 손에 쥐게 될 텐데 그깟 이자 몇 푼이 대수에요? 원금 갚고도 5억이 그냥 굴러 떨어지는 거라구요.”

현태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수철은 노골적으로 졸라대기 시작했다.

“형, 잘 생각해 봐요. 5억이에요, 5억. 여유자금 5억이면 사람이 뭐든 할 수 있는 돈이에요. 새로운 사업을 시작해도 되고, 집이나 땅을 사도되고, 뭐 이것저것 싫으면 당분간 슬슬 여행이나 다녀도 돼구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인생을 엄청나게 절약하는 거예요. 인생을 새로 사는 거나 마찬가지라니까요.”

인생을 새로 ‘산다’는 게, 살아나간다는 뜻인지 구입한다는 뜻인지 분명하지 않았지만 (결국 같은 얘기기도 해서) 어쨌든 구구절절 수철의 말이 옳다고 현태는 생각했다. 솔직히 한 평생 손바닥만 한 가게 구석에 처박혀 꽃이나 팔다가 죽게 된다고 생각하면 자다가도 원통한 일이었다. 그런데 단번에 5억 원이라니, 정말이지 사람의 혼을 쏙 빼놓을 만하지 않은가. 그는 곧바로 ‘자유’라는 - 평소에는 도무지 떠올릴 일이 없었던 그 휘황찬란한 - 단어를 떠올렸다. 무려 5억 원어치의 자유. 10년, 20년 어치의 자유. 그의 가슴이 힘차게 고동쳤다. 그 돈이 있으면 이 따위 가게는 곧바로 때려치울 수 있었다. 집에 틀어박히고 싶으면 원하는 만큼 틀어박힐 수 있었다. 떠나고 싶으면 어디로든 떠날 수 있었다. 그래, 원한다면 길 건너편 아파트에 월세나 전세로 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언제나 올려다보던 21층의 그 집도 가능할지 모른다. 21층 창문에서 내려다보는 거리의 풍경은 어떨까? 저 위에서는 자신의 빌라가 어떻게 보일까? 보이기는 할까? 고양이들은? 저 지긋지긋한 고양이들만 눈앞에서 얼쩡거리지 않아도 사는 게 한결 편해질텐데. 하지만 그는 별안간 눈앞이 깜깜해져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고층 난간 위에서 발끝을 내려다볼 때처럼 아찔한 현기증이 밀려왔다.

“글쎄. 나는 좀…….”

한참을 망설이던 현태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빚까지 지면서 하는 건 나한테는 좀 무리인 것 같아.”

“형, 이건 빚이 아니라니까. 생각을 좀 해보세요. 아주 간단한 계산이잖아. 자동판매기에 5억을 넣으면 10억이 자동으로 튀어 나오는 거라구요. 그렇게 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대체 고민할 게 뭐예요. 내가 딴 게 아니라 형도 돈 좀 벌게 해주려고 이러는 거야. 내가 형 좋아하는 거 알죠? 확실하지도 않은 데 이러겠냐구요. 그러니까 형은 아무 걱정 말고 나만 믿어요, 네?”

수철이 현태에게 바싹 다가서며 손을 뻗었다. 그러나 현태는 두려움과 모욕감을 느끼며 뒤로 움츠러들었다. 몇 분 전만 해도 뜨겁게 달아올랐던 그의 가슴은 이미 얼음장처럼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아아, 아냐. 역시 나는 좀 어려울 것 같아. 미안하다.”

더듬거리는 현태의 말에 수철의 얼굴이 뻣뻣해 졌다.

“그러니까 절 못 믿겠다는 거죠?”

“아니, 못 믿겠다는 게 아니라.”

“정 5억이 부담되면 3억 정도라도 해봐요.”

“글쎄. 아냐. 안되겠어. 난 안될 것 같아.”

턱을 모로 비틀며 고개를 숙이는 현태를 수철은 냉담하게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노골적인 노기와 경멸이 서려있었다.

“그래? 정 그렇다면 할 수 없죠, 뭐. 그러세요. 형만 손해니까. 억지로 시킬 수도 없는 거고. 기회를 턱 밑까지 물어다 줘도 물지 않는 걸 내가 어쩌겠어요. 뭐, 형은 어쩔 수 없이 이러고 살 팔자인가 보네. 어쨌거나 나중에 후회나 하지 마요. 쉽지는 않겠지만.”

수철은 언짢음을 숨기지 않고 시퍼렇게 빈정거리더니 이만 가봐야겠다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현태는 수철의 가시 돋친 말에 불쾌하기보다는 되려 자신이 정말 큰 기회를 놓친 건 아닌가 싶어 덜컥 겁이났다. 단 하루라도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해야 하나, 잠깐 앉아 보라고 수철을 다시 붙잡아야 하나, 어물거리는 사이 수철은 인사도 없이 휑하니 가게를 나가버렸다.

현태는 자리에 앉아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책상 한켠에 밀어놓았던 도시락을 발견하고 다시 수저를 들었다. 그러나 차가운 물에 퉁퉁 불어버린 밥을 한 두 숟가락 입에 떠 넣고는 이내 도시락 뚜껑을 덮어 버리고 망연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는 완전히 얼이 빠져서 잠시 후 3만 원짜리 꽃다발을 2만 원에 팔아버리는 실수를 했을 정도였다.

‘뭐, 형은 어쩔 수 없이 이러고 살 팔자인가 보네. 어쨌거나 나중에 후회나 하지 마요. 쉽지는 않겠지만.’

수철의 목소리가 안개 속으로 파고드는 바람처럼 그의 머릿속을 뿌옇게 휘저었다. 현태는 목이 죄어 오는 것 같아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혔다. 어쩌면 그는 오늘 일을 평생, 살아있는 매 순간마다, 뼈아프게 자책하게 될지도 모른다. 시간이 갈수록 더 분해져서 발을 동동 구르며 머리를 쥐어뜯게 될지도 모른다. 자신이 놓쳐버린 돈, 자신이 놓쳐버린 시간, 자신이 놓쳐버린 자유. 바로 여기 턱 밑까지 왔었는데.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데도 그는 순식간에 바닥까지 곤두박질친 기분이었다. 세상이 모두 솟구쳐 오르는 데 혼자만 제자리에 멍하니 있다면 그것이 바로 추락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도 나름 부지런히 기어오르고 있는데도 까마득히 뒤로 쳐지기만 하니 실망스럽고 고단한 것이다. 이대로 10년 후에는 지금보다 10배는 더 사는 게 지긋지긋할까? 그래서야 어떻게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단 말인가? 현태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한참동안 그것을 두 손으로 주물럭거리다가 마침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경애의 핸드폰은 여전히 꺼져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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