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역시 나이 많은 여자는 싫어?”
현태는 그만 크게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싫으냐고? 솔직히 말하면 온 몸에 두드러기가 날만큼 싫었다. 자신보다 10살이나 많은, 그것도 사십을 훌쩍 넘긴 술집 작부라니, 끔찍한 일이 아닌가.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저 몸을 타고 넘었을까 저절로 상상이 되는 것이다.
“그래도 아직 쓸 만해. 애를 낳아 본 적이 없으니까, 애 둘 셋 있는 여자들보다는 훨씬 나을 걸.”
적당한 말을 찾던 현태는 그냥 바보처럼 웃어버렸다. 마담은 그런 현태의 얼굴을 슬쩍 깔보더니 젖은 휴지에 꽁초를 비벼 끄며 소탈하게 말했다.
“혹시 생각 있으면 연락해. 난 입이 무거우니까 딴 걱정은 말고, 응?”
“네, 그럼.”
현태는 그 틈을 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춤에서 지갑을 꺼내자 마담이 술값은 됐다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재빨리 옆에 있던 영수증 용지 한 장을 찢어 그 뒤에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갈겨쓰고는 그것을 현태의 지갑에 꽂아 넣었다. 현태는 말없이 지갑을 도로 주머니에 넣은 후 - 지나치게 정중하게 - 꾸벅 인사를 하고 주점을 빠져 나왔다. 주점을 나온 후에도 그는 웃음 밖에 나오지 않았다. 차 속에서 한바탕 웃고 나니 더더욱 경애 생각이 간절해졌다. 현태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기는 여전히 꺼져있었다.
다음 날, 현태는 아침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 팔 다리가 축축 처지고 목소리가 갈라졌다. 아무래도 감기인 듯싶었다. 어젯밤 경애 때문에 몇 번이나 분통을 터트린 게 원인인지도 몰랐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다가갔다. 어느새 푸른 잎이 빽빽해진 가로수가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그는 나뭇가지 사이로 고개를 숙이고 주의 깊게 거리를 살펴보았다. 거리는 아무 일 없이 깨끗했다. 옅은 구름이 빠르게 지나가는 건조하고 화창한 날이었다. 가볍게 심호흡을 한 뒤 그는 서둘러 욕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4월의 꽃집에는 할 일이 많았다. 오후에 예약되어 있는 꽃바구니도 두 개나 됐다. 몸이 좀 불편하다고 꾸물거릴 수는 없었다.
1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가게에 도착한 현태는 가게 문을 열자마자 커피 한잔 마실 틈도 없이 앞치마를 몸에 걸치고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나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가위를 몇 번이나 놓쳤고, 발이 꼬여 중심을 잃는 바람에 결국 값비싼 테라화분 하나를 깨먹었다. 오후가 되면 나아지겠지 했지만 상태는 더욱 나빠져서 급기야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일찍 집에 들어가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소파에 앉아 팔을 주무르고 있는데 꽃꽂이 강사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녀는 처음 만났던 날 이후부터 매 주 목요일마다 그의 가게에서 꽃을 가져가고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았다.
“오셨어요?”
“네, 안녕하세요?”
그녀는 따듯한 봄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칙칙한 갈색 치마에 검은색 니트를 입고 있었지만 표정만은 환하게 밝았다.
“그 때 부탁드렸던 꽃 들어왔나요?”
“예, 그럼요. 따로 포장해놓았으니까 가져가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는 미리 손질해 두었던 조팝나무 가지와 카네이션, 몬스테라 등의 꾸러미를 냉장고에서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와, 하얀 조팝꽃이 너무 예쁘네요. 향기도 좋구요. 아, 그리고 저 이제 수강생이 2명 더 늘었어요. 다음 주 부터는 다섯 사람이 쓸 수 있을 만큼 넉넉하게 주문해 주세요.”
“그래요? 잘됐네요.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거 하나 받으세요. 좀 민망하긴 한데, 수강생도 늘고 해서 명함 한 상자 뽑았어요. 아직 명함까지는 필요 없지만, 그래도 모양새는 좀 갖추려구요. 기분 문제니까요.”
그녀는 뭐가 우스운지 깔깔거리며 그에게 명함을 건넸다. 그는 그녀의 손에서 명함을 받아들면서 그녀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화장을 옅게 한 탓에 코 위로 얼룩얼룩한 주근깨가 비쳐서 커다란 코가 더욱 강조되었다. 코가 조금만 작았다면 좋았을 텐데. 그는 속으로 싱거운 생각을 하며 분홍색 명함에서 ‘강선영’이라는 이름을 확인했다.
“명함이 예쁘게 나왔네요. 앞으로 번창하실 겁니다.”
“감사합니다. 혹시 손님들 중에 꽃꽂이 배우고 싶다는 분이 있으면 그 번호로 연락 주세요. 아니, 아예 다음에 명함을 몇 장 더 가져다 드릴 테니까 손님이 원하시면 전해주시겠어요? 네, 감사해요. 그럼 다음 주에 뵐게요.”
그녀는 품에 하나 가득 꽃을 안고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가게를 빠져 나갔다. 그는 한 번 더 명함을 들여다보았다. 촌스러움을 간신히 면한, 얇고 저렴한 명함이었다. 자신의 주인을 닮아 특색 없이 둔감하고 밋밋했다. 그나저나 나이는 몇 살 정도 됐을까? 서른은 넘은 것 같았지만 애매한 구석이 있는 인상이라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대충 서른 둘 셋 정도는 된 듯 했다.
그 때 여자 손님 둘이 왁자하게 웃으며 가게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그는 얼른 명함을 앞치마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한명은 현태 또래의 여자로 와인색의 화려한 블라우스를 입었고, 다른 여자는 스무 살 중반쯤으로 보이는 노란색 원피스의 아가씨였다. 와인색 블라우스의 여자는 보기 드문 미인이었는데 향수를 얼마나 뿌려댔던지 꽃집의 꽃향기를 단번에 눌러버릴 정도였다. 그들은 현태는 안중에도 없이 연방 자기들끼리 소곤거리며 꽃에 대해 품평을 늘어놓더니 한참 후에야 분홍색 튤립 한 다발과 하얀색 카랑코에 화분을 하나씩 사들고 돌아갔다. 그녀들이 사라진 후에도 꽃집 안에는 한동안 그녀들의 웃음소리와 향수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저 정도 미인을 만날 수 있다면 독한 향수 냄새도 참고 달려들 남자들이 수두룩할 거라고 현태는 생각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