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수철은 출근하지 않았다. 분명 돈을 구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을 거라고 현태는 짐작했다. 내심 자신에게 한 번 더 물으러 오지 않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렸지만 수철은 하루가 다 지나도록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조금 실망스럽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더욱 경애 생각이 간절해졌다. 그녀의 동그랗고 가녀린 어깨와 굽굽한 살냄새가 자꾸만 떠올랐다. 정신을 차려보면 오직 그 생각에만 골몰해 있었다. 하지만 그녀와는 여전히 통화가 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일찌감치 일을 마치고 '사장님과 비서'로 차를 몰았다.
하지만 주점 앞에 도착해서도 현태는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한참을 문 밖에서 서성였다. 어설프게 행동했다간 눈치 빠른 마담이 현태와 경애의 관계를 알아챌 수도 있었다. 알려진다고 해서 무슨 큰일이 나는 건 아니었지만 이제 와서 들통 나듯이 까발려지는 건 역시나 피하고 싶었다. 그 때 별안간 오마담이 가게에서 벌컥 뛰어나오는 바람에 현태는 질겁하며 뒤로 돌아섰다. 하지만 미처 한 발을 떼기도 전에 마담은 현태를 알아보았다.
“어머, 현태씨 아냐? 오랜만이네. 그동안 너무 안와서 우리를 완전히 잊어버린 줄 알았지. 근데 혼자 왔어? 수철씨는?”
광택이 흐르는 자주색 원피스 위에 회색 운동복 카디건을 걸친 그녀의 손에는 묵직한 음식물 쓰레기봉투가 들려있었다.
“아, 네, 아뇨. 오늘은 그냥 지나가는 길에…….”
그는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었다. 이렇게 된 이상 급한 일이 있는 것처럼 서둘러 지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가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마담은 덥석 그의 팔을 잡았다.
“자기, 경애 만나러 온 거지?”
그녀는 말끝에 ‘치’ 하고 새된 웃음을 흘렸다. 바깥에서 본 마담의 화장은 훨씬 더 짙었다.
“괜찮아. 다 알고 있으니까. 경애한테 연락이 안돼서 온 거 아냐?”
현태는 더 이상 어쩌지 못하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들어가. 맥주 한잔 해.”
마담은 현태를 문 안으로 밀어 넣고는 자신은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다시 밖으로 나갔다. 가게 안은 텅 비어있었고 경애는 보이지 않았다. 아직 출근을 하지 않은 모양이라고 짐작하며 현태는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여기서 경애가 올 때까지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경애에게 연락 달라는 말을 전해달라고 마담에게 부탁한 후 곧바로 나갈 작정이었다. 그나저나 마담은 이 일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그가 손바닥으로 마른 이마를 연신 문지르고 있을 때 마담이 손을 털며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 날씨 참 좋네. 이제 완전히 초여름이야. 꽃집도 요새 장사 잘 되지? 나도 화분 좀 사다가 가게에 놓고 그래야겠어. 손이 덜 타는 화초는 어떤 게 있어?”
그녀는 현태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부엌으로 들어가더니 맥주 한 병과 간단한 마른안주를 챙겨들고 다시 나왔다. 현태는 사양했지만 돈 안 받을 테니 한 잔만 하고 가라는 말에 주저앉고 말았다.
“경애가 연락이 안되지? 전화기도 꺼져있고.”
마담이 유리잔에 차가운 맥주를 따라주며 말했다.
“네.”
그는 순순히 대답했다. 마담은 가늘게 실눈을 뜨고는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다. 그리고 현태가 맥주로 입술을 축이길 기다렸다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어쩌나. 경애는 이제 여기 없는데.”
“네?”
“걔 남자랑 날랐어.”
현태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지만 곧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흔한 일이야. 술집 년이 남자랑 눈 맞아서 도망가는 거. 그런 거 몇 번 씩 안 해보는 술집 년도 있나. 하지만 그런 년이 제대로 된 놈 만나기는 하늘의 별따기지. 내가 그렇게 알아듣게 얘기해줬는데도, 뭐, 눈이 뒤집히면 귓구멍까지 꽉 막히기 마련이지. 그나저나 그 기집애도 참 싸가지 없다. 가기 전에 현태씨한테 문자라도 한 통 줄 것이지. 그래도 2년 가까이 신세를 졌는데 말이야. 솔직히 기분 좀 더럽지? 더러울 거야. 그래도 현태씨가 이해해야지 어쩌겠어. 원래 내빼는 애들 맘이 그래. 뒤도 돌아보고 싶지 않거든. 사실 무슨 미련이 있으려구. 그나저나 나야말로 큰일이네. 사람을 못 구해서 아주 죽을 맛이야. 새 아가씨가 들어오려면 아직 2주는 더 있어야 되는데 말이야.”
그리곤 그녀는 쌍욕을 몇 마디 중얼거렸다. 현태는 술잔에 남아있던 맥주를 한 번에 비웠다.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빈 술잔을 탁자에 내려놓자마자 재빨리 마담이 술을 채워주었기 때문에 현태는 일어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마담은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담배연기를 힘차게 머리 위로 뿜어내며 현태가 다시 술잔을 비우는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어디 경애 말고 다른 아가씨는 있어?”
찌들은 담배냄새가 그의 얼굴로 확 끼쳐와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뇨.”
“쯧쯧, 그래? 좀 곤란하게 됐네.”
마담은 빨간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리며 나팔 모양으로 길게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근데, 경애한테 15만원이나 줬었다면서?”
현태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출입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애초에 경애가 비밀을 지킬 거라고 믿었던 게 잘못이었다.
“그럼 말이야, 그럼, 나는 어때? 난 10만원에 해줄 수 있는데.”
담배를 빨며 마담이 불쑥 말했다. 현태는 피식 웃으며 마담을 쳐다봤다. 그러나 빙글빙글 웃고 있기는 해도 장난기 없는 마담의 눈과 마주치자 현태는 입 꼬리를 내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