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라 그런지 꽃집에는 여자 손님들이 대부분이었고 하루 종일 이런 저런 여자들을 상대하다 보니 현태는 잠자리 생각이 더욱 절실했다. 사실 그는 경애가 남자와 도망갔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정기적으로 외간 남자들과 몸을 섞으면서 그 와중에 다른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보다는 그녀가 아직도 남자를, 그리고 사랑을 믿고 있다는 게 더 의외였다. 닳고 닳았지만 그래도 아직 완전히 닳아 없어지지 않은 순정 한 조각이 남아있었던 걸까. 급기야 그마저 다 닳아 없어지고 나면 결국 오마담처럼 되는 걸까.
그는 문득 오마담이 했던 제안을 떠올렸다. 그것은 여전히 그로 하여금 괴팍하고 냉소적인 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상상만 해도 속이 뒤집히고, 한마디로 그녀를 상대로 도무지 설 것 같지가 않았다. 하지만 어찌된 셈인지 그는 자꾸만 오마담을 떠올리고 있었다. 한 번 의식하게 되니 도무지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던 오마담의 갸름한 두 눈, 노골적으로 비웃는 입매, 그녀의 얼굴 오른편으로 드리우던 주황색 전등빛, 자주빛 입술 사이에서 풍기던 매콤한 담배 냄새까지. 그 모든 것들이 생생한 기체들의 화학반응처럼 교묘하고 치밀하게 그의 폐 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그는 마담이 지갑에 넣어주었던 전화번호 쪽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도무지 설 것 같지 않다’던 거부감이 가신 것은 아니었지만 재미삼아 한 번 시도나 해볼까 하는 고약한 핑계거리가 점점 그의 기운을 북돋았다.
그렇게 현태가 오마담을 두고 고민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수철은 정신없이 바빠 보였다. 핸드폰 가게는 아예 내팽개쳤는지 비어있기 일쑤였고 어쩌다가 가게에 들를 때에도 핸드폰을 들여다보면서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황급히 지나가곤 했다. 수철의 얼굴은 날이 갈수록 거칠어져서 예전의 멀끔하던 모습은 찾을 길이 없었다. 더 이상 양복을 차려 입지도 않았고 며칠이나 면도를 하지 않아 거뭇한 수염이 턱을 덮고 있는 것도 예사였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형형하게 빛나는 수철의 눈빛은 잠깐씩이나마 현태의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그것은 수선스럽고 성가신 일상의 그림자 너머를 꿰뚫어 보는 선명하고 강직한 예언자의 눈빛이었다. 현태는 수철이 거머쥐게 될 엄청난 돈만큼이나 수철의 의지와 결단이 부러웠다. 지례 겁에 질려 5억이라는 큰돈도 쉽게 포기해 버린 자신에 비하면 모든 것을 걸고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수철의 인생이 훨씬 마땅하고 충만해 보였다. 자신은 고작해야 오마담과 섹스를 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추잡한 일을 가지고 며칠씩이나 궁리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일주일을 보낸 뒤, 퇴근 시간을 20분 정도 남겨두고 현태는 지갑에서 오마담의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 또 한 번 - 꺼내들었다. 그리고 엄지손톱 끝으로 푸른색 쪽지 귀퉁이를 꾹꾹 눌러가며 묵묵히 숫자들을 노려보았다. 일주일 내내 얼마나 여러 번 이것을 꺼내보았는지 모른다. 이미 전화번호는 훤히 외우고 있는데도 그는 그것을 꺼내고 만지고 넣고 또 꺼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치욕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성욕이란 인간을 모욕하기 위해 여기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모욕을 모욕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스스로에게 궤변을 늘어놓으며 쪽지를 구겨대던 그는 결국 오마담에게 문자를 보냈다.
‘지금 만날수 있을까요?’
보낸 지 채 30초도 되지 않아 곧바로 답장이 왔다. 이토록 빨리 답장이 왔다는 사실에 그는 내용을 확인하기도 전에 가슴이 뛰었다. 실제로 어떤 사이이든, 설사 상대방이 거래처 사장이나 가전 제품 서비스 센터 직원, 119 신고 상담사라고 해도, 우리는 문자의 답장이 오는 데 걸리는 시간을 관계의 척도로 삼아야 할 것이다.
'삼거리에 있는 베르사유 모텔에서 만나’
경애와 가던 모텔과는 다른 곳이라는 사실에 현태는 일단 안도했다. 그는 곧바로 가게 문을 닫고 차에 올라 모텔로 향했다. 야자수 모양의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모텔 앞에 도착해 보니 그 사이 또 한통의 문자가 와있었다.
‘209호’
경애가 이것까지 얘기했나 싶어 현태는 쓴 입맛을 다셨지만 어쨌거나 귀찮은 과정을 생략할 수 있어 좋았다.
그는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겨 2층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막상 209호 문 앞에 서자 현태는 망설여졌다. 목덜미에서 열이 오르고 속도 쓰렸다. 일주일간 머리를 싸매고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이 순식간에 모래거품처럼 녹아버리고 또 다시 처음부터 하나하나 따져봐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래봐야 무슨 소용인가. 허공에서 놓아버린 공은 결국 바닥에 닿기 마련이다. 설사 그걸 중간에 낚아챈다 해도 손에서 공을 놓으면 다시 바닥으로 떨어져내릴 것이다.
그는 가만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금속처럼 광택이 나는 은색 란제리를 입은 오마담이 침대 위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저 직업 종사자들에게는 손님을 기다릴 때 란제리 차림으로 맥주를 마시면서 텔레비전을 보라는 수칙이라도 있는 건가, 현태는 저절로 싱거운 웃음이 나왔다.
“아, 왔어?”
란제리 밑으로 들어난 마담의 길쭉한 다리를 현태는 흘긋 훔쳐보았다.
“씻어야지? 나는 올 때 씻고 왔으니까 얼른 들어가서 씻고 나와.”
“예.”
그는 화장실에 가도 된다고 허락 받은 아이처럼 재빨리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기계적으로 하나씩 옷을 벗다가 그대로 손을 멈추고 거울 속의 자신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험상궂고 뒤숭숭한 얼굴이었다. 그는 경애와의 첫날은 어땠는지 떠올려 보았다. ‘사장님과 비서’에서 술을 마시고 수철과 헤어진 뒤 택시를 잡기 위해 걸어가는 자신을 뒤쫓아온 경애와 함께 곧바로 모텔로 향했던 것이 처음 시작이었다. 그 날 두 사람은 거리낌이 없었고 의기양양 했으며 잠자리 궁합도 제법 잘 맞았다. 심지어 그는 매매춘에 불과한 이 즉흥적이 섹스가 제법 낭만적이라는 생각까지 했었다. 하지만 상대가 오마담이라니, 막상 그녀의 벗은 몸을 보면 할 마음이 싹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그녀도 이쪽으로는 베테랑인데 설마 어떻게든 되겠지 하면서도, 사람은 의외로 까다로운 구석이 있어서 한 번 안되는 일은 끝까지 안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어쩌겠는가. 혹시 정말 안 되면 실실 웃어넘기면서 손에 돈을 쥐어주고는 집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그래도 자신보다는 그녀가 더 무안할 거라는 사실이 그에게는 다소 위로가 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