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증 (47)

by 곡도



그 뒤 두 사람의 관계는 눈에 띄게 가까워졌다. 선영은 가끔씩 현태에게 직접 만든 음식을 가져다주었고 특별히 볼일이 없을 때도 가게에 들러 커피를 마시고 가곤 했다. 언제 부터인가 현태는 그녀를 기다리게 되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누구라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다음 주면 8월이 끝나고 9월의 시작이었다. 더위가 가시면 사람들도 다시 꽃을 찾기 시작할 것이다. 그는 출근하자마자 화분과 꽃을 새로 주문할 참이었다. 그런데 출근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그는 소파에 쭈그리고 앉아 끙끙 앓고 있었다. 자꾸 발이 헛도는가 싶더니 급기야 온 몸이 꼿꼿하게 굳어버려 꼼짝할 수가 없었다. 몸을 뒤틀어 보았지만 열 손가락과 목만 배배 꼬일 뿐이었다. 그동안 종종 이런 증상이 있기는 했어도 이렇게 심한 건 처음이었다. 온 몸이 무감각하다는 사실에 현태는 기겁했다. 자신의 몸이 낯설고 음흉한 타인인 것처럼, 그리고 그것을 너무 늦게 깨닫기라도 한 것처럼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3시간 가까이 소파에 늘어져 있던 현태는 몸 상태가 조금씩 나아지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다리는 아직 불편했지만 나머지 부분은 용케 움직일 수 있었다. 그는 몸을 일으켜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에어컨이 켜져 있는데도 이마와 뒷목으로 땀이 흥건하게 흘러내렸다. 그는 손바닥으로 대충 땀을 훔치고는 그대로 목을 늘어뜨리고 눈을 감았다. 금방이라도 물과 기름처럼 다른 방향으로 흘러내릴 것 같은 몸과 마음을 다시 끌어 모으기 위해 온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오늘은 손님이 없어서 다행이었지만 손님이 있을 때 이런 일이 생긴다면 이만저만 낭패가 아니었다. 조만간 병원을 가보긴 가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슬며시 팔과 다리를 움직여 보았다. 아직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기는 해도 한결 편해졌다. 아까의 마비가 착각이었던 것처럼 감쪽같았다.

정신을 차리고 나자 그는 커피 생각이 간절해졌다. 진한 커피 한 잔을 들이켜서 따듯한 카페인을 듬뿍 흡수하고 나면 몸이 한결 가뿐해 질 것 같았다. 그는 다리를 절며 탁자로 걸어가 커피포트에 물을 들여 놓았다. 그리고 낱개 포장되어 있는 인스턴트커피를 막 찢으려다 말고 우뚝 손을 멈추었다. 요즘 들어 자신이 커피를 지나치게 많이 마시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돌이켜 보니 하루에 적어도 대여섯 잔씩의 커피를 마시고 있었고 때로는 10잔에 달할 때도 있었다. 어쩌면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셔서 오늘 같은 일이 벌어진 게 아닐까.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커피를 많이 마시기 시작했을까. 예전에는 하루에 한 잔 정도만 마시던 것을 이제는 습관처럼, 아니 의무처럼 틈만 나면 들이켜고 있었다. 늘 커피를 입에 달고 사는 어머니가 떠올라 현태는 더욱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는 커피 대신 녹차 티백을 2개 꺼내 종이컵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진하게 우러난 녹차 한 모금을 입에 머금자마자 오래된 기름처럼 쓰고 느끼한 맛에 그만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삼키고 나서도 잇몸에 온통 이끼라도 낀 것처럼 껄끄러웠다. 그는 달고 부드러운 커피 생각이 더더욱 간절해졌다. 만약 커피가 몸에 좋기만 하다면 하루에 열 잔이고 스무 잔이고 마셔댈 수 있을 텐데. 왜 때때로 좋다고 느끼는 것이 실은 나쁜 것이고 나쁘다고 느끼는 것이 실은 좋은 것일까? 왜 우리의 감각은 우리 자신을 위선적으로 기망하는 것일까? 왜 자제하고 견뎌야만 하는 욕구가 버젓이 존재하는 것일까? 어쩌면 나의 육체란 원래부터 이곳이 아닌 어떤 곳, 낯선 어딘가에 멀리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곳에서 무언가 혼자만의 꿍꿍이에 몰두해 있을 것이다.

그 때 핸드폰 벨소리에 그는 정신을 차렸다. 앞치마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보니 아버지 병규였다.

“여보세요.”

“나다.”

“네, 아버지.”

“어디냐?”

“가게에요.”

“휴가는 안 갔니?”

“네, 안 갔어요.”

“그래?”

병규가 우물거리는 게 전화기 너머로 느껴졌다. 아무래도 무슨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분명 귀찮은 일일 거라는 예감에 현태는 전화기를 고쳐 들었다. 머뭇거리던 병규가 입을 열었다.

“저기, 내가 지금 서울인데.”

“네?”

“내가 지금 서울에 올라왔는데, 좀 만날 수 있겠니?”

“지금요? 저, 지금은 영업시간이라, 저녁쯤에나 가능한데요. 혹시 이따가 가게로 오실래요?”

“아니, 가게는 좀 그렇고……. 그럼 내가 너희 집에 가있을까?”

분명 무언가 단단히 잘못된 거라고 현태는 턱을 꽉 물었다. 아버지가 집을 나간 후로 만나는 것도 처음인데, 그것도 자신의 집으로 찾아오겠다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안 된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그는 집 주소와 현관문 비밀번호를 알려주었다.

“그래, 알았다. 그럼 언제쯤 집에 오니?”

“8시까지 들어갈게요.”

“그래. 이따 보자.”

현태는 전화를 끊고 다시 자리에 앉아 녹차를 마셨다. 하지만 이미 식어버린 녹차에서는 비린내까지 진동해서 도저히 삼킬 수가 없었다. 현태는 녹차를 세면대에 쏟아 버리고는 인스턴트커피 두 봉지를 탈탈 털어넣어 진하게 탄 커피를 들고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쌉쌀하고 달콤한 커피향이 사방으로 퍼지면서 주변 공기까지 부드럽게 정화시켜 주는 것 같았다. 그는 약속된 만족을 만끽하기 위해 만족스럽게 커피 한 모금을 입안에 머금었다. 그제야 온몸의 감각이 온전하게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는 다시 육체와 화해했다.

그는 커피를 홀짝이면서 4년 만에 만나는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떠올려 보았다. 그러나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건 그의 기억력 부족이나 몇 년 동안 소원했던 관계 탓만은 아니었다. 병규의 성격 자체가 누렇게 뜬 종이처럼 딱히 이거다라고 말할 만한 특징이 없었다. 외도를 할 때 까지는 집안에 이렇다 할 문제를 일으킨 적도 없었고, 자식들과 딱히 좋은 관계도 그렇다고 나쁜 관계도 아니었다. 현태에게 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속을 잘 알 수 없는 사람, 거기다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 호기심이나 기대조차 일으키지 않는 사람이었다. 만약 병규가 외도마저 저지르지 않았다면 현태는 지금까지도 아버지에 대해 매우 희미한 인상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병규의 외도와, 외도 뒤의 요란한 소란들, 가출을 통해서 현태는 병규라는 사람을 그래도 조금이나마 분별하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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