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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Aug 17. 2024

여유로운 날들이여 이제는 안녕!

D-3,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까지

3일 남았다.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여유로운 주말이야'

'이제 여유 있게 먹는 마지막 돼지막창이야'

'이렇게 둘이서 오는 마지막 바다야'

'이렇게 잠을 잘 수 있는 날이 4일 남았어'

'늘어져서 드라마를 정주행 하는 마지막 시간이야'


어디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태어날 너를 기다리며 한 달 내내 너의 유전자제공자(?)와 밈처럼 나눈 대화다.


이제 다신 없을 여유로운 날을 3일 앞둔 지금,

너를 기다리며 있었던 일들과 들었던 생각들을 써보려고 한다.(오늘이 아니면 할 수 없어질 것이니)



그 시절의 일들


그 시절이라 하니 굉장히 오래된 것 같다. 1년도 채 안 되는 기간이다. 280일 정도


#1. 만남과 이별

11월, 너의 존재를 알게 되고 들었던 두 가지 생각

'힘든 시기에 기쁜 소식이 되려나' vs '힘든 시기에 이게 맞나'


다행히도 힘든 시기에 내 안에 들어온 너는 기쁨이 되어 여러 눈물을 희석시켜 주었다.


3월, 오랫동안 아팠던 두 존재가 고통 없는 세계로 떠났다.

두 존재의 다른 세계로의 여정을 위해 이별을 준비하고 이별하고 또 이별을 마무리하면서 너에게 무리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이런 생각에 너와 이별한 존재들과 가족과 다른 사람들에게 죄책감도 들었다. 마음이 자꾸 오른쪽 왼쪽으로 왔다 갔다 하는 시간들이었다.  

 

#2. 그런데

너는 효자인지 내 몸과 너의 몸에 별다른 이벤트가 없었다.


입덧과 경부길이 이슈 정도.

입덧약은 한 알에 2000원이었고 20일 치를 처방받았다. 비급여 알약. 4만 원어치.

난 입덧약을 무려 2000원어치만 먹었다. 고로 그리 심하지 않았다는 말(그리고 이제 입덧약은 올해 6월부터 보험적용이 된다)


경부길이가 23주 이후부터 길다가 짧다가 오락가락했으나 누워있을 순 없었다. 울면서 운전을 하며 돌아다녀야 했다. 네가 빨리 나오면 어쩌나 걱정하다가 너의 강인함을 믿다가 담당 의사 선생님이 이 지역 최고 명의라는 것을 떠올리다가 조산에 대해 생각하다가 조산을 한 과거의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다가

홉스는 홉스 엄마가 무적함대 침공소식에 놀라서 홉스를 7개월 만에 낳아버려서 '나는 공포와 쌍둥이로 태어났다'라고 말했던 말까지 소환하다가(갑분홉? 그렇다. 성악설의 그 홉스이다)

이렇게 끝까지 품게 되었다. 효자야 고맙다. 끝까지 효자 해달라.


#3. 글쓰기

4월부터는 잉여잉여해졌다. 무엇을 해야 의미가 있을까 생각했다.

그냥 재밌는 걸 해봤다. 글쓰기. 바다를 그리워하며 작년에 갔던 시파단 리브어보드의 후기를 썼는데 내가 했던 모든 활동 중에 가장 두근거렸다.

그래서 6월, 어떻게 저떻게 연이 닿아, 유식하게 표현하면 어떤 원인과 조건이 만나.

'인연'이 되어. 브런치 작가를 해보고 무려 10개의 글을 썼다. 호호.


#4. 소중한 사람들


고맙게도 좋은 사람들이 걱정하고 응원하고 격려해 줘서 이 시기를 버틸 수 있었다.


가까이 사는 좋은 사람들과

새롭게 만난 좋은 사람들과

멀리 있지만 마음을 닿고 있는 좋은 사람들에게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


이 자리를 빌려 감사합니다



처음 알게 된 것(즉. 몰랐던 것)


1. 어제 검색한 건데 기저귀는 1단계가 제일 낮은 단계였다. (사실 기저귀에 단계가 있는지 처음 알았다.) 그냥 개월수대로 사는 줄 알았다. 186개에 50000원 정도 하던데(이게 신생아가 보름 동안 쓰는 양이라니!!) 하기스가 제일 비싸지만 제일 많이 쓴다니 쿠팡에서 주문해 봤다.


2. 임신 막달에는 손가락이 소세지가 된다.

-소세지는 잘 구부려지지 않는다.

-잘 구부려지지 않는 소세지를 딛고 7월의 수박통보다 커 보이는 배를 붙잡고 일어나는 건 오뚝이가 일어나는 것 같은 묘기이다.

-6월 중순의 수박이 3만 원이라고 비싸다고 말하는 옆사람에게 갑자기 너무 서운하다.(지극히 가치중립적이고 합리적인 말이었다고 아직도 억울해한다)


3. 아기 물건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유아용'이라고 붙으면 비싸진다. 이건 마치 '다이빙용'이라는 말이 붙는 것과 같은..

어떤 용도가 내게 특별해지는 순간 같은 물건도 엄청난 가격이 되는 매직.

다행히 연대하는 맘들은 여러 번 돌려쓰는 것을 권유하고 동참한다.


'당'신의 '근'방에 아가용 중고 물건들을 굉장히 많이 팔아서 20만 원짜리 아기침대도 5만 원에 살 수 있고,

10만 원짜리 모빌도 2만 원에 구입 가능하다.

역류방지쿠션(이런 게 있는지도 몰랐다)과 범보의자(이것도 이런 이름인 줄 처음알았다)를 샀더니 수유쿠션과 초점책은 그냥 끼워줬다. (감사감사)


반면에

물 끓이는 포트도 온도계가 들어가면 2만 원짜리로 보이는 것이 20만 원짜리가 되기도 한다.(물론 그 외에 온도 보존 기능과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맘 안심 기능 등등이 있을 것이다)

아이 로션은 엄마 로션보다 비싸고, '아기'세제, '아기' 물티슈는 좋은 성분을 썼다고 기존 것의 두 배가 넘는 가격이 붙는다.(맘가이드 A등급 받은 건 정말 비싸다)


4. 앞으로도 많을 거다.

아이는 이유 없이 쉬지 않고 다섯 시간 이상 운다고도 하고

내 옆사람은 왜 이러나 싶기도 할 거고

나의 바닥은 어디까지인지를 가늠할 수 없을 거고

아이가 아니라 뇌를 낳는다는데 기억이 어디까지 없어지나 도전해보기도 할 거고

아이의 발달이 느린가 빠른 가도 몰라서 내내 검색할거고

이렇게 키워도 되나 매일 묻고 웃고 울 거다



근데

잘해봐야지 뭐. 배 안에서 꾸물대며 엉덩이를 씰룩거리고 딸꾹질을 2분 동안 해대고 옆구리를 발로 차고 방광을 머리로 누르는 네가 그리워질 것이다. 3일 뒤에 보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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