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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미 Sep 16. 2021

세 엄마 그리고 다섯 아들

스케이트 강습을 시작한 지 삼 주가 되었다. 우리 반은 기존에 있던 4, 5, 6학년 형 세 명에 1학년, 6살인 나의 아들 두 명, 그리고 나까지. 총 6명이다. 5, 6학년 둘은 형제이고, 4학년 형과는 원래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 사이라고 했다.



스케이트장은 시에서 운영하는 시설이기에 셔틀버스가 따로 없다. 수강생들은 각자 알아서 오고 가야 했는데, 5, 6학년 형의 어머니인 A와 4학년 형의 어머니인 B는 아이들만 내려 주고 수업이 끝날 때쯤 돌아오곤 했다. 둘의 손에는 항상 테이크 아웃 커피잔이 들려 있었다. 아이들이 친해 보이는 만큼 두 엄마의 친분도 꽤 두터워 보였다.


얼마 전이었다. 수업이 끝난 후 차로 가던 중 A와 마주쳤다. 항상 가벼운 눈인사만 건네던 사이였는데 뜻밖에 가깝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직접 스케이트 타는 거세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하하하.”


혹시 어린아이들 수업에 웬 아줌마가 주책맞게 껴들었다고 흉보는 게 아닐까. 민망하여 웃는 표정만 지었다. 차츰 스케이트장이 익숙해지면서 처음엔 몰랐던 것들이 하나둘씩 보이던 참이었다. 이곳에도 엄마들 커뮤니티와 그 사이의 인간관계가 있었다. 스케이트를 타다가 관중석을 보면 줄 지어 앉아 있는 다른 반 엄마들의 얼굴을 마주 보게 되는데, 괜스레 골치 아픈 입방아에 내 이름이 떠도는 건 아닐지 신경이 쓰였다. 안 그래도 이곳에서 스케이트 수강을 시작한다고 할 때 동네 엄마들이 이야기했었다.


“거기 치맛바람 장난 아닐걸?”


운동하러 가는데 무슨 치맛바람을 걱정해? 하며 의아해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빙상경기장에 주차된 휘황찬란한 자동차들을 보니 왜 그런 말이 도는지 조금은 이해됐다. 그저 아이들과 재밌게 운동을 해보고 싶어서 시작한 거였는데, 가까이하지 말았어야 할 곳에 발을 들여놓은 듯하게 께름칙했다.


불편한 관계는 딱 질색이다. 내가 누군가의 험담을 하는 것도 싫고, 험담의 대상이 되는 것도 싫다. 굳이 싫은 말을 들아가며 자리에 끼어있느니 차라리 혼자 있는 것을 택해왔다. 억지로 인연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하기에는 나의 에너지가 아까웠다. 과거의 나였다면 이리저리 마음 쓰느니 진작에 다른 반으로 옮겨 버렸을 거다. 하지만 이젠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두 아들이 형들과 함께 레슨 받는 것을 좋아했다. 어쩌겠나. 계속 다녀야지. 다만 최대한 말이 안 나오도록 그림자처럼 조용히 다녔다.


그런데 두어 주 후, 우연히 만난 A에게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됐다.


“저도 다음 주부터 강습받기로 했어요.”


오잉? 이게 무슨 말이지?


“밖에서 수다 떨 시간에 운동이나 하지 싶어서요. 덕분이에요.”


A는 시원한 웃음을 지으며 내 옆을 지나갔다. 내 행동이 유별나게 비치거나 다른 사람의 입방정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아닌, 긍정적인 자극제가 되었다는 생각에 기뻤다. 며칠 후엔 A에 이어 혼자 밖에서 시간을 보내기 지겨웠던 B까지 스케이트 강습에 합류했다. 이로써 우리 반은 아들 다섯 명과 엄마 세 명으로 구성된 '아들과 엄마반'이 되었다.


 


항상 생글생글 잘 웃는 A는 놀라운 친화력을 보여줬다.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카톡에 올라온 내 생일 알람을 보고 생일 선물을 건네기도 했다. 무려 직접 콩을 삶고 갈아서 만든 콩국물이었다. 이런 자연 친화적이며 부지런한 분을, 괜히 다른 사람의 말에 휘둘러 선입견을 품고 판단했다니! 나이가 들수록 열어야 하는 건 지갑만이 아니었다. 마음도 활짝 열어둬야 한다.


B는 조용하고 진중했다. 가장 늦게 스케이트를 시작했음에도 놀라운 운동신경으로 선두에 서서 우리 셋을 이끌었다. 매시간 뛰어난 근력과 유연성을 보여주어 나의 부러움을 잔뜩 샀다.


우리 셋은 스케이트를 타면서도 중간중간 끊임없이 조잘거렸다. 어떨 땐 스케이트보다 더 재밌을 정도였다. 출산 이후 급격한 근력 저하에 대한 걱정을 시작으로, 40대가 넘은 신랑들을 생각하며 빠른 세월에 놀라워하다가, 아이들의 교육 정보 공유로 마무리되는 극히 30대 후반 여성의 대화. 특히 교육 관련해서는 A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A에게는 남다른 교육관이 있었는데, 두 아들에게 스케이트 외에도 어릴 적부터 축구와 농구, 태권도는 기본이요, 검도, 격투기, 복싱까지 거의 종합 체육인 수준으로 운동을 가르쳤다고 했다. A는 아들들이 초등학생 때 가능한 모든 운동을 다 맛 보여주고 싶어 했다. 확실히 A의 아이들을 보면 운동실력이 탁월했다. 가르쳐서 날렵해진 건지, 날렵해서 가르치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가벼운 몸만큼 스트레스도 적어 보였다. 남자아이를 키우다 보면 넘치는 에너지를 어떻게 해야 하나 염려스러울 때가 있는데, A는 운동을 통해 긍정적으로 에너지를 해소시켜주고 있었다. 육아 선배인 A를 보면서 남자아이에게는 공부뿐만 아니라 운동도 중요하다는 걸 느꼈다.


우리 세 명 모두 동갑이었다. 억지로 인연을 만들지 말자라는 생각에 새로운 도시로 이사 온 지 몇 년이 지나도록 아는 사람이 몇 명 안 되었는데, 갑작스레 동갑 친구가 두 명이나 생겨났다. 그런데 결혼도 모두 같은 해에 했다는 것을 알고는 꽤나 놀랐다. 꽃다운 25세에 대책 없이 결혼한 용감한 여자가 여기 두 명이나 더 있다니. "난 남편이 나이가 많아서 빨리 했어요.", "나도." A와 B가 말했다. "전 남편이 빨리 결혼하고 놀러 다니자 해서요." 내가 말해놓고도 어이가 없다. 그런데 정말이다. 엄한 부모님 밑에서 여행 한번 못 다니다가 결혼한 후 둘이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줄곧 놀러 다녔다. 그래서 나만 아이 출생이 A와 B보다 5년이 늦다. 가끔 6살 둘째 아들의 화장실 뒤처리를 하다가 스케이트도 혼자 신는 초등학생 고학년 아들을 둔 A의 여유 있는 육아를 보고 있자니 어차피 낳을 애라면 빨리 낳으라던 할머니의 조언이 떠올랐다. 그땐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한다고 큰소리쳤는데. 쩝.






A와 B가 기본자세 수업을 마치고 처음으로 함께 스케이트를 타는 날이었다. 한 줄로 서서 차례대로 선생님의 레슨을 기다렸다. 보통 실력 순대로 줄을 선다. 형들이 가장 먼저, 중간에 우리 아이들, 그리고 엄마들은 뒤에 셋이 쪼르르 섰다. 2년 이상 스케이트를 탄 고급자답게 형들은 쏜살같이 나가더니 금세 한 바퀴를 돌아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엄마, 그게 아니지. 엉덩이를 더 낮추라니까!”

“다리를 더 뻗어!”


자기 엄마 순서가 되자 옆에서 호들갑을 떨었다. A와 B가 민망함에 저리 가라고 등을 떠밀었지만 아이들은 꿈쩍하지 않았다. 얼음판 위에선 누가 뭐라 그래도 이제 겨우 균형을 잡는 엄마보단 한 발로도 빙판 반 바퀴는 돌 수 있는 아들들이 우위였다. 한 아이는 선생님에게 은근히 다가와 “우리 엄마 괜찮아요?” 하며 상담을 요청하기도 한다. 뭔가 웃긴다. 보통 아이들이 무언가를 배우면 부모가 옆에서 지켜보는데, 이건 완전히 거꾸로다.


“그동안 밖에서 볼 땐 이렇게 힘든지 몰랐어요.”


A가 비틀비틀 다가와 말했다. 맞다. 나도 직접 해보지 않았으면 몰랐을 거다. 애들에게 왜 연습을 더 안 하냐며 잔소리만 했겠지. 내가 직접 해보니 얼마나 힘든지 알기에 겸손해진다.


강습 시간이 끝나자 아이들이 엄마들에게 배운 거 연습하고 가라고 성화다. A, B는 은근히 나가려다 결국 아이들에게 붙잡혀 못다 한 연습을 한다.


“엄마! 그게 아니라니까.”

“애들아, 엄만 그게 안 된다고!”

“내 손 잡아봐. 자 나 따라서 천천히 해보는 거야.”

“아유, 요것들이 조금 잘한다고 되게 잘난척하네.”

  

투닥투닥 큰소리가 나지만, 보기 좋다. 언제 아들 손잡고 스케이트를 배워보겠나. 아직 초등학생이니 해주지 몇 년만 지나도 쳐다보지도 않을 거다. A와 B도 겉으로는 구시렁구시렁하지만 뿌듯해하는 표정이다.


"엄마, 나 쉬!"


갑자기 둘째 아들이 화장실에 같이 가자고 성화다. 꼭 연습에 집중하려고 하면 이런다. 언제까지 화장실 셔틀을 해줘야 하나 성질이 확 올라오지만 애써 마음을 눌렀다. 이 또한 지나가리. 푸릇하던 20대 여자들이 어느새 30대 후반이 되어서 몸의 근력을 걱정하며 운동을 하고 있듯이, 이 여섯 살 꼬맹이도 어느새 커서 어른 노릇을 하고 있겠지. 하루는 길지만 십 년은 짧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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