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물이-2

제2편. 사라진 여물이

by 지형주

여물이는 유치원에서 나올 때부터 아빠에게 화가 났다. 일부러 아빠가 잘 볼 수 있도록 오른손 손목을 자꾸 내밀었는데 아빠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유치원에서 뭐하고 놀았는지, 뭘 먹었는지 맨날 하는 말만 했다.

집에 와서 가방을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여물이는 거실 한가운데 앉았다. 아빠는 잘 익은 수박이 가득 담긴 접시를 가져와 앞에 놓았다.

“아빠 싫어. 저리 가!”

여물이는 다짜고짜 아빠에게 소리쳤다. 아빠는 낮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 말 않고 싱크대로 가서 유치원 식판을 씻었다.

포크로 수박을 찍어 보란 듯이 물을 줄줄 흘리며 먹는 여물이. 설거지를 끝내고 아빠는 다시 여물이에게 갔다. 수건으로 목과 가슴까지 적신 물을 닦아 주려하자 여물이는 손으로 수박을 헤집으며 외쳤다.

“이거 뭐야! 수박씨가 잔뜩 있잖아!”

아빠는 말없이 수저통에서 포크를 꺼내 와 수박 조각마다 박혀 있는 씨를 일일이 빼줬다. 한동안 여물이는 씨 뺀 수박을 맛있게 먹었다. 깨끗이 접시를 비운 뒤엔 그냥 일어섰다.

“이리 와. 아빠가 닦아줄게.”

여물이는 홱 몸을 돌렸다. 서랍장 앞에 놓인 장난감 바구니를 넘어뜨렸다. 잡다한 것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옆에 바구니도 아무렇게나 잡아당겨 안에 것을 죄다 쏟아냈다. 아빠는 수건으로 물이 흥건한 여물이의 목과 가슴을 닦았다.

“싫다구. 싫어!”

여물이는 고함을 치며 아빠를 밀쳐냈다. 그래도 아빠는 놓아주지 않고 젖은 곳을 닦아냈다.

“누가 이렇게 흘리고 먹으래. 지저분하게 이게 뭐야. 엉!”

아빠도 화가 났다. 갑작스러운 아빠의 큰소리에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아빠는 방에 들어가 새 옷을 가지고 나왔다. 젖은 윗옷을 벗기려 위로 올렸다. 두 손을 꼭 모으고 여물이는 벗지 않으려 버텼다. 벗기려 할수록 제 몸을 굼벵이처럼 말았다. 아빠는 가지고 온 옷을 거실 바닥에 던지며 소리쳤다.

“니 맘대로 해!”

기어이 울음이 터졌다. 아빠는 방으로 들어가며 쾅 하고 문을 닫았다. 유치원에 데리러 가면서 멈췄던 게임을 다시 켰다. 헤드셋을 쓰고, 마우스와 키보드를 바삐 움직이며 총쏘기 게임에 금세 빠져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빠는 헤드셋을 벗고 기지개를 켰다. 방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거실 쪽을 봤다.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낮잠을 재우지 않는 유치원으로 옮긴 뒤 여물이는 집에 와서 한바탕 실랑이를 한 뒤 잠이 들곤 했다. 잠꼬대하며 어딘가로 굴러갔을지 모른다. 방을 나와 거실 여기저기를 살펴봤다.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얼른 안방으로 가봤다. 침대 위에는 개지 않은 이불만 구겨져 있었다.

“여물아.”

아빠는 여물이를 불렀다. 몸을 숙여 침대 밑을 보다, 안방 화장실 문을 열어 봤다. 밖으로 나와 다른 화장실 문도 열어 봤다. 어디에도 없었다. 현관문을 열었다가 이내 닫았다. 여기는 7층이다. 여물이는 혼자 승강기를 타지 못한다. 올해 초에 아빠가 미처 타지 못한 채 문이 닫혔을 때 안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어두운 비상계단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여물이는 집 안에 있다는 건데 어디를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불안한 생각이 밀려왔다.

“아저씨! 제가 알아요.”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잘못 들은 것 같다.

“아저씨! 여기에요. 여기!”

발밑에서 소리가 났다. 바닥을 보면, 여물이가 흩어놓은 장난감들과 값싼 피겨들이 어지럽게 널렸다. 역시 잘못 들었다. 아빠는 고개를 들어 거실과 베란다 사이 창문을 봤다. 창 아래쪽 유리가 동그랗게 구멍이 난 것처럼 보였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봤다. 그러자 이번에는 동그란 부분이 물결치듯 무지갯빛으로 보였다. 확인하기 위해 걸어갔다.

그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몸이 붕 뜨는 가 싶더니 아빠의 몸이 점점 작아졌다. “어어어!” 하는 사이, 아빠는 장난감 자동차에 들어갈 정도로 작아져 쿵 하고 매트 위로 떨어졌다.

“아저씨!”

푹푹 발소리를 내며 트리케라톱스가 뛰어 왔다. 발과 꼬리, 머리를 안으로 집어넣으면 한 덩어리로 접히는 변신 로봇이다. 아빠는 놀라서 뒷걸음쳤다.

“아저씨 시간이 없어요. 여물이가 바퀴 오리에게 잡혀갔어요. 얼른 제 등에 타세요.”

아빠는 정신을 차릴 틈이 없었다. ‘여물이가 잡혀갔다니. 그리고 이 공룡 로봇은 왜 이렇게 커졌지? 아니, 내가 작아진 건가?’

“어서요!”

뭔가에 이끌리듯 아빠는 트리케라톱스 등에 올라타고 말았다. 트리케라톱스는 창을 향해 달렸다. 무지갯빛이 일렁이는 동그란 곳을 바라고 껑충 뛰었다. 아빠는 놀라 딱 눈을 감아버렸다.

쿵쿵쿵 단단한 바닥을 뛰는 발굽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눈을 떠보니, 하늘 높이 솟은 커다란 성이 눈앞에 나타났다. 트리케라톱스는 굳게 닫힌 성문을 향해 달렸다.

“여기가 어디냐? 우리 집에 이런 곳이 있었나?”

“바퀴 오리가 사는 성이에요. 젤 높은 곳에 여물이가 갇혀 있을 거예요.”

문 앞에 다다르자 기다렸다는 듯 성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딱딱딱 날카로운 집게를 부딪치며 커다란 사슴벌레가 트리케라톱스를 향해 달려왔다. 아빠가 앉은 등이 밑으로 내려가면서 머리 위로 투명 유리가 생겼다. 한 손 손잡이가 올라오고 트리케라톱스는 전투태세가 되었다.

“아저씨가 절 조종해줘야 해요.”

“내가 어떻게?”

“게임하는 거랑 비슷해요.”

사슴벌레가 집게를 펼치고 덤벼들었다. 아빠는 본능적으로 조종간을 제쳤다. 아슬아슬하게 옆으로 피하고, 동시에 번쩍이는 버튼을 빠르게 눌렀다. 두 개의 뿔이 사슴벌레의 옆구리를 들이받았습니다. 사슴벌레가 저만치 쿵 하고 나가떨어졌다.

“잘하셨어요!”

땅에서 하는 공격이 여의치 않자 사슴벌레는 번쩍이는 등딱지를 열었다. 날갯짓을 하며 공중으로 떠서 다시 공격해왔다. 하지만 사슴벌레의 집게는 트리케라톱스의 단단한 등껍질을 뚫지 못했다. 등에 박히다만 집게를 빼지 못하고 어물거릴 때 트리케라톱스는 바닥을 뒹굴었다. 묵직한 무게가 벌레를 짓눌렀다. 집게가 부러지고 배를 내보인 채 드러누웠다.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앞발을 높이 들어 그대로 가슴을 내리쳤다.

“지지직!”

뿔에서 뿜어져 나온 번쩍이는 전기 에너지가 다리를 거쳐 사슴벌레의 온몸을 파고들었다. 몇 번 발버둥 치던 여섯 개의 다리가 투두둑 끊어지며 바닥으로 쏟아졌다. 가슴에서 발을 뗐다. 사슴벌레는 돌처럼 굳어버렸다.

사슴벌레를 해치운 아빠와 트리케라톱스는 곧바로 성문을 향해 달렸다. 우지끈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이 부서졌다. 성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여물아!”

아빠가 소리를 질렀다.

“아저씨, 계단으로 계속 올라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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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타고 쉬지 않고 올라갔다. 마침내 계단이 끝나고 동그랗고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철창문이 달린 방이 빙 둘러 있다. 그 앞을 여유롭게 두 발로 걷는 티라노사우루스. 힐끔 트리케라톱스를 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역시 변신 로봇이다.

“우리 여물이가 좋아하는 공룡인데…….”

“바퀴 오리 부하 중 제일 센 놈이에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둥그런 공 모양으로 변신한 티라노사우루스가 날카로운 톱니를 회전시키며 굴러왔다. 트리케라톱스 또한 변신으로 몸을 웅크리고 톱날 공격을 막았다. 불꽃이 튀었다. 동그란 것이 쫙 펼쳐지며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티라노사우루스, 앞발톱으로 트리케라톱스의 어깨를 찔렀다. 두 공룡은 동시에 전기에너지를 내뿜었다. 사방으로 날카로운 전기가 튀며 바닥과 천장이 파였다.

“으아악!”

그 충격이 아빠에게까지 미쳤다. 계기판에서 연기가 솟았다. 아빠는 빠르게 버튼을 누르고 조종간을 당겼다. 트리케라톱스의 두 뿔이 티라노사우루스의 배를 파고들었다.

“쾅!”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뿔에 찔린 티라노사우루스가 폭발했다. 트리케라톱스도 머리 일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두 공룡은 동시에 쓰러졌다. 투명 유리가 깨지며 아빠 몸이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아빠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세우고 철창 쪽으로 뛰어갔다. 철창을 잡고 안을 들여다보며 여물이를 불렀다. 그러나 어느 방에도 없었다.

“그, 그 아이는 여기 없다.”

붉게 빛났던 눈이 꺼졌다 켜졌다 하며 티라노사우루스의 머리가 말했다.

“그럼 어디 있어? 우리 여물이 어디 있어?”

아빠가 소리쳤다.

“왕 앞에 가 있겠지.”

지직 지직 머리통이 불안하게 떨렸다.

“스, 스스로 온 거야.”

기어이 눈빛이 꺼졌다.

트리케라톱스가 몸을 일으켰다. 뿔이 떨어져 나간 쪽 발이 꺾이며 쿵 하고 무릎을 꿇었다.

“왕이 누구지?”

아빠가 물었다.

“바퀴 오리가 여기 왕이에요. 저 복도를 돌아가세요. 큰 문이 나올 거예요.”

아빠는 대답을 다 듣기 전에 문을 찾아 달렸다.

“띠리링 띠리링 꽥꽥! 꽥꽥!”

어디선가 멜로디와 오리 울음소리가 섞여 들렸다. 거대한 문 앞에 이르자 꽥꽥 소리가 멈췄다. 손잡이도 없는 문이 우르릉 저절로 열렸다. 여물이가 보였다.

“여물아!”

아빠는 여물이 앞으로 뛰어갔다. 거대한 문만큼이나 높은 천장과 번쩍거리는 벽과 바닥. 아이는 그 한가운데 초점 없는 눈으로 서 있었다. 아빠는 여물이의 몸을 붙잡고 흔들며 눈을 맞추려 애썼으나 여물이의 눈은 돌아오지 않았다.

“띠리링 띠리링 꽥꽥! 꽥꽥!”

고개를 들어보니 왕이라는 자가 다가오고 아니 굴러오고 있었다. 노란 오리 모양으로 양쪽에 바퀴를 단 바퀴 오리. 공룡들보다 훨씬 컸다. 눈꺼풀은 꼼짝 않고, 주둥이도 움직임이 없는데 꽥꽥 소리는 계속해서 들렸다.

바퀴 오리는 여물이 뒤에서 멈췄다. 그제야 여물이는 고개를 움직이며 눈동자를 굴렸다.

“여물아. 아빠야. 아빠 봐봐!”

여물이가 아빠와 잠깐 눈을 마주쳤다.

“아빠가 데리러 왔어. 얼른 집에 가자.”

“싫어. 가기 싫어.”

“왜?”

“아빠는 내가 왜 화가 났는지 알려고 하지도 않았잖아.”

좀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평소에 여물이는 제 기분이 좋지 않으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그러냐고 물어도 짜증만 낼뿐이었다. 점점 이런 일이 잦아지면서 아빠도 아이와 있는 것이 힘들어졌다.

“왜 화가 났는데?”

“싫어. 이제 필요 없어!”

여물이를 가졌을 때 엄마 아빠는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았다. 아빠는 직장 문제로 여기저기 옮겨 다녔고, 늘 혼자 있던 엄마는 단단하게 잘 여물라고 태명을 여물이라고 지었다. 그것이 이름이 돼 버렸다.

여물이가 태어나고 엄마는 다시 직장을 나가야 했다. 번갈아 가며 짧은 육아휴직을 받고, 힘들 때는 늙으신 부모님을 모셔다 1년은 어찌어찌 키웠다. 그리고 돌이 지났을 무렵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겼다.

“내가 어린이집 가기 싫다고 얼마나 울었는지 알아?”

“여물아. 미안해. 그때는 어쩔 수 없었어.”

“거짓말하지 마! 아빠는 집에 있을 때도 날 돌봐주지 않았잖아!”

아내는 직장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승진도 하고 연봉도 올랐다. 하지만 아빠는 가는 회사마다 사정이 어려워져 문을 닫았다. 집에 있는 날이 많아졌다. 자연스럽게 엄마는 일을 하고 아빠는 집안일을 하게 됐다. 그래도 여전히 여물이를 어린이집에 보냈다.

“꽥꽥! 꽥꽥!”

꽥꽥 거리는 소리와 함께 바퀴 오리의 배가 양쪽으로 열렸다. 안에서 하얀 빛이 쏟아져 나왔다. 여물이는 뒤로 돌아 걷다, 이내 빛 속으로 사라졌다.

“여물아. 안 돼!”

아빠도 배를 향해 달렸다. 막 닫히고 있는 문틈으로 몸을 날렸다. 쿵- 하고 문이 닫혔다.

이 안은 온갖 기이한 것들로 가득 찼다. 나무에 주렁주렁 과자봉지와 초콜릿이 달렸다. 그런 나무들이 끝도 없이 늘어져 있다. 여물이가 손을 뻗어 젤리 봉지를 땄다. 봉지를 열고 빨강 젤리를 집어 입에 넣었다. 어른인 아빠는 자꾸 나뭇가지에 걸려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여물아. 기다려어.”

여물이가 고개를 돌려 아빠를 봤다.

“따라오지 마. 여기는 아빠가 있을 곳이 아니야.”

차갑게 말하는 눈빛은 어린아이의 것이 아니었다.

“안 돼. 아빠랑 집에 가자.”

“나랑 놀아주지도 않으면서, 내가 왜 가?”

여물이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여물아. 무슨 소리야. 아빠가 매일 책 읽어 주잖아?”

“겨우 세 권.”

“그럼 보드 게임하자. 응? 빙고게임 어때?”

“아빠가 맨날 이기잖아!”

여물이의 눈이 이글거렸다. 과자봉지와 초콜릿을 매달았던 나무들이 순식간에 불타오르며 재로 변했다. 주위가 어두우지고 붉게 물들었다. 갑자기 땅 속에서 쑥쑥 뻗어 나온 뭔가가 날카로운 이빨로 아빠의 몸을 물었다. 기다란 줄기 끝에 꽃봉오리처럼 둥근 주둥이가 달린 식충식물들이었다.

“아악!”

이빨이 아빠의 몸 여기저기를 파고들었다.

“카드게임은 내가 아빠보다 더 잘할 수 있어!”

아빠의 눈에 이 식물이 낯설지 않았다. 뭔가 생각이 떠올랐다.

“여물아. 식충식물은 빛의 기사한테 약하지?”

여물이가 아빠의 말을 듣자, 어디선가 번쩍이는 갑옷을 입고 긴 칼을 든 빛의 기사가 나타났다. 기사는 닥치는 대로 칼을 휘둘러 식충이들을 자르고 아빠를 구해냈다. 그러자 이번에는 몽둥이를 든 오크 무리와 창을 든 트롤들이 쏟아져 나와 기사를 둘러쌌다. 빛의 기사는 방패로 막고 칼을 휘두르며 오크와 트롤들을 공격했지만 그 수에 밀려 점차 빛을 잃어갔다.

여물이가 주문을 외우며 오른손을 들면 온갖 상상 속의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빠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여물이가 왜 이러는지를 생각했다. 그때, 여물이의 오른손 손목이 왠지 허전했다. 동물 팔찌가 보이지 않았다. TV 광고에 나오는, 마트 갔을 때 엄마를 졸라 산 동물 모양 구슬이 연결된 것이었다.

“여물아! 동물 팔찌 어쨌어?”

다시 공격 명령을 내리려던 여물이의 손이 우뚝 멈췄다. 눈빛이 흔들렸다.

“그거 엄마가 사준 거잖아. 어디 있어?”

여물이의 움직임이 멈추자 공격해오던 오크와 트롤들도 멈췄다. 여물이의 입가가 떨렸다.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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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 친구가 빌려달라고 해서 빌려줬어.”

“빌려준 거 맞아? 돌려준데?”

“모, 몰라. 몰라. 몰라!”

여물이는 털썩 주저앉으며 엉엉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오늘 여물이가 왜 기분이 상했는지 이제야 알았다.

어둡고 붉게 물들었던 곳이 어느새 하얗게 변했다. 아빠는 조심스럽게 여물이에게 걸어갔다. 옆에 앉았다.

“여물아. 미안해. 아빠가 잘못했어.”

여물이의 울음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아빠는 그대로 한참을 있었다.

“여물아. 친구가 팔찌 빌려 달라고 할 때 마음이 어땠어?”

“빌려주기 싫었어.”

“근데 왜 싫다고 얘기 안 했어?”

여물이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모르겠어.”

아빠가 여물이와 마주 앉았다. 여물이의 가슴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네 마음이 싫으면 싫다고 말을 해야 돼. 알았어? 아빠가 하는 말 따라 해 봐?”

여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싫어.”

선뜻 따라 하지 못했다. 아빠는 여물이를 보며 다시 말했다.

“싫어!”

“싫어.”

“더 크게. 싫어!”

여물이도 진지한 얼굴이 되더니 힘차게 외쳤다.

“실어어!”

크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천장이며 주위의 것들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오리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여물이는 무서워 아빠 품을 파고들었다. 아빠도 그런 여물이를 안고 꼭 웅크렸다.

“둘이 베란다에서 뭐해?”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에 여물이와 아빠는 몸을 풀고 거실 쪽을 봤다. 퇴근하고 돌아온 엄마가 핸드백을 든 채 서 있었다.

“엄마아!”

여물이는 큰 소리로 엄마를 부르며 일어나 엄마 품에 안겼다. 딸을 꼭 안으며 엄마가 말했다.

“아빠랑 베란다에서 놀았어?”

“응.”

“엄마 오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재밌었어?”

“응!”

아빠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휴- 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튿날, 아빠는 오늘도 유치원 밖에서 여물이를 기다렸다. 하원을 담당하는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와 여물이를 불렀다. 가방을 챙기고 신발장으로 갔다. 유리문 밖에 아빠의 웃는 모습이 보였다. 선생님에게 인사를 하고, 여물이는 아빠의 손을 잡아끌어 얼른 집으로 뛰어갔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가방을 식탁에 올리고 안에서 동물 팔찌를 꺼냈다. 서랍장 앞으로 가서 서랍을 열었다. 안에는 여물이가 아끼는 잡동사니와 싸구려 피겨들이 가득했다. 팔찌를 넣고 게임카드를 꺼냈다. 가만히 지켜보던 아빠가 물었다.

“여물아. 왜 팔찌를 거기다 넣어?”

“아빠, 나 이거 유치원에 안 가지고 갈래.”

“왜?”

“그냥.”

서랍을 닫고 거실 바닥에 게임 카드를 쫙 펼쳤다. 한 장 한 장 뒤집으면 기사도 나오고, 식충식물도 나오고 오크, 트롤 등 온갖 그림들이 나타났다.

아빠는 가방에서 유치원 식판을 꺼내 싱크대에 쌓여 있는 그릇들과 함께 설거지를 시작했다. 설거지를 끝내고, 물이 뚝뚝 흐르는 두 손을 수건으로 닦으며 돌아서는데 발이 따끔했다. 꽤나 아파 엉거주춤 발바닥을 훑었다. 손에 뾰족한 것이 만져졌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뿔 같았다. 금세 무엇인지 알았다. 책장 위에 올려놓은 공룡에게 갔다. 트리케라톱스를 집어 머리에 맞춰보았다. 꼭 들어맞았다. 접착제를 가져다 발랐다. 감쪽같이 제 모습을 갖춘 늠름한 트리케라톱스를 다시 책장 가운데 놓았다.

“아빠, 빨리 와. 게임하게.”

“응, 알았어.”

여물이와아빠는 얼른 여물이와 마주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