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마음을 얻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대상이 사람이든 동물이든 관계가 없이.
간식을 좋아하는 고양이 때문에 나는 고민했다.
녀석은 군것질거리를 주지 않으면 그르릉 소리를 내면서 내게 몸을 비벼댔다.
길냥이 시절의 아픔이 있었는지 배가 빵빵해야 마음이 편한 모양이다.
집사람 몰래 주전부리를 주다가 여러 번 혼났다.
“녀석의 배를 봐라. 배가 방바닥을 바닥을 쓸고 다니잖아.”
“당신은 교감이라곤 고양이 수염만큼도 없어”
그러면서 비책을 내게 알려줬다.
“능구렁이를 삶아 먹은 백이가 애교부리는 건 다 계획적이야.”
“무조건 주지 말고, 눈을 맞추고 기다려 봐”
“녀석이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멋쩍어서 기지개를 켜고 그래도 먹을 것을 안 주면 다른 데로 가”
그녀의 비법이 내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간식 하나 못 사주고 죽은 야옹이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서 그놈과 눈이 마주치면 꿀 떨어지는데 어떡해’
반려동물의 건강을 생각해 매정하게 대하고 싶지만, 나는 녀석의 마음을 읽지 못한 채 끌려가기 일쑤이다.
내겐 고양이와 교감은 당분 중독과 비슷하다.
단것을 흡입할 때는 기분이 좋지만, 약발이 떨어지면 다시 우울해지는 것처럼, 감정이란 한 방향으로 중독되면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공감은 재능의 영역도 아니고, 쉬운 일도 아니다.
그런데도 일부 전문가는 누군가의 문제를 손쉽게 진단하기도 했다.
“힘들었구나! 모든 일은 잘될 거야. 이 세상은 핑크빛이야!”라면서 당사자에게 희망 고문을 했다.
공감 능력을 키우려고 누군가에게 조언을 구했으나, 오히려 톱니가 망가진 수정테이프처럼 이상하게 헛돌기만 하지 않는가.
그건 겉으로 나타내는 증상으로 대충 치료하는 대증요법이기 때문이다.
감정을 깊이 교류하려면 경청이 필요하다.
세포 하나하나를 집중해라.
그 사람의 고민을 장편 시를 읽듯이 긴 호흡으로 천천히 끝까지.
옳고 그름은 나중 문제이다.
흙탕물이 가라앉듯 그가 차분해지면, 그 안에 담긴 마음을 물어라.
공감은 말 없는 행동이다.
할머니는 손자의 표정만 봐도 다 알 수 있다.
그녀는 어디가 아픈지 묻지 않고 뼈마디가 솟아오른 손으로 손자의 배를 문질렀다.
할미의 약손처럼 곁에서 말없이 안아주고 같이 울어주라.
공감을 끌어 올리려면 전문가의 조언보다 시를 사랑하자.
시에는 시인의 위로가 있고, 그 감정을 얻는 보물창고이다.
공감은 세상을 얻는 지혜이다.
독자를 울리면 유명 작가가 되고, 여성을 울리면 나쁜 남자(!)가 되고, 고양이를 울리면 훌륭한 집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