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번역가-독자
"마음이 너무 공손하게 잘 녹아져서 읽는 분도 승낙하실 것 같아요."
팀을 옮기면서 간단한 번역 업무들이 많아졌다. 번역하는 글들이 짧은 기사나 보고서일 때도 있지만 편지를 번역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문장 단위로 번역을 하기 전에 우선 전체적인 글을 쭉 훑어보면 필자가 이 글을 쓰게 된 목적과 글을 쓸 때의 마음이 어땠는지 어렴풋이 짐작하게 된다. 요청하는 글인 경우 간절함이, 진언하는 글에는 단호함이 전해지기도 한다.
하루는 해외법인 법인장이 영어로 쓴 메일을 번역하여 팀 내에 공유하였는데, 후배가 읽어보고 이런 말을 했다.
"그 법인장의 마음이 너무 공손하게 잘 녹아져서 읽는 분도 승낙하실 것 같아요."
은연중에 '내가 이런 목적 때문에 한국말로 글을 썼다면 이런 느낌이겠구나.'라는 마음이 고작 번역 편지 글에도 녹아났던 것이다.
메탈릭한 하루키식 냉소와 보통의 농밀함
우리는 외국 작가들의 글을 한국어판으로 읽을 때마다 번역가를 통해 그 작품을 감상한다. 하루키의 글을 읽을 때면 우리는 '양억관'씨가 먼저 접한 그의 글을 통해 하루키의 문장을 느끼는 셈이다. 다소 건조하면서 메탈릭하게 쓰인 하루키식 냉소는 어쩌면 양억관 씨가 느낀 감상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한 번역가의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었다. 그는 대학에서 외국어를 전공하지도 않았고 통번역 대학원을 졸업하지도 않았다고 밝히면서, 유창한 외국어보다 외려 더 중요한 것은 모국어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라고 하였다.
알랭 드 보통의 에세이를 읽으면 유려하고 통찰력 있는 문장을 보고 가끔 밑줄을 긋게 되는데, 결국 그 문장은 보통의 글을 한국어로 옮겨 적은 번역가의 솜씨였다. 작가가 원어로 아무리 멋진 문장을 쓰더라도 번역가가 그에 걸맞은 농밀한 단어를 제대로 고르지 못한다면 그 언어를 쓰는 독자들에게 깊이 있게 다가가지 못할 테니 말이다.
문득 대학교 때 어쩔 수 없이 서점에서 구입했던 번역서가 생각났다. 대학원생들이 전자사전을 펴놓고 한국어로 옮긴 해외의 원서들. 그저 영한사전에 적힌 단어의 조합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닐 뿐 '귀찮아 죽겠고 내용도 뭔지 잘 모르겠지만 지도교수가 시키니까 어쩔 수 없지.'라는 말이 행간 여기저기 배어있던 조악함. 그것도 어찌 보면 옮긴이의 부정적인 감상이 글에 녹아들어 독자인 학부생들과 소통하고 있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번역은 모국어를 공유하는 사람들에게 감상을 공유하며 나의 체취를 남기는 것. 그렇기에 번역가도 소설가만큼 위대한 예술가이자 문학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