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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tergrapher Sep 04. 2017

공간의 사회학

애먼 대상을 증오하지 않는 법


 상급 부대의 실수로

 한때 사단 내 병사들이 넘쳐나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 대대의 경우, 심할 때는 정원이 14명인 내무실에 24명이 같이 생활하기도 했다. 이 말인 즉, 가장 짬밥이 높은 고참 네 명을 제외한 나머지 20명은 하나의 관물대를 같이 쓰고(소위 ‘더블 관물대’를 쓴다고 불렀다.), 1인용으로 고안된 삼단 매트 위에서 둘씩 칼잠을 자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계절은 하필 무더운 한여름이었고 다들 옆으로 누워 팔뚝에 팔뚝을 맞대고 잠을 청했다. 야간 위병 근무를 다녀오면 내 자리가 없어지는 일은 허다했고, 아침에 눈을 뜨면 옆 전우의 겨드랑이가 눈 앞에 있는 날도 부지기수였다.


 왕고 한 명이 전역하면 차순위 고참 둘이 관물대를 하나씩 가질 수 있었다. 그리도 또 신병이 들어오면 그 둘 중 짬밥이 낮은 한 명이 다시 신병과 관물대를 같이 썼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결국 상병 4호봉에 이르러 우리 군번에게도 개인 관물대를 가질 기회가 돌아왔다. 다만 동기 세 명 중, 단 한 명만이 바로 위 맞선임 한 명과 함께 개인 관물대를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투고(왕고 다음으로 짬밥이 두 번째로 높은 고참)의 전역이 3개월 후였으니, 이번 기회를 놓치면 곧 다가올 여름 역시 더블 관물대와 함께 나야한다는 것을 의미했기에 우리 셋은 서로 언성을 높여가며 며칠을 싸웠다.


여리여리한 소녀들이 한명씩 쓰는 저 관물대 한 칸 아래서 건장한 남자 둘이 같이 잤다.


 셋 모두 각자의 이유는 있었다. 나는 셋 중 가장 오랫동안 더블 관물대를 사용했고, 한 녀석은 입대일이 가장 빨랐으며, 또 다른 녀석은 지난번 포상 외박을 양보했다. 그렇게 싸우고 며칠을 서로 말도 안 하다가 고참의 중재로 결국 가위바위보로 관물대를 가질 사람을 결정했다. 하지만 서로에게 틀어진 감정은 금세 풀리지 않았다.


 그 일이 있은 후, 몇몇 고참들은 동기들끼리 전우애가 없다며 우리를 비난했다. 하지만 우리 셋 모두에게 개인 관물대의 의미는 양보할 수 없는 큰 메리트였다. 고작 폭 1m가 채 안 되는 좁은 관물대지만, 그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을 의미했다. 더구나 군생활하며 겪는 두 번의 여름 모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전우의 살을 부대끼며 잠을 청하는 일은 죽기보다 하기 싫은 일이었다. 게다가 이제 짬밥도 제법 먹었는데 말이다.


동기에게 관물대를 (어쩔 수 없이) 양보한 날, 나는 잠자리에 누워 이를 부득부득 갈며, 중학생 시절 읽었던 김동인의 단편소설 <태형>을 떠올렸다.


"판결은 어떻게 됐소?"

영감은 대답이 없었다. 그의 입은 바늘로 호라메우지나 않았나? 그러나 한참 뒤에 그는 겨우 대답하였다. 그의 목소리는 대단히 떨렸다.

"태형 구십 대랍니다."

"거 잘 됐구려! 이제 사흘 뒤에는 담배도 먹고 바람도 쏘이고.... 난 언제나......"

"여보, 잘 됐시오? 무어이 잘 되었단 말이오? 나이 칠십 줄에 들어서 태 맞으면..... 말하기도 싫소. 난 아직 죽기 싫어! 공소했쉐다."

그는 벌컥 성을 내어 내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의 뒤에 이은 내 성도 그에게 지지를 않았다.

"여보! 시끄럽소. 노망했소? 당신은 당신이 죽겠다구 걱정하지만, 그래 당신만 사람이란 말이오? 이 방 사십여 명이 당신 하나 나가면 그만큼 자리가 넓어지는 건 생각지 않소? 아들 둘 다 총에 맞아 죽은 다음에 뒤상 하나 살아 있으면 무얼 해? 여보!"

나는 곁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로 향하였다.

"여기 태형 언도에 공소한 사람이 있답니다."

나는 이상한 소리로 껄껄 웃었다. 다른 사람도 영감을 용서치 않았다. 노망하였다, 바보로다, 제 몸만 생각한다, 내어 쫓아라, 여러 가지의 평이 일어났다.

- 김동인, <태형> 中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3.1 운동 때 만세를 부르다 체포된 이들이다. 사정이야 어찌 됐든 모두 나라의 독립을 염원하며 만세를 부르다 끌려온 애국자들이지만, 더운 여름날 손바닥만 한 감방에 수십 명의 사람들과 수감되어 있다 보니 나라의 독립은 둘째치고 오늘 마실 물과 다리 펴고 잘 수 있는 한 뼘 바닥이 간절하다. 이제 독립국가의 국민이기보다 내 몸 하나 뉘이고 싶은 욕망이 더 시급한 이들은 삼복더위 속에 뒤엉킨 서로를 증오하게 된다. 어느 날, 칠십 먹은 노인네가 태형 90대 판결을 받자 감방 사람들은 그 노인의 자리를 조금이라도 차지하고자 태형 대신 수감생활을 택하겠다는 노인을 이기주의자로 몰아세우며 끝내 형장으로 향하게 만든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나 역시 그냥 내 몸 편히 뉘일 자리 조금 차지하려는 본능 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건너편 침상에 홀로 관물대를 차지하고, 군생활 16개월 만에 처음으로 바로 누운 녀석도 마음만은 편치 않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생각해 보니, 이 갈등은 우리의 심성이 나빠서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피곤한 군생활, 잠이라도 편하게 자고 싶은 아주 기본적인 욕구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싸운 것이었다. ‘여기가 교도소도, 아우슈비츠도 아닌데 왜 우리는 그렇게 싸웠어야 했나.’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았다.




 이성을 갖고 있다지만, 인간은 매우 나약한 존재다.

 생존을 위한 공기, 물, 영양분, 수면이 부족하면 우리는 언제든 남을 해칠 수 있다. 고의적으로 부족한 자원을 배분하면서 피지배계급끼리 서로 증오케 하고, 단결하여 대항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기득권층의 오래된 지배 기술이었다. <태형>에서, 어제의 만세 동지들은 누가 이런 부조리한 상황을 조장했는지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서로를 사지에 밀어 넣고, 강제수용소의 유대인 동포들은 자신들을 학대하는 나치를 증오하는 대신 눈 앞의 빵 조각을 놓고 유리조각으로 상대를 찔렀다.


 잠이 들기 직전, 이번 일로 동기들과 소원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정말 잘못한 게 있다면, 이 조그마한 막사가 터지도록 신병을 보낸 사단 본부의 잘못이지, 서로 관물대를 갖겠다고 언성을 높이던 저 친구들과 나의 잘못이 아니었다. 고작 2제곱미터 되는 내 자리 한 뼘 갖겠다고 언성을 높인 게 뭘 그리 비난받을 일이라고. 정말 이 일의 근본 원인은 따로 있는데, 이 이권을 놓고 눈 앞에서 나와 경쟁하는 사람이 저 사람이라는 이유로 우리는 종종 잘못된 대상에 화를 내고 서로의 얼굴을 할퀸다.




 오전 7시 45분 김포공항발 9호선 급행열차는

 오늘도 가양역에서 이미 만원이다. 바지 주머니에 있는 스마트폰을 꺼내 얼굴 앞까지 가져올 수도 없을 만큼 전후좌우 사람과 옴짝달싹 할 수 없을 만큼 밀착한 상태에서 나는 비상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을 적어놓은 안내문을 읽는다.


 '의자 밑에 있는 밸브를 돌린 후 출입문을 세게 밀어 여시오.'


 지금 이 순간 누군가 유독가스를 터뜨린다면, 나는 앞에 사람들을 뚫고 기어가 저 밸브를 돌리고 출입문을 열 수 있을까. 아마 손 쓸 겨를도 없이 연기로 자욱한 지하철 객실 내에서 숨을 할딱거리다 아내에게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라는 카톡 하나 전송하는 것도 힘에 부치지 않을까.


 염창역에서 사람들이 거칠게 밀고 들어오며 여기저기서 "어맛!"하는 비명소리가 들린다. 제법 육중한 나의 몸도 1m가량 자동으로 앞으로 밀려 앞사람의 정수리에 코가 닿는다. 고작 내 발바닥 면적 정도만 허락된 이 좁은 공간에서 앞 뒤 사람은 내 자리를 위협하는 적이고, 옆에 선 대학생이 펼쳐 든 토익책 모서리는 내 뺨에 자꾸 닿아 거슬린다. "야 이 새끼야 책 치워."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올 만큼 평일 아침 9호선 급행열차의 불쾌지수는 극에 달한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지하철을 탄 이들 중 누구도 적의를 갖고 탄 사람은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처럼 겨우 발바닥 넓이만큼의 자리만큼만 차지하고 서서 자기 한 몸 지지하려 고군분투할 뿐이다. 잘못이 있다면, 개통 8년이 지났지만 객차 증설에 적극적으로 투자하지 않는 ‘메트로 9’나 관련 정부부처가 사과해야 할 일이다. 내 주변에 끼여 서 있는 저들도 내 자리를 호시탐탐 넘보는 악인들이 아닌, 그저 무사히 사무실에 출근하기 위해 매일 힘든 출근길을 감내하는 민초들임을 상기하며 오늘도 나는 두 다리에 애써 힘을 꽉 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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