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32] 건강한 삶
별로 오래 살고 싶지 않았다. 아니, 살고 싶지 않았다. 왜 사는지 모르겠지만 죽을 수 없어서 살았던 날들.
그래서 좀 '막 살았던' 것 같다. 말하자면, 열 두 살 때부터 스물 여덟 살 때까지 내내 중2병을 앓았던 거 같다.
막 사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최소한으로 자고, 최대한으로 술을 마셨다.
술 마실 돈은 벌어야 하니까 잠을 더 줄여 일했고, 술을 마셔야 하니까 잠을 더 줄여 마셨다.
그렇게 살면서 컬투쇼 우수사연급의 술 사고를 하도 많이 쳐서, 결혼할 때 신랑이 내게 바랐던 유일한 조건은 '금주' 그것도 힘들다면 '절주'였다.
저렇게 사니까, 당연히 삶은 공허했다. 한낮에는 술로써 삶을 채울 수 없으니 쇼핑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인터넷 쇼핑으로 억 단위는 가볍게 썼을 것 같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내 업이 그렇다보니 그렇게 쓴 내 돈의 일부는 다시 내 월급이 되었을 거라는 거? 이런 의미 없는 돈지랄이 내 삶의 증명이 될 수는 없었다.
결혼을 하면서 생각해본 적도 없는 숫자가 고스란히 빚이 되었다. 그리고 그 즈음 이직을 하면서 새로운 직장과 새로운 일에 적응하느라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결혼할 때 약속한 것이 있으니 술자리 참석 횟수는 현저히 줄었다. 통장에 잔고가 쌓이고(물론 2년마다 한 번씩 은행에 상납할 돈이지만) 수면 패턴이 점점 정상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고 편두통과 위염은 예전만큼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다만 너무 열심히 일을 했던 탓인지, H라인 스커트 차림에 8센티미터짜리 킬힐을 신고 뛰어다니는 게 주특기가 되다 보니 그랬는지, 아니면 물려줄 거라곤 허약한 경추와 요추 뿐이었던 아버지의 가난한 유산 탓인지 서른 한 살에 허리디스크와 목디스크의 연타를 맞았다. 아, 나한텐 아직 갚아야 할 빚이 있는데. 우리 아직 내 집 마련도 못했는데. 글을 쓰고 먹고 살겠노라고 큰소리 쳐놓고 마흔도 안 되어서 허리가 맛이 가다니. 글쓰기는 허리싸움인데! 허리가 아프니 요리도 할 수 없고, 마하와 산책도 할 수 없고, 심지어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것조차 불편해졌다. 덜컥 겁이 나서 바로 운동을 시작했다.
그렇게 필라테스를 시작해서 꼬박 1년 반을 강습받았다. 6개월간은 수백만원 들여서 개인강습만 받았다. 요즘은 운동을 쉬고 있지만 그 때 잡힌 코어 근육 덕분에 다시 허릿병을 앓지는 않게 되었다. 그리고 그 때 건강에 대해 자각하게 되면서 내게 필요한 비타민이 무엇인지 찾아 공부해서 꾸준히 먹기 시작했고, 화학물질에 대한 경각심도 생겨서 성분 좋은 화장품과 바디제품을 찾아 쓰기 시작했다. 하다 못해 밥을 해도 현미 6 : 백미 4의 비율로 지었다. 술은 당연히 거의 안 마시게 되었고. 게으름 피우지 않고, 그렇다고 너무 과하게 몸을 쓰지 않는 선에서, 부지런한 일상 속에서 최대한 규칙적인 하루하루를 지키기로 했다.
여전히 내게는 갚아야 할 빚이 있고, 밥과 삶과 추억을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다. 그러니 내가 아프면 안 된다. 건강해야 돈을 벌 수 있고, 밥을 지을 수 있고, 여행을 할 수 있고,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글을 쓸 수 있다.
이 나이만큼 살아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게임에서 보너스 라이프를 얻은 것처럼 자꾸 기대를 갖게 된다.
그래서 결국, 건강한 삶이라는 건 지켜야 할 것이 있는 삶이 아닐까.
내 건강이 지켜짐으로써 내가 지켜야 할 소중한 일상과 사람들을 지킬 수 있는 것.
이 책임감들이 나를 더 건강히 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