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83] 고독한 미식가
가슴 속부터 차오르는 갑갑함이 기어코 목구멍까지 막아버려 말을 잃을 때가 있습니다.
한남동 사옥 시절, 입사 2년차부터 그랬던 것 같은데 처음엔 그런 기분을 억누르고 그래도 먹고 살아야 한다며 다 먹자고 하는 일이라며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끌려 다니거나 아니면 혼자 한남오거리 주위를 배회하거나 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내 기분을 캐치하던 다정한 팀장님이 무슨 일 있냐고 뭐 먹고 싶냐고 상냥하게 물어와도 뚱한 표정으로 '배가 별로 안 고파서요'하고 자리를 피해버리고 말았죠.
그러다 방황의 범위를 이태원으로 넓혔을 때, 이국적인 국숫집 두 곳이 나의 '혼밥 아지트'가 되었습니다. 기분이 괜찮았던 어느 날 팀원들과함께 먹어보고 '맛있다!'고 느꼈던 기억 때문이었어요. 피크타임의 유명맛집에 혼자 들어가서 먹어도 괜찮을까 싶었지만 어차피 홀로하는 식사여서 10분 정도의 시간 내에 뚝딱 해치우기 일쑤여서 종종 혼자 들러 '면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 곳은 우동집. 말간 국물에 굵직하고 쫄깃한 우동 몇 가락, 국물의 감칠맛과 면발의 씹는 맛을 더해주는 미역 몇 조각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정갈한 사누키 우동으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잘 차려진 일본식 반상을 마주하노라면 자연스럽게 젓가락을 쥐고 두 손 모아 '잘 먹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게 되는 곳이지요. 호로록 호로록 면발을 흡입하고 정식의 사이드 메뉴로 나오는 유부초밥과 튀김을 아삭거리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모든 그릇을 깨끗하게 비우게 됩니다. 여기선 진하게 우러나는 가루녹차를 물 대신 마셨어요.
다른 한 곳은 홍콩식 에그누들집. 사실 메인메뉴인 새우완탕면보다 '초이삼 데침'을 더 맛있게 먹었던 것 같습니다. 홍콩 본토에서만 나는 채소라는데 살짝 데쳐 굴소스에 볶은 것이 완탕면의 느끼함과 잡내를 잘 잡아주는 좋은 반찬이에요. (가격은 사악하지만) 아, 그러고보니 여기선 마찬가지로 향이 강한 보이차가 생수 대신 자리하고 있었군요.
지금은 홍콩식 에그누둘집도 사누키 우동집도 더 이상 이태원에 없는 것 같지만.
헛헛한 마음을 따뜻한 국물로 달래던 그 '내 면의 시간'이 어쩌면 나를 위한 '내면의 시간'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ps. 판교로 오피스를 옮기고 난 후 그 '면의 시간'은 어떻게 되었냐고요?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라는 해피엔딩이면 좋겠지만, 우리 회사원들에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여전히 저만의 비밀스러운 면집에서 '내면의 시간'을 갖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