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90]
#자존감의 함정
'다른 사람과 비교 좀 그만하고 자존감을 키워' '자존감이 높으면 남의 눈치 볼 필요 없지'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그럴 듯 하다 싶으면서도 뭔가 뒷맛이 개운치 않았어요. '자존감은 과연 개발 가능한 영역인가'라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MBTI 검사를 통해 'I'형이 나온 사람이 '나는 내 내향적인 성격이 싫어서 고치고 싶어' 'E형인 사람들 부러워'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결의 이야기로 들렸어요. 이 경우 바른 해석은 '내향적인 성격을 고치고 싶다'가 아니라 '나는 내향성이 강한 기질의 성격이니까, 외향성이 요구되는 순간에는 스트레스 받는 게 당연하고, 이건 나중에 내 내향성에 맞는 방법으로 풀어주면 됨'이지요.
그런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남과 비교하고 남의 눈치를 보고 자꾸만 움츠러드는 찌질한 나 자신의 모습은 과연 '자존감'이라는 파라미터가 기준치보다 낮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 그렇다면 그 '기준치'란 과연 무엇인지? 자존감이란 게 IQ처럼 측정가능하기나 한 것인지?
그리고 그 '평균 이상의 자존감'에 집착하면 할 수록 '자존감 뿜뿜하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이 갈수록 커져서 결코 자존감이 높아지지 않는 희한한 역설도 찜찜했습니다. 실체 없는 트로피를 따겠다고 섀도우 복싱을 하는 것 같잖아요?
전 원래 기질적으로 외향적이고, 호승심 강하고, 늘 자신감 충만해보이지만 그렇다고 열등감을 느껴본 적 없어나 스스로에게 실망해본 적 없다거나 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죽을 때까지 떨칠 수 없는 열등감에 시달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최고'였다가 '세상 병신'이었다가 오락가락 하죠.
주위 사람들이 아무리 칭찬해주고 격려해줘도 그 자존감이라는 마법의 샘에선 생각보다 쉽사리 맑은 물이 퐁퐁 솟아오르지 않는데, 살아오면서 그런 순간마다 저는 '품위'와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는 두 가지 가치에 균형을 실어가며 자존감의 샘에 마중물을 부었습니다.
#품위
열 아홉살 때 M.스캇 펙 박사의 <거짓의 사람들>이라는 책을 읽다가 평생 마음에 품고 갈 구절을 얻었습니다.
진짜 선한 사람은 스트레스의 시절에도 자신의 성실과 성숙과 민감성을 저버리지 않는 사람이다. 품위란 삶의 하강기가 찾아와도 퇴행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 고통에 직면하면서도 무디어지지 않을 수 있는 능력, 극심한 고뇌를 겪으면서도 제자리에 남을 수 있는 역량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위대함을 재는 척도-어쩌면 최선의 척도-는 고난에 대처하는 역량일 것이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소위 '다 때려치고 싶은' 순간들이 오는데, 그럴 때마다 내가 독기를 품고 끝까지 물고 늘어지게 해준 건 아이러니하게도 저 '품위'라는 단어였어요. 포기하는 건 되게 없어보였거든요. 그리고 나이를 먹을수록 저걸 '독기'가 아니라 '품위'라고 부르는 이유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저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인정받을 때나 버려졌을 때나 배려 깊게 생각하고 성숙하게 말하고 성실하게 행동하는 능력이었거든요.
그 어떤 환경에서도 드넓은 강물처럼 흔들리지 않고 고고히 내 갈 길을 가는 나, 멋지지 않나요?
#근거 없는 자신감이 근거를 만든다
주니어 때 직속 부장님이 "너의 최대 장점은 항상 자신감 넘친다는 거지. 그게 근거가 있든 없든."이라고 칭찬인지 까는 건지 모를 소릴 해주셨는데... (뭐 결국 예뻐해주고 잘 챙겨주셨으니 칭찬이었던 거 같지만)
워낙 피하지 않는 성격이기도 하고(못하겠다는 소리는 자존심 상해서 못함, 문제가 있으면 무조건 풀어야 하는 강박증), 그냥 뭐든 부딪혀 보고 최선을 다하고 성공하면 좋은 거고 실패해도 배우는 게 있다-는 주의여서 그놈의 '근거 없는 자신감' 못 잃고 계속 일해왔는데 문득 돌아보니 덕분에 남들이 쉽게 못하는 일도 해보고 그러면서 여기저기 사람들 눈에도 눈에 띄고 또 기회를 얻고 하는걸 반복한 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근거 없는 자신감 자체가 근거가 되었고, 사람들은 생각보다 성공과 실패에 많이 집착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어요. 심지어 나조차도. 중요한 건 제대로 했는지 아니면 마음 없이 대충 했던 건지의 여부였죠.
과감하게 선택하고, 자신의 선택에 있어서는 최선을 다해 결과물을 내는 나, 멋지지 않나요?
#내가 제일 잘 나가
그래서 결국 자존감은 개발 가능한 영역인 것 아니냐-는 결론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하루 어떤 순간엔 아차-싶게 품위 없이 행동한 스스로에게 또 실망하기도 하고, 아무리 근거 없는 자신감이 근거가 된다고 해도 자신감이 아니라 뻔뻔함으로 느껴져서 양심적으로 도저히 손 들지 못한 일도 있었을 거에요. 혹은 아무리 최선을 다하는 게 장땡이라고 해도 눈 뜨고 못 볼 꼴의 결과물을 냈을 때도 있었을 거에요.(흑) 그렇다고 역시 나는 구제불능 쓰레기야, 자존감 하나 지키지 못하다니-하며 낙담할 일도 아니란 말이죠.
품위 있게 살려는 노력도, 근거 없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부리는 욕심도, 그냥 내가 인생을 사는 한 방법일 뿐. 다른 방식의 인생을 산다면 그것 또한 내가 선택한 인생의 방식일 뿐. 어떤 모습의 나-라고 해도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줍시다. 그럼에도 내가 조금 더 당당한 모습이길 바란다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2NE1 <내가 제일 잘나가>를 스무 번쯤 반복해서 듣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인것 같습니다. 그 근본 없는 가사와 리듬에 맞춰 등을 곧게 펴고 가슴을 활짝 열고 걷게 될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