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텐더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다. 남들이 일하는 낮엔 자고 밤이 되어서야 일상을 시작한다. 남들과 다르게 사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를 옭아매는 규율들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드리드 시내의 한 바(Bar)에 앉아 진토닉을 따라내는 바텐더를 멍하니 바라봤다. 바텐더가 되면 이대로 마드리드에 정착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 무렵 나는 평생을 다투던 아빠와 드디어 말을 안 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학교를 쉬며 서너 가지의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렇게 천만 원 남짓 되는 돈을 모아 무작정 스페인 유학길에 올랐다. 난생처음 누려보는 온전한 자유. 그것 하나만으로도 마드리드에 정착할 이유는 충분했다.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생각을 억누를 수 없어 벌게진 얼굴을 하고 일단 바텐더에게 다가갔다.
셰이커를 흔들고 있던 그녀는 라우라(Laura)라는 조금 흔한 스페인 이름에 나이는 23살이라고 했다. 라우라는 시끄럽고 매캐한 공기의 그곳과 어울리지 않게 이지적인 모습이었다. 어두운 갈색 머리에 뚜렷한 눈매,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체크무늬 셔츠 차림이었다. 그 모습에 조금 친근함을 느꼈던 걸까. 다짜고짜 나도 바텐더 일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조금 당황한 얼굴을 하더니 이내 옅은 웃음을 짓곤 무알코올 모히토나 한 잔 마시라고 건넸다. 술에 감각이 마비돼 더는 맛을 느끼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도 곧장 만들어준 모히토는 꽤 맛있었다. 다시 한번 말했다.
“나도 이거 만들어보고 싶어.”
계속해서 조르자 당해낼 재간이 없다고 생각했던 건지, 한눈에 봐도 술에 취한 동양 여자가 주도하는 그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던 건지 라우라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일단 바 안으로 들어와 보라고 했다.
“보스(Boss)가 오기 전에 한 번만 해보고 바로 나가는 거야.”
곧장 고개를 끄덕이고 손에 쥐여 주는 셰이커를 흔들어봤다. 고작 허리까지 오는 바 하나 넘어왔을 뿐인데 풍경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구나 싶었다. 그곳의 주인이 된 양 한 손은 허리춤에, 다른 손은 셰이커를 들고 바 건너편에서 음악에 맞춰 한데 엉켜 춤추는 사람들을 지켜봤다. 천장 위 스피커에선 라틴풍의 노래가 흘러나오는데 그와 어울리지 않는 춤을 추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열이 오른 얼굴로 혼자 비실비실 웃으며 셰이커를 흔들어 대고 있는데 일행이었던 그 남자가 지나갔다.
“지금 뭐 하냐?”
“나도 바텐더 해보고 싶어서. 재밌을 거 같지?”
“바텐더 하면 저렇게 Slut같이 입어야 돼.”
그는 무심하게 말하곤 밖으로 나가 담배를 태웠다. 뒤돌아보니 멀찍이 서 얼음을 푸던 라우라는 더웠는지 좀 전의 체크 셔츠는 벗고 민소매만 입은 채였다. 어쩐지 입안이 쓰게 느껴져 혼잣말로 욕을 중얼거렸다.
유리문 밖에서 뿌연 연기만 내뿜는 그를 노려보고 있을 때쯤 바의 보스가 도착했는지, 라우라는 당황하며 빨리 제자리로 돌아가라고 했다. 허둥지둥 건너편 자리로 다시 돌아와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턱을 괴고 라우라 쪽을 힐끗 보자 곧장 눈이 마주쳤고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그때 오른쪽 어깨에서 팔을 따라 차가운 액체가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갑작스러운 찬 감각에 영문을 알 수 없어 곧장 위를 올려다봤다.
‘물이 새는 건가?’
그러자 오른쪽 옆 시야에 그의 머리칼이 들어왔다. 비스듬히, 그리고 천천히 오른쪽을 돌아봤다. 손에 든 게 데스페라도스(Desperados) 맥주병인가. 내 머리카락을 타고 흐르는 액체가 그 병에 든 게 맞는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뭐하냐고."
한 손엔 맥주병을 들고 다른 쪽 팔꿈치는 바에 걸쳐 둔 채 퉁명스럽게 날 내려다보는 그를 나는 몇 주 전에 처음 알게 됐다.
‘세비야 vs 마드리드 경기 보러 가실 동행 구합니다. 솔(Sol) 광장에서 만나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경기장(Estadio Santiago Bernabeu)까지 같이 가요.’
마드리드에 도착한 지 한 달 정도 지났을 무렵, 시내에 볼만한 것들은 다 본 것 같아 다른 사람들은 이곳에 오면 뭘 하나 싶어서 인터넷 카페에 접속했다. 그리고 그때 그 글을 발견했다. 그래, 스페인에 왔는데 축구를 봐야지. 곧장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우리는 한 시간 후 광장에서 만났다. 그가 마드리드에 오게 된 스토리는 무척 흥미로웠는데, 그간 교류하던 유학생들과는 달라 단숨에 내 관심을 끌었다.
지방의 한 프로 축구단에서 선수 생활을 하던 그는 스페인 코르도바 축구단의 한 에이전트 눈에 띄어 다음 달이면 그곳으로 이적할 예정이었다. 한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해외로 출국하기 전 보름 정도의 휴가가 생겨 쉬던 중, 꿈에서 레알 마드리드의 축구 경기를 관람했다. 잠에서 깨자 설레는 마음을 도저히 억누를 수 없었고 그날 바로 인천공항에서 비행기 표를 끊어 마드리드에 도착했다. 그 몇 시간 뒤 나를 만난 것이었다. 그의 스토리가 황당하면서도 나로선 도저히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일들이라 집중해서 듣게 됐다.
그는 베르나베우 경기장에 도착하자 극구 사양하는 나를 두고 직접 내 표까지 VIP석으로 끊어줬다. 유학생 주머니 사정으로 그 정도 좌석은 여의치 않을 것 같아 처음엔 거절했으나, 한편으론 언제 또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표를 받아 들고 경기장 앞 대기 줄에 그와 함께 섰다.
그날의 축구 경기는 스포츠를 즐기지 않는 나도 엉덩이를 들썩이고 함성을 내지를 만큼 극적이었다. 자칫하면 선수의 땀도 튈 수 있겠다는 현장감, 한 손으로 쉴 새 없이 땅콩 껍질을 까먹으며 크게 욕을 내지르는 훌리건들, 호날두의 골 세레머니까지. 옆자리의 그와 나는 함께 소리 지르고 손뼉을 마주치며 상기된 볼로 경기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게 우리 만남의 시작이었다.
그와 만남을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나자 그는 내게서 친구를 빼앗아 갔다. 친구는 어느 날 밤 그의 연락을 받고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와 자신이 운명이라고 느꼈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다음날 내가 그에게 따져 물으니, 별일 없었다며 별 것 아닌 일에 신경 쓰지 말라 했다. 나는 그를 선택하고 친구와 연을 끊었다.
그런데 그다음엔 차츰 나 자신을 내게서 빼앗아 갔다. 요즘 같은 취업난에 서울 돌아가서 대학 나와도 별거 없으니 여기 정착해서 내조하는 게 어떻겠냐거나, 대학생 애들이나 입는 싸구려 옷은 좀 버리고 비싼 거 사줄 테니까 그거 입으라거나. 그런 것부터 시작했다. 어딘가 모르게 계속 불편한 기분이 들었지만, 유학 기간이 끝나도 스페인에 있을 수 있겠구나, 가성비 좋은 옷을 찾느라 더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막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이후엔, 요즘 시대에 날씬하지 않은 네가 게으른 거야, 콘돔 없이도 잘 수 있어, 너 진짜 답답하게 산다 그런 말로 이어졌다. 나는 그렇게 그에게 서서히 잠식당하고 있었고 끝이 머지않았음을 내심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외면했다. 그의 경제적 안락함에 기대어 스페인의 자유를 더 만끽하고 싶었다. 사실 그 자유가 진짜 자유가 아닌 걸 알면서도.
손끝을 타고 흐르는 데스페라도스가 마지막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일어나서 있는 힘껏 그에게 손을 뻗었다. 손은 그의 가슴팍까지 밖에 닿지 않았지만, 온 힘을 다해 내리치고 욕을 퍼부었다. 노래에 맞춰 흐느적거리던 몸들이, 초점이 맞지 않아 흐릿했던 눈동자들이 순식간에 나에게 향했다. 그는 그 나름대로 내 멱살을 쥐려고 손을 뻗었으나 말리는 군중의 수많은 팔에 가로막혀 허공에서 의미 없이 휘젓고 있을 뿐이었다. 라우라는 어느새 바를 넘어와 내 팔을 잡고 집으로 가자고 했다. 정신이 들어 뒤를 돌아보니 라우라의 어깨너머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내 가방을 집어 가려는 남자가 보였다. 그를 향해 소리를 내지르고 얼른 가방을 빼앗아 들었다. 아무도 내게서 더는 빼앗아갈 수 없다는 듯이 두 손에 꼭 쥐었다. 그대로 밖에 나가 택시를 잡았고 따라 나온 라우라는 내 어깨를 잡았다. 나는 어깨에 올려진 파리한 손을 말없이 내리고 택시에 올라탔다.
신촌 대학가, 바 한구석에 걸린 TV에서 축구 경기가 흘러나온다. 사람들이 일제히 탄식하다가 손뼉 치며 환호하길 반복한다. 나는 휴대폰을 집어 들어 문득 떠오른 그의 이름을 검색한다. 어디에도 그의 이름은 없다. 헛웃음이 비어져 나온다. 그의 이야기는 진짜였을까.
그때 화장실에 다녀온 라우라가 내 맞은편에 앉아 말했다.
"집에 가자."